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보영 Sep 16. 2020

귀찮음이라는 소금

소설 쓰기에 관하여

귀찮음이라는 소금



오랜만에 일기를.. 써볼까..     


며칠 전에 자동차 극장에 갔다. 영화 시작 오 분 전인데, 극장 입구에 자동차가 줄줄이 서 있었다. 알고 보니, 보려던 영화는 일찌감치 매진되었고, 우리가 선 줄은 한 시간 뒤에 시작하는 영화 예매 줄이었다. 다시 차를 빼기도 귀찮고 해서 그냥 보기로 했다. 차에 내장된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면 영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 광고가 나올 때 소리를 끌 수 있어서 좋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달리 취할 방법이 없었다. 자동차 극장의 최대 난점은 이탈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자동차를 버리고 튈 순 있어도, 사방이 자동차로 막혀 있어서 도중에 나갈 수 없다. 그런데 나가고 싶었다. 나는 갑자기 팝콘을 들고 밖으로 나가 프로젝터 앞을 얼쩡거리는 것으로 영화에 출연하고 싶었다.... 그것만이 영화를 재미있게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이따금 영화관에서 이런 상상을 하곤 하는데.. 가령,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뒤늦게 들어온 관객의 그림자가 스크린에 비칠 때, 그 사람이 쭉 영화에 남아줬으면 좋겠다고. 스크린에 비친 그림자가 절묘하게 화면의 중요한 부분을 검정 구멍으로 만들어 버릴 때 이상한 쾌감이 있다. 그건 감독이 계산에 넣지 않았을 요소인데 영화의 일부가 되는 점이 즐겁다. 그런데 만일 감독의 의도였다면..? 팝콘을 들고, 허리를 굽힌 채 두리번거리며 자기 자리를 찾는 관객의 그림자가 알고 보니 실제로 영화의 한 장면이라면? 그 영상이 화면 밖으로 사라지지 않고 계속 거기 있다면? 관객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그림자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신경질을 내고, 울고, 그런데 어두워서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고, 그러나 실제로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없으므로 만날 수 없다. 결국 감독의 의도는 영화 관람에 방해를 받는 상황을 통해 실제로 영화를 보게 하는 것이었고, 누군가는 이 영화를 ‘영화 방해하기 영화’라고 이름할 수도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이 영화의 주제가 ‘자기 자리 찾기에 실패한 인간 보여주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장담컨대, 실제로 그딴 영화를 만들거나 관람하는 것보다 그런 영화가 있다고 잠깐 상상해보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그것 자체는 노잼이지만 그것을 그려보는 것이 더 재미있는 건 아이러니하다. 실제보다 실제에 관한 생각이 더 재미있을 때 말이다.     


이와 유사하게 (혹은 유사하지 않게) 이따금 줄거리가 작품보다 재미있는 현상을 목도할 때가 있다. 내 친구 뇌이쉬르마른이 말하길, 학창 시절에는 종종 대시청자 (대리 시청자)를 자처하는 부모들이 있었는데, 공부하느라 바빠서 엄마가 드라마를 대신 보고 줄거리를 이야기해 줬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드라마를 본 척하면서 친구들의 대화에 낄 수 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조그맣게 놀랄 것이다. 친구들이 봤다는 드라마가 엄마가 요약해 준 이야기와 전혀 다른 작품 같아서. 학창 시절에 엄마도 내게 드라마 줄거리를 들려주곤 했다.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엄마가 들려주는 줄거리가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어서였다. 실제로 드라마를 보면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원작보다 작품의 줄거리가 더 재미있다면 엄마는 일종의.. 줄거리 작가인 건가?     


그러면 나는 드라마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줄거리를 사랑한 건지, 그렇다면 나는 드라마를 사랑한 게 아니라 가성비를 사랑한 건지.     


국어 문제집 해설을 보면 작품 요약이 딸려 있는데 줄거리를 쓴 사람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작품보다 줄거리가 더 나을 수 있고, 줄거리도 쓴 사람에 따라 다르다면.... 줄거리라는 장르가 있어도 웃기겠다. 가끔 어떤 작품의 줄거리가 떠올라서 줄거리를 공책에 쓰고 나면 할 게 없다. 우선, 그 줄거리를 작품으로 풀어쓰는 건 시간과 돈과 체력이 너무 많이 든다. 그렇다면 나는 소설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소설의 줄거리를 사랑하는 거고, 소설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가성비를 사랑하는... 건가? 게다가 줄거리를 쓰면.. 일단 뭔가... 뭔가... 다 된 느낌이다. 더 이상 이걸로 뭘 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그렇게 자족하고 끝낸다. 그래서 소설을 못 쓴다...     


무엇보다 내가 쓴 줄거리를 펼쳐서 작품으로 만들면 핵노잼일 거라는 확신이 있다.. 줄거리가 작품보다 재미있을 거라는 불안 때문에 소설로 쓰질 못하겠다. 대신 어떤 시들을, 그리고 내 시 중에서 일부를 ‘줄거리 시’라고 이름할 때가 있다. 줄거리를 그냥 시라고 명명하고 조금 다듬으면, 압축적인 초단편줄거리시가 되기도 한다.     


나는 또 다른 이유를 대며 소설 쓰기를 피한 적이 있다. 문학회 시절에, 친구들로부터 소설을 쓰면 잘 쓸 것 같다는 말을 간헐적으로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이 말을 누리기 위해 소설을 안 썼다.. 아니, 나는 친구들이 그런 생각을 품은 것만으로 친구들은 나의 (안 쓰인) 소설을 읽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은 어떤 방식으로 나의 소설을 읽은 거라고. 나는 상상적으로 창작을 했고 친구들은 상상적으로 독서한 거라고.. 나는 이것도 일종의 창작과 독서라고 생각한다(고 얘기 하면 혼날 거 같다).     


특히, 소설을 투고할 때, 줄거리 요약본을 써야 할 때가 있는데 이게 무서워서 투고를 못 하겠다.... 소설을 다 썼는데 줄거리까지 쓰라고 하다니. 작품을 두 편이나 내야 하는 거잖아! 소설 한 편과 줄거리라는 작품 한 편. 제길! 이건 작품은 본질적으로 요약이 불가하다는 얘기도 아니고, 요약하는 게 귀찮다는 얘기도 아니다.. 요약이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품과 별개로 줄거리를 지어내야, 줄거리를 창작해야 하기 때문에 너무나 수고스럽다. 언젠가... 작품 요약본 없이 투고하리라....  

    

사실 이 일기는 토리야마 아키라가 드레곤볼에서 시작했다. 처음에 초사이언맨의 머리색은 하얀색이었다. 그 이유는 작가가 머리를 색칠하기 귀찮아서였다. 내 생각 아니 내 합리화에 따르면 귀찮음은 작품의 좋은 밑거름이 될 수 있다. 귀찮음은 귀한 소금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