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의 혼미 - 그라쿠스 형제와 가이우스 마리우스
제3권 『승자의 혼미』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권한이 막강해진 원로원 공화정 체제에 대항하여 자작농 중산층을 살리기 위한 개혁을 펼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그라쿠스 형제와 가이우스 마리우스, 킨나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이루어진 술라의 독재정치, 드루수스의 '시민권 개혁법'과 이로 인해 촉발된 '동맹시 전쟁', 스파르타쿠스 노예 반란, 에스파냐, 지중해 해적과 동방을 모두 평정하고 '마그누스' 호칭을 얻게 된 폼페이우스 등 로마 사회 격변기의 혼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라쿠스 형제의 시대
기원전 133년~기원전 120년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라쿠스 형제
서양에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이 있다. 아쉬울 것 없는 혜택받은 환경에서 태어났음을 뜻하는 표현이다. 역사상 ‘그라쿠스 형제’로 유명한 티베리우스(당시 로마에서는 첫째에게 이 이름을 붙였다)와 가이우스야말로 기원전 2세기 후반의 로마에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 표현이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집안
외조부는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이고, 조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도 노예 군단을 이끌고 한니발과 맞서 싸우다가 40대의 젊은 나이에 전사한 용장이다. 아버지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역시 기원전 187년, 호민관으로 선출되어 이른바 ‘스키피오 재판’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변호하였다.
스키피오는 이때 보여준 그라쿠스의 용기있는 행동을 잊지 않았다. 그는 그라쿠스에게 딸 코르넬리아를 시집보내어 은혜에 보답했다(코르넬리아는 나이가 어려 약속 후 결혼까지는 12년이 걸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그라쿠스 형제에게 명장 스키피오의 피가 흐르고 있는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그라쿠스 가문이 속한 셈프로니우스 일족은 원래 평민 출신이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에도 평민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집정관을 배출한 셈프로니우스 집안은 로마 공화정의 위정자 계급인 귀족, 즉 엘리트로 대우받게 되었다. 또한 셈프라니우스 일족은 수많은 ‘클리엔테스’를 거느린 ‘파트로네스’이기도 하였다.
기원전 179년, 41세의 그라쿠스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속주 에스파냐에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로마의 통치에 반기를 든 에스파냐 원주민에게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2년 뒤인 기원전 177년, 그라쿠스는 로마의 최고 관직인 집정관에 선출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2, 3년 뒤에 코르넬리아와 결혼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라쿠스가 죽은 것은 기원전 153년께로 여겨진다. 아내 코르넬리아와의 사이에 자식을 12명이나 낳았지만, 유아 사망률이 높은 시대였다.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라는 두 아들과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시집간 딸 하나뿐이었다. 티베리우스는 10세 때 아버지를 여읜 셈이다.
코르넬리아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지만, 이집트 프톨레마우스왕 등 모든 청혼을 물리쳤다. 두 아들을 ‘내가 가진 두 개의 보석’이라고 부르며 자녀의 양육에 전념하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녀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인 아우렐리아와 더불어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로마 여인의 귀감으로 칭송받게 된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등장
스무 살 되던 해에 티베리우스는 사제로 선발되었다. 그는 당시 로마에서 가장 선망받는 신랑감이었던 것 같다. 그런 티베리우스를 원로원 의장격인 ‘제일인자’(프린키페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눈여겨보았다. 티베리우스와 풀케르의 딸 클라우디아의 결혼은 그로부터 2, 3년 뒤에 이루어진 것 같다.
