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선집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카프카는 이미 건강이 많이 악화되어 있던 1922년 11월 말경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이 죽으면,「선고」,「화부」,「변신」,「유형지에서」, 단편 모음집『어느 단식 광대』에 실린 작품 등 이미 발표한 것은 남겨 두어도 좋되, 마무리할 수 없었던 나머지 작품들은 모두 불태워 없애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 유언을 성실하게 집행하지 않은 바로 그 브로트 덕분에, 소위 ‘고독의 삼부작’으로 불리는 세 편의 미완성 장편소설(『실종자』,『소송』,『성城』)을 비롯한 카프카의 많은 작품이 독자들에게 소개될 수 있었다.’ (<카프카 선집>, 현대문학, 2020, p.797)
여기서 의문. 왜 많은 작가들은 유언으로 자신의 작품을 불태워달라고 할까, 손수 불태우지 않고. 악화된 건강 때문에 타인에게 부탁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쳐도, 정말 그 작품들을 없애고 싶었다면 (꽤 중요한 문제인데!) 자신이 보는 앞에서 죽기 전에 ‘지금 당장’ 불태워달라고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들은 왜 꼭 자신이 죽은 이후에 작품을 불태우길 바랐을까? 작품보다 일찍 죽고 싶어서?
이따금 내가 죽은 이후에 남겨질 나의 작품에 대해 생각한다. 많은 작품들이 유언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듯, 유언은 별로 믿을 것이 못 된다. 카프카가 유언을 맡겼다는 친구 막스 브로트는 왜 유언을 충실히 집행하지 않았을까? 그래, 친구가 문제다. 인력거, 호저, 흡연구역....나의 친구들을 떠올려본다. 친구들이 과연 내 작품을 불태울까? 믿을 수 없다.. 인력거는 내 작품을 너무 은밀한 곳에 보관해두었다가 잃어버릴 것 같다. (그리고 먼 훗날 누군가 찾아낼 것이다) 호저는 내가 죽자마자 작품을 블로그에 올려 세상에 널리 알릴 것 같다. 마지막으로 흡연구역은...나보다 오래 살 것 같지 않다. 따라서 구조상 유언을 들어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 불태우고 싶은 작품은 죽기 전에 내가 직접 죽이리라....
그러나 정말 불태우고 싶은 작품을 아직 쓰지 못했으므로 그 작품을 쓰기 위해 오래 살아야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