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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선생 Nov 20. 2018

오늘의 문학 수업

노동하는 소설에 대하여..  <운수 좋은 날>

이 글은 이제 어디에 쓰일지 알 수 없는 글이 되었다. 원래는 곧 출간될 <(가제) 땀 흘리는 소설>의 서문으로 쓸 예정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갈 데 없는 글이 되고 만 것이다. 서문으로 쓰기에는 지나치게 길고 디테일하다. 특히 <운수 좋은 날>에 대해 문학교육적으로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니 일단 이 곳에 두고 글의 쓰임새를 고민해야겠다. 


 1. 소설? 왜 읽지?     

  소설은 사람들의 삶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예술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진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소설 속 서술자의 눈을 따라가며 인물들의 삶을 지켜봅니다. 이것은 일종의 제약이면서 강제적인 규칙이 됩니다. 그러니 소설을 읽는 동안 서술자의 눈을 카메라 삼아 인물이 살아가는 소설의 공간과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을 조심조심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주의 깊게 관찰하거나 그 관찰의 결과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기록된 타인의 삶을 주의 깊게 살피게 됩니다. 설사 그것이 허구의 인물일지라도 말이죠.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경험입니다. 소설 속 인물에게 푹 빠져 감정을 이입하는 현상, 이를 동일시 혹은 존재의 전이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순식간에 존재가 전이됩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건 소설가가 허구의 인물을 핍진한 순간 속에 가둬놓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훌륭한 소설들은 소설 속 인물들이 이 사회 어딘가에 살아가는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이렇게 동일시, 혹은 존재 전이된 인물은 그동안 독자가 인식하지 못했던 사회의 타자들과 교류합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당당한 사회의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비교 가능한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나와 비슷하든 다르든 이 대상이 있어야만 내가 누구인지가 더 뚜렷해집니다. 이런 대상을 보통 타자라고 부릅니다. 소설은 평소에는 교류할 수 없었던 타자들을 독자 앞에 데려다 놓습니다. 이 낯선 존재들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아픔을 호소하거나, 반대로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소설은 곧 타자를 배우는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타자를 배우는 일이 정체성을 확립하는 수단이기도 하니, 소설은 정체성의 교과서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2. 운수 좋은 날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가장 많이 자리 잡은 소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뭐, 수많은 목록이 나열될 것입니다만, 이 작품은 꼭 들어갈 겁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이 작품은 인력거꾼 김첨지의 하루를 관찰합니다. 김첨지는 서울의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손님을 태웁니다. 그는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을 계속 늦추죠. 아픈 아내가 집에 누워 설렁탕 한 그릇이 먹고 싶다고 했는데 말이죠. 설렁탕 한 그릇을 넉넉히 살 돈을 벌고도 김첨지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손님을 실어 나릅니다. 오늘같이 운수가 좋은 날, 김첨지는 더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합니다. 인력거꾼의 하루하루의 삶이란 그런 것입니다. 어떤 날은 공을 치다가도 어떤 날을 바가지를 씌워도 군소리 없는 손님이 등장하기 마련이죠. 그러나, 김첨지가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그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만은 아니죠. 우리는 집에 돌아가기를 두려워하는 김첨지의 심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빈 인력거를 털털거리며 이 우중에 돌아갈 일이 꿈 밖이었다. 노동으로 하여 흐른 땀이 식어지자 굶주린 창자에서, 물 흐르는 옷에서 어슬어슬 한기가 솟아나기 비롯하매 일 원 오십 전이란 돈이 얼마나 괜찮고 괴로운 것인 줄 절절히 느끼었다. 정거장을 떠나는 그의 발길은 힘 하나 없었다. 온몸이 옹송그려지며 당장 그 자리에 엎어져 못 일어날 것 같았다.”     