기원전 137년, 26세가 된 티베리우스는 에스파냐에 파견하기로 결정된 군단의 회계감사관(콰이스토르)으로 선임되었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에스파냐로 가는 길에 토스카나 지방을 지나게 되었는데, 넓은 토지에 자작농들은 보이지 않고 온통 외국에서 끌려온 노예들만이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티베리우스가 종군한 군단이 에스파냐에 파견된 것은 40년 만에 일어난 반란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로마군은 반란을 진압하기는커녕 패주하다가 적에게 포위되어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빼앗기고 간신히 휴전을 얻어내어 철수하는 불명예스러운 꼴을 당하였다. 기원전 2세기 후반의 로마군 장병들의 질적 저하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현실도 젊은 티베리우스에게는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티베리우스가 귀국한 해인 기원전 135년에는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노예 반란까지 일어났다. 게다가 반란이 일어난 시칠리아에 파견된 정규 군단은 반란을 진압하기는커녕 노예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무언가가 잘못되기 시작했다. 지중해 세계의 지배자가 된 로마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로마 사회 구조의 변화
로마인들이 ‘한니발 전쟁’이라고 부른 제2차 포에니 전쟁은 17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동안 집정관 자격으로 최전선에 나가 싸운 사람은 25명이고 그 중 무려 8명이 전사했다. 시민병의 희생도 엄청났다. 이렇게 로마는 사회의 상층부에서 맨 아래까지 일치단결하여 한니발 전쟁을 이겨냈다.
그런데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인 기원전 200년을 경계로 하여 그것이 달라졌다. 기원전 200년부터 카르타고가 멸망한 해인 기원전 146년까지 54년 동안의 집정관 수는 108명이 된다. 그 중 100명은 코르넬리우스와 발레리우스와 셈프로니우스 등 28개 일족에 집중되어 있다. 같은 로마 시민이라도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점점 고정되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제2차 포에니 전쟁이라는 비상사태로 인해, 원래는 권고할 권한밖에 갖지 않은 원로원에 권력이 집중되어갔다. 그것도 로마의 패권이 지중해 세계 전역으로 확대되는 기간과 겹치면서 외교권, 인사권, 재정권, 사법권, 군사권 등 모든 권한을 원로원이 갖게 된 것이다. 로마 체제는 포에니 전쟁 후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은 상태가 되었다.
위에 있는 첫 번째 표는 로마 계급의 분류 기준 액수가 크게 변하고 제1계급과 무산자계급의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진 상황을 보여주고 있으며, 두 번째 표는 병역 해당자로 간주되고 있던 로마 시민의 수인데, 17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로서 병역 형태의 직접세를 낼 수 있는 재산 소유자만 계산한 것이다.
대규모 전쟁도 없는 시기인데다 재산의 하한선을 내렸는데도 시민 수가 줄어든 것은, 가장이 종군하고 있는 동안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이 생계를 꾸려갈 수 있을 만한 재산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은 무산자가 그만큼 늘어났다는 뜻이다.
로마 농업 구조의 변화
본래 로마 군사력은 자작농이라는 중산층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농민들이 병역에 종사한 뒤 귀향해 보면, 그가 없는 동안 가족 노동으로 얻은 수확물은 노예를 부리는 대규모 농장의 수확물에 밀려 팔리지 않거나 가격이 폭락하여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곤경을 타개하려고 빚을 지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로마 농민들의 근로 의욕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로마 농업의 구조 변화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인 기원전 240년부터 속주로 편입된 시칠리아에서 직접세로 들어오는 다량의 밀이 이미 소규모 자작농의 밀 생산에 타격을 주고 있었다. 가격 경쟁력에서 패배한 밀 대신, 로마 농민들은 목축업과 올리브유 및 포도주 생산에 주력하게 된다.
여기에 2세기 중엽부터 새로운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로마는 기원전 167년에는 전비를 위해 부과했던 전시국채 형태의 직접세를 완전히 폐지했다. 이 직접세는 재산 정도에 따라 부과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폐지됨으로써 이익을 얻는 것은 부유층이다. ‘돈이 남아도는 상태’의 첫 번째 원인은 여기서 생겨났다.
기사 계급의 대두
두 번째 원인은 로마의 패권 확대에 자극을 받은, 즉 시장 확대에 자극을 받은 ‘기사계급’의 대두였다. 라틴어의 ‘에퀴타스’를 기사계급으로 직역하면 기병을 말하나 보다 생각하기 쉽지만, 의역하면 ‘경제인’이다. 로마 군단에 기병대를 제공할 의무를 가진, 제1계급에 속할 정도의 자산가라는 뜻이다.
이들은 집정관을 지낸 조상이 없기 때문에 국정 참여라는 난관에 도전하기보다는 경제활동에 전념하는 길을 택했다. 원로원 계급은 ‘상업’에 종사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사계급의 활동 분야는 충분했다. 여기에 원로원 계급들도 해방노예를 통해 '장사'에 돈을 투자해 결국 부자들은 점점 더 부자가 되는 상황이 되었다.
