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세 편도 못 썼지만, 어쩌면 다음 시집은 산문시집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행갈이에 대한 막연한 귀찮음. 내가 행갈이를 쓰는 경우는 ‘시를 너무 안 쓰면서 시를 쓰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불안이나 죄책감이 들 때이다. 시를 제외한 어떤 텍스트도 행갈이가 내적 형식이 아닌 만큼, 행갈이와 연갈이는 그것이 ‘시’임을 가장 손쉽고, 강력하게 표시하는 기능을 하며, 따라서 행갈이는 시를 다른 텍스트와 혹은 다른 장르와 구별 짓는 가장 일차원적인 울타리이다. 그만큼 그것은 나에게 자연발생적이거나 필연적인 형식은 아니고, 항상 일정량의 ‘의도’를 포함해야만 나오는 형식이다. 나는 가끔 어떤 발화를 쏟아지는 대로 둘 때가 있는데, 그때는 행갈이나 연갈이를 신경 쓸 겨를 없이 그저 뱉어내야만 하고, 행갈이는 나에게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그렇게 해서 쓰인 텍스트가 너무 시스럽지 않다고 느껴지고, 호흡이 장황하여 행갈이와 연갈이를 부여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산문으로 쓰인 텍스트에 시의 형태를 부여하고자, 그것에 행갈이와 연갈이를 사후적으로 시도해보지만, 이미 굳은 시멘트를 주무르는 것처럼 번번이 실패하곤 만다. 행갈이를 하려면 애초에 쓸 때부터 행갈이를 해야 자연스러운 호흡이 나오는가.
그래서 내게 행갈이는 시를 쓴다는 의식 아래서만 나오는데, 그것은 나에게 행갈이와 연갈이가 아직 습관이 될 만큼 가깝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행갈이와 연갈이 훈련을 게을리했기 때문인지도. 가끔은 시를 쓰겠다는 의도 없이 일기를 쓰다가 얼렁뚱땅 시를 쓰기도 한다. 가령, 오늘 꾼 꿈 이야기를 일기장에 기록하면서 시가 나오기도. 그런데 애초에 일기를 쓴 것이어서 행갈이는 되어 있지 않다. 일기를 쓰면서 행갈이를 하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다 쓰고 나니 왠지 시인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쓰는 대부분의 시가 일기에서 출발한다면, 처음부터 행갈이가 된 일기를 쓰는 방법이 있을 수도. 그렇다면 그것은 ‘일기 시’가 되나. 아니면 ‘시 일기’인가. 사실 행갈이 일기를 쓰면 그것만의 문체나 색깔, 호흡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몇 년 전에도 생각한 적이 있다. 오빠가 입대했을 때 인터넷 편지를 썼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참에 행갈이 연습이나 하자는 생각이었다.. 내용은 편지지만 형식은 시인 편지 시. 아니, 행갈이 연습 편지 시. 그곳에서는 인터넷 편지를 출력해 훈련병들에게 나눠주었다는데, 산문으로 쓰면 한 장도 안 될 것을 내가 두세 단어씩 행갈이를 하는 바람에 매번 열 장은 출력해야 했고, 그래서 상병인지 하여간 누군가 오빠에게 이건 명백한 종이 낭비라며, 오빠더러 보내는 사람에게 줄 띠어서 쓰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오빠는 ‘죄송...제 동생이 시인이라서..’라는 말은 안 했다고 함. 그 이후로 나는 행갈이는 사회적 낭비구나....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행갈이가 잘 될 때는 또 엄청난 쾌감이 있다. 어떤 말은 행갈이와 연갈이를 통해서 그 의미와 문체가 더 크고 강렬하게 전달되기도 한다. 행갈이가 잘 될 때의 나의 기분은, 쿠키런에서 쿠키가 허공에서 점프를 했는데, 그 허공을 발판 삼아 또 한 번 점프하는, 이중 허공 점프로 생명과 곰 젤리를 먹어 생명력이 늘어날 때와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