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먹고 시작한 하루
예술을 만나기로 마음먹고 시작하는 하루가 있다. 괜히 옷차림도 새로 시도해보는 옷을 입고 나간다. 내 취향과 감각에 맡기는 하루, 그리고 만난 아름다움들.
예상치 못하고 지나치다 뒤돌아 봤을 때 펼쳐지는 장면에 감동하는 순간이 있다. 찰나가 소중하다는 건 이럴 때 쓸 수 있을까. 이 날씨와 이 시간, 이 여유 앞에 인공 조형물과 자연이 어우러져야 만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날실과 씨실이 교차하는 순간.
같은 장소에 대해 친구는 말했다. "예술 관련된 게 별로 없어." 기대를 크게 하지 않고 찾아간 곳에서 새로움을 만났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공간. 디자인이란 뭘까 싱가포르에서 생각해보게 만드는 공간.
싱가포르 공공건물들은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사시사철 여름인 나라는 태양열을 소중한 자원 삼아 공간에 햇빛을 드리운다. 자연의 빛만이 형성할 수 있는 이 에너지와 분위기를 건축물의 요소 중 가장 좋아한다. 자유롭고 감미롭다.
Evoking emotions through light and creating unique shadows
that turns interiors into a different place,
light is then trascended into art.
나에게 예술은 작은 순간이다. 아름다움의 양보다는 단 하나의 아름다움이 주는 울림이 그날의 감동을 좌우한다.
예술은 꽤나 고도화된 인지 작용이다. 분명 평일에도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예술이 있었겠지만 너무 바쁜 나머지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친다. 그러나 주말, 알람 없이 자연스럽게 일어나 해야 하는 의무 없이 하루를 갖게 되고, 나의 감정과 욕구에 따라 움직이며 "오늘은 아름다운 걸 찾아가야지" 하고 마음먹자 내 눈과 귀, 머리는 꼬리를 물고 예술을 인지한다. 눈길이 가 머물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위로 올라가서 쳐다보고, 부지런히 예술을 향유하겠다는 목적 아래 몸을 움직인다. 예술을 감상한다는 건 내 무거운 몸을 너무나 가볍게 움직이는 고도화된 인지 행동이자, 꽤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고차원적 사고 작용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쉽게 나를 움직이는 걸까.
심리학 수업에서 배운 내용이 떠올랐다. 예술은 인간의 뇌에 보상을 준다. 뇌에는 아름다움을 볼 때 항상 반응하는 영역이 있다. 눈 뒤쪽에 위치한 내측 안와전두엽으로 감정을 판단하는 부분이자, 보상과 기쁨(쾌락)을 느끼는 영역이다. 예술의 아름다움이 인간에게 쾌락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이 영역은 동물 중 인간에게서 가장 발달한 영역이라고 한다. 내(나의 안와전두엽)가 유독 반응하는 아름다움이 나의 취향인 걸까. 흥미로운 건 새로운 예술 작품을 만나는 순간 느끼는 쾌락이 너무 강하다.
그럼 난 예술을 향유할 때 왜 이렇게 강하게 감정이 충만해지고 보상을 받는 걸까. 예술 작품을 통해 창작자라는 또 다른 인간의, 삶에 대한, 대상에 대한, 강한 애정이 느껴져서 아닐까 싶다. 창작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어 예술 작품이 나오기까지 고단한 과정을 어렴풋이 느낀다. 내 감각으로 받아들인 대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어 그림을 그려보다 몇 번이고 멈췄다. 시작도 어렵지만, 시작 후 원하는 무언가가 결과로 나오는 건 더 어려웠다. 노력과 에너지뿐만 아니라 시간도 참 많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예술가들이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표현한 대상을 향유하며 대리 만족과 감사, 경외를 느낀다.
왼편의 포스터에서 싱가포르가 1980년대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자신의 나라를 열대 자연과 독창적인 동서 문화가 어우러진 풍요로운 도시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 노력이 40년에 걸쳐 이어져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비즈니스와 관광 허브가 되었다.
오른편의 포스터에서는 자국민을 향한 선도적인 목소리가 지나치지 않게 전달된다. 귀여운 사자 캐릭터가 매너 있는 시민이 되자는 "National Courtesy Campaign"의 무게를 일상의 수준으로 낮춰 주고, "Make courtesy our way of life" 라며 외치는 웃는 노란 얼굴에 싫다며 인상 찌푸리기 어렵다. "Bee a team"이라는 언어유희와 꿀벌들은 너무 귀여워서 발걸음을 멈추고 카메라를 꺼내게 했다. 매우 간단한 디자인을 더해 효과를 극대화한 성공적인 광고이자 교육이다.
예술을 창작하고 싶은 감상자에게 위로가 되는 해석이 있다. "예술 작품에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의 몫'이 있고, 그것을 보는 '감상자의 몫'이 있다. 감상하는 사람이 없다면 예술은 완성되지 않는다." 예술을 소비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데, 감상자들이 예술가 못지않게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예술을 해석하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나만의 경험과 상상력을 동원해 예술 작품을 나의 삶과 연결하며 창의력을 발휘하는, 또 하나의 창작 과정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지금은 예술을 감상하고 2차 창작에 그치지만, 어느 날 꼭 시간과 끈기를 모아 1차 창작을 해보기로 다짐한다. 이러한 꿈이 있어 예술을 찾아가는 순간이 더 설렌다.
디자인센터와 국립박물관 사이의 Walteroo Street를 걷다 이끌리듯 들어간 건물에서 일상의 예술을 선물로 받았다. 1950-1980년대 싱가포르 문화생활의 모습이 건물 외벽에 아크릴 벽화로 그려져 있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학생, 스타워즈가 상영 중인 영화관과 영상 문화로 상징적인 건물, 수입 잡지와 생필품을 파는 가판대 할아버지까지. 이런 게 일상 속 예술이자 역사 공부가 아닐까. 나도 모르게 과거의 그들을 바라보고, 상상하고, 애정 어린 마음까지 갖는다. 예술의 힘이다. 순식간에 현대를 살아가는 나를 싱가포르의 과거 속으로 데려가고, 한국인인 내가 싱가포르 문화에 대해 사유하게 만들었다.
세상엔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데는 꼭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우리를 일상과 다른 세상으로 데리고 갑니다.
예술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
예술이 주는 울림. 나는 나의 영혼을 울리는 작품을 찾고 경험하려는 자세를 갖고 세상을 사는 사람이구나.
예술을 만나기로 마음먹고 시작하는 하루를 조금 더 늘려보기로 한다. 의식적으로 바쁜 일상을 조금 줄이고, 적극적으로 세상을 향유하는 일상을 늘려 보기로 마음먹은, 아름다운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