재산이 필요 이상으로 늘어나면, 사람들은 대부분 투자를 생각하게 된다. 게다가 투자 대상으로는 토지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동서고금이 다를게 없다. 부동산을 갖지 않은 신분이라서 정치를 체념하고 경제를 선택한 '기사'들 역시 투자 대상으로는 토지가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이전에 이미, 패한 국가로부터 빼앗아 조성한 국유지를 임차할 수 있는 상한선을 500유겔룸(약 125헥타르)으로 규정한 법률을 가결시켰다. 하지만 원로원 의원들은 이 제한을 우회적으로 위반하면서 기원전 2세기 후반에는 임차지 제한법은 완전히 유명무실해져 있었다.
게다가 병역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 노예도 속주로부터 엄청나게 몰려 들어 귀족들은 대규모 농장을 경영할 수 있게 되었고, 대규모 자본이 투하됨에 따라 농장의 가격 경쟁력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돈이 귀족들에게 몰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자작농들이 부채 때문에 땅을 빼앗기거나 가격경쟁에 패하여 땅을 헐값으로 내놓은 결과, 실업자가 급증하게 되었다.
자작농들은 어쩔수 없이 부가 집중되는 수도 로마로 흘러들었다. 연구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이런 이농민이 로마 인구의 7퍼센트에 이르렀다니까, 엄청난 사회 문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들 실업자는 단순히 일자리를 잃었기 때문에 생활 수단을 잃은 자들이 아니라,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티베리우스 개혁의 시작
기원전 134년 여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임기가 시작되는 이듬해에야 30세가 되니까, 그 무렵에는 아직 29세였다. 하지만 특유의 조용하고 감정을 억제한 말투를 썼는데, 젊은 호민관의 연설은 로마 시민들의 가슴을 깊이 파고들었다.
“들짐승도 날짐승도 저마다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돌아가면 마음껏 쉴 수 있는 곳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로마 시민들에게는 햇볕과 공기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집도 없고 땅도 없이,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헤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 시민은 이제 승리자이고, 세계의 패권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로마 시민들은 이제 자기 것이라고는 흙 한 줌 갖고 있지 않습니다.”
호민관 임기는 12월 10일에 시작된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그보다 앞서 농지개혁 법안을 제출했다. 셈프로니우스 일족의 이름을 따서 ‘셈프로니우스 농지법’(렉스 아그라리아 셈프로니아)이라고 불리는 이 법은 국유지만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그 법안은 다음과 같은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임차할 수 있는 국유지의 상한선을 500유겔룸(125헥타르)으로 정한다. 이밖에 아들의 명의로 아들 한 명당 250유겔룸까지의 임차를 인정한다. 다만, 일가족 전체의 임차지가 1천 유겔룸을 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목축용 가축수도 600마리를 상한으로 한다.
2. 국유지 임차권은 상속할 수는 있지만 남에게 양도할 수는 없다.
3. 1천 유겔룸 이상의 토지를 임차하고 있는 자는 그것을 국가에 반환하고, 국가는 반환된 토지의 면적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한다. 그런 다음 국가는 상설 실무위원회를 설치하여 희망하는 농민에게 임차 농지를 재분배한다.
이 법안은 평등을 겨냥한 개혁안이 아니라 공정을 겨냥한 개혁안으로, 100년 전에 법제화되었다가 그 후 유명무실해진 것을 원상태로 돌려놓은 데 불과하다. 다만, 부유층이 친척이나 해방노예 명의로 땅을 마구 빌리는 상태를 바로잡으려는 의도는 확실히 드러나 있었다.
농민에서 무산자로 전락한 이들에게 농지라는 재산을 주어 자작농에 복귀시킴으로써 로마 시민층의 기반을 건전하게 하고, 실업자를 구제하는 동시에 사회 불안을 해소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농지를 분배하는 것만으로는 자작농이 농가로서 자립하도록 육성하는 데 성공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 호민관 티베리우스는 반환 토지에 대한 보상금 외에 이들 무산자에게 제공할 보조금도 국고에서 지불한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원로원의 방해
사정이 여기에 이르자, 보수파 원로원 의원들이 이번에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고 나섰다. 개인에 대한 보조금을 국고에서 지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이유였고, 그들이 정말로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은 드러내놓고 반대할 수 없는 부정 임차 농지의 반환이었다.
