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지능의 승화
어제 오랜만에 싱가포르 국립미술관에 갔고, 놀라운 예술 경험을 했다.
6개의 전시 공간이 각각 6인의 신진 싱가포르 예술가의 그림으로 구성됐다. 이들의 작품을 보며 들었던 경이로운 감정과 생각을 가장 좋았던 작품들과 함께 정리해본다. (30년 후에 다시 펼쳐보고 싶은 글이다.)
싱가포르 예술의 새로움은 어떤 걸까. 전시의 제목이 흥미로웠다. 1965년 이후의 싱가포르는 한창 산업화가 진행 중이었다. 이때 활동한 예술가들의 그림이라니. 이들이 어떤 삶의 경험을 녹여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발견한 새로움은 자연, 역사, 이국 문화, 전통 유산의 응축이었다. 그리고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움이 나의 환경, 역사, 이국 문화 경험, 한국이라는 유산의 응축이라는 걸 깨달았다.
가장 좋아한 작품이다. 이 그림에 싱가포르의 색이 들어있다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빨강, 노랑, 초록, 파랑 - 뜨거운 태양과 새초록 나무, 빨간 싱가포르 섬의 상징색과 파란 바다까지 싱가포르의 자연환경이 색으로 강하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도 원색을 사랑하니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에너지가 참 좋았다.
그리고 싱가포르라는 도시의 모습이 보인다. 이 작품의 제목은 'Urban renewal'. 화가는 도시 설계와 재생이 일어나는 1970년대의 싱가포르의 모습을 콜라주 기법과 유사한 구성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색과 요소를 담아 표현했다. 질서를 잡아가면서도 참 역동적인 사회의 모습이 느껴지지 않는가.
내가 애정 하는 대상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나의 색과 구성 요소를 통해 그림으로 표현해보고 싶어 졌다.
두 번째 전시 공간에 들어갔을 때 '어라,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화가의 그림에는 '에너지'라는 단어가 유독 제목에 많이 적혀 있었다. 말레이 인종의 화가는 말레이시안 무술을 연마하고, 신비주의 이슬람 종파인 Sufism의 에너지를 그림에 투영했다. 물이라는 보편적인 자연물의 에너지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신선했다.
나는 물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볼 수 있을까. 어떤 색과 도형, 구도로 에너지를 표현해볼 수 있을지 이 주제에 대해 더 많은 그림이 보고 싶어 졌다.
이들이 싱가포르의 미술을 확장해가는 과정에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바로 대부분이 해외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었다. 해외를 여행하며 좋아하는 것을 찾고, 삶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넓힌 예술가였다. 그리고 싱가포르로 돌아와 여러 선택지 속에서 싱가포르와 이국, 역사와 현대를 연결하며 자신만의 예술을 창조해냈다.
나는 화가가 여행지에서 그린 그림을 유독 좋아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새로운 나라에 찾아가며 느끼는 설렘과 새로운 풍경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이 화가의 그림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스위스 여행에서 좋아하는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의 스위스 리기산을 그린 풍경화를 볼 때 이 외국 화가가 이 곳에서 얼마나 행복했을지, 예술혼이 타올랐을지 상상되며 나까지 행복해졌다.
이 화가는 인도네시아 문화유산 바틱을 컴퓨터 모던 아트, 아크릴 화로 재해석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었다. 인간은 팬심이라는 강력한 선호가 있다. 사람마다 유독 끌리는 어떤 사람, 어떤 연예인, 어떤 사물, 어떤 대상이 있곤 한다.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비논리적인 강한 선호다. 그런 대상이나 유산이 생긴다면 그걸 꾸준히 반영한 그림이 그 사람에게는 바라만 봐도 좋은 그림이자 특별한 그림이 아닐까. 그 화가만의 새로운 화풍이 아닐까. 가장 좋아하는 화가, 샤갈의 염소와 바이올린이 생각났다.
유독 여행과 이국 문화 경험을 좋아한다. 인생 가치는 '다양성', 굳이 외국인으로 싱가포르에서 살고 있다. 이 환경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힘을 느낀다.
일에서도 일상에서도 문화적 지능이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미 교환 학생, 해외 출장, 외국인 친구들과의 교류, 여행 등 나도 모르게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삶의 경험에서 높여둔 지능이다. 지능은 고도화되면 창의성(Creativity)으로 발현된다. 새로운 이론, 새로운 발명품, 새로운 예술이 세상에 나온다. 굳이 새로움을 의도하지 않더라도 고도화된 지능이 세상을 해석하며 내놓는 산출물 자체가 경이롭게 받아들여진다.
We want to stand at the intersection of
technology and humanities
스티브 잡스의 말이 떠올랐다. 테크 업계에서 일하며 주말이면 인문학을 찾는 내 인생도 점차 고유해지고 있는데, 내가 만난 삶의 경험과 느낌을 나만의 방식으로 승화한다면 그게 새로운 예술이 되지 않을까.
이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 나온 마지막 화가의 공간은 들어가자마자 팔이 떨렸다. 너무 좋아서. 이 마지막 작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이런 생각이 마지막 전시 직전에 들도록 의도한 걸까. 큐레이터를 만나면 말해주고 싶었다. 맞다면 이 전시는 성공했다고.
Lin Hsin Hsin - 작가는 IT 업계에서 일하며 새로운 기술에 대한 관심과 활용 능력을 그림, 시, 작곡에 활용했다. 50여 년간 다양한 미디어에서 커리어를 개발하며 동시에 미디어 아트를 창조해낸 것이다. 심지어 1994년에는 싱가포르 첫 가상 박물관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아, 이거다. 내가 살고 싶은 게 이런 삶이다. 마지막 전시관은 사진을 허용하지 않아서 좋아하는 그림을 담을 순 없었지만, 결론을 내주었다.
This exhibition made me want to find
my own drawing style and color of life
올해부터 나만의 그림체를 만들어가기 위해 예술을 더 적극적으로 찾아가고, 소비하고, 모방하고, 재해석하며 꾸준히 그림을 그려 보려 한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10년, 20년, 50년이 넘게 꾸준히 그릴 수 있다. 꾸준히 미술관에 가서 새로운 전시를 볼 거니까 앞으로 점점 더 다채로워지고, 더 많은 모방과 묘사 속에서 깊어지지 않을까.
그리고 훗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화풍의 화가 6인의 전시를 보고 감탄했고,
나도 이들이 될 수 있다고 깨달았다.
나는 이 전시에서 창의력을 느꼈다.
그리고 오늘 테니스를 치며 그리고 싶은 장면을 보았다. 하얀 벽, 황토색 바닥, 초록 코트, 하얀 경계선으로 구성된 테니스 코트에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 열심히 가르쳐주는 코치, 뜨거운 햇빛과 하늘이 어루어진다. 슬라이스를 설명하는 코치의 움직임을 보자 이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과 공간을 포착해 나의 그림체로 표현해내기. 점점 더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