 집에는 병이 깊어 가망 없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안락과 휴식일 수가 없습니다. 김첨지는 끊임없이 일하고, 절망하고, 다시 일합니다. 그의 절망이 비단 아픈 아내 때문만은 아니지요. 김첨지의 삶이 이리 망가진 것은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노동은 대가를 요구하지만, 대개의 대가란 것이 그의 노동을 온전히 보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김첨지는 생각하고 느낍니다. ‘일원 오십 전이란 돈이 얼마나 괜찮고 괴로운 것’인지 말이죠.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역사적인 장면이 되었습니다. 소설의 제목과 정반대 되는 결말. 이 형식적 특징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중요 단서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이 소설의 결말에만 집중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이 소설을 왜 읽어요?라는 질문에 ‘제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요’라고 답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이건 잘못일까요? 잘못 배우고 가르치는 걸까요?     

  소설을 감상하기 위한 기초적인 길잡이가 있습니다. 소설은 작가가 곳곳에 숨겨놓은 보물을 찾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보물지도 없이 맨손으로 보물을 찾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입니까? 우리 문학 교과서는 분명 보물지도입니다. 그런데 이 보물지도는 모든 보물의 위치를 다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보물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는 일종의 게임 공략집 같은 겁니다. 아무리 매뉴얼을 달달 외운다 해도 직접 경험하고 발견하고 새로 개발하지 않으면 같은 자리를 뱅뱅 맴돌 수밖에 없어요. 최종 보스만을 향해 돌진하다간 숨겨진 퀘스트를 놓치고 마는 그런 공략집이요. 그러니 우리는 소설의 기술적 분석에서 잠시 벗어날 필요도 있습니다. 그래야 숨겨진 퀘스트와 희귀한 아이템 같은 소설의 색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니까요. 모두가 다 아는 ‘운수 좋은 날’의 아이러니 말고, 다른 희귀 아이템을 발견해 보자고요.      


3. 일하는 사람들, 소설 속으로      

  앞서 말했던 것처럼 소설 읽기는 타자 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 인물과 그 인물의 삶을 지켜보는 독자 사이에는 긴장감이 흐릅니다. 그 긴장감은 인물이 겪는 어떤 경험 때문에 생겨나고, 인물이 그 경험을 통해 변화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이 긴장감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기도 하고, 나의 삶과 비교해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1920년대 서울 변두리의 김첨지라는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를 다시 소개합니다. 

  우리는 그의 삶의 총체적 이력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의 삶만을 알 수 있을 뿐이죠. 그의 현재 삶은 괴로워 보입니다. 인력거꾼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큰 돈벌이가 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의 벌이가 형편없기 때문이었을까요? 그의 아내는 지금 매우 아픕니다. 그에게는 노동의 보람도 가족에 대한 따스한 애정 표현도 없어 보입니다. 오로지 삶의 고단함만 가득합니다.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이런 사람 한 명쯤 없을까요? 소설은 이런 사람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가 겪은 하루, 그가 지내는 하루. 이 하루를 우리가 함께 지내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소설의 이론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 보통 독자들에게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슬픔을 공감이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실패하거나 고통을 받는 인물들에 대해서 공감하는 일. 다시 말해 소설을 읽는 일은 누군가의 삶에 공감하는 일이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무래도 소설을 읽고 생각하는 일은 감정의 문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감정의 문제.         

 

4. ‘일’을 어디에서 배워야 하나     

  소설의 형식이 아니라 내용을 생각해야 한다면, 어떤 내용들이 고려되어야 할까요?

  우리의 교육에서 오랫동안 무시되어 왔던 분야는 사실 노동 분야입니다. 노동의 현실과 노동의 양상은 우리 교육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죠. 서구에서는 노사 협상 등 기본적인 노동자의 권리와 살에 대해 공부한다죠? 

 우리의 교육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을 ‘문학’에서 불러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우선 문학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을 오래 생각해 봅시다. 다시 “운수 좋은 날”로 돌아갑니다. ‘운수 좋은 날“에 등장하는 김첨지의 노동만 살펴봅시다. 김첨지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면 김첨지를 통해 우리는 인력거꾼의 삶과 처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력거꾼들이 겪는 삶의 애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대략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김첨지가 겪는 하루의 노동을 통해 노동이란 무엇인지를 이야기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혹은, 그들이 겪는 감정적인 고통에 대해 이야기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과도한 노동과 그에 대한 적은 보상은 어떤가요? 소설 속의 노동은 의외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줍니다. 



이 글을 이렇게 마무리 한다. 다른 쓰임이 생기면 조금 더 마무리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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