반대파는 또 다른 호민관 옥타비우스를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보수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호민관 네 명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그 법안은 민회에 제출할 수 없게 된다. 옥타비우스는 법으로 인정되어 있는 거부권(비토)을 행사하였다.
원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는 나이도 같고, 소년 시절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당당한 논쟁으로 옥타비우스를 설득하려 했다. 날마다 두 사람 사이에 불꽃 튀는 논쟁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옥타비우스의 입장은 반대파의 격려때문에 결국 바뀌지 않았다.
그라쿠스는 마침내 최후의 수단에 호소하기로 결심한다. 옥타비우스를 호민관에서 해임하는 로마 역사상 전례가 없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거부권을 행사할 사람이 없어진 뒤, 민회는 티베리우스의 농지법을 압도적인 다수로 가결했다. 부정 임차된 국유지를 환수하여 무산자에게 재분배하는 실무를 담당한 ‘3인 위원회’도 활동을 개시했다.
티베리우스의 죽음
때마침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3세가 죽으면서 그의 왕국을 로마에 유증했다. 티베리우스는 페르가몬 왕국의 영토에서 들어오는 조세를 영농 자금의 재원으로 삼자고 제안하였다. 속주에 관한 외교 문제는 본래 원로원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라서 티베리우스의 제안은 원로원의 권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아탈로스 3세의 유언에는 페르가몬 왕국을 로마 시민에게 남긴다고 적혀 있으므로 로마 시민의 재산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반드시 원로원이 결정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주장했다.
티베리우스의 제안은 귀족과 평민 모두 참석할 수 있는 민회가 아니라 평민만이 참석권을 가진 평민집회에서 가결되었고, 평민집회에서 의결된 사항은 그대로 법제화할 수 있다고 규정한 ‘호르텐시우스법’에 따라 정책으로 성립되었다.
30세의 호민관은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호민관에 재선되어 개혁을 계속 추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호민관의 연임을 금지한 법은 없었다. 호민관만은 국가의 공직이 아니라 평민층의 대표였기 때문이다. 반대파의 위기감은 더한층 높아졌다.
그런데 호민관 선거일에 티베리우스를 따르는 강경파와 반대파의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흥분한 반대파의 우두머리인 최고제사장 스키피오 나시카와 추종자들이 도망가는 티베리우스를 철봉으로 내리쳐 죽이는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티베리우스 외에 이날 철봉에 맞아 살해된 지지자 수는 무려 300명에 이르렀다.
원로원은 평민층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평민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던 스키피오 나시카를 오리엔트로 보냈다. 그 지방 속주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라는 구실을 붙였지만, 사실상의 해외 추방이었다. 또한 티베리우스의 농지법은 그대로 존속시키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강력한 의지를 가진 견인차가 없는 이상 농지법이나 실무위원회의 활동은 개점휴업 상태가 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등장
형 티베리우스가 30세에 원통하게 죽은 해에 에스파냐에 파견된 군단에 종군하느라 로마에 없었던 동생 가이우스는 아직 21세에 불과했다. 그 후 10년 동안,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공화정 로마의 예비 지도자들이 거치는 평범한 경력을 쌓는다.
기원전 124년 여름, 30세가 되기도 전에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다만 1등이 아니라 최하위로 당선된 것은 평민층이 국정 개혁의 필요성을 그다지 강하게 인식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2월 10일에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가이우스는 법안을 잇따라 제출했다.
가이우스의 개혁안
우선 형 티베리우스의 유작인 ‘농지법’의 재승인이다. 농지개혁의 실행기관인 ‘3인 위원회’도 되살린다. 그는 자작농 장려책만이 아니라 복지정책도 생각했다. ‘곡물법’이 그것이다. 국가가 일정량의 밀을 사들여, 그것을 시가보다 싼값으로 빈민들에게 공급하는 법안이다.
가이우스는 새로운 ‘병역법’을 제출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아무리 긴급한 사태가 발생할 때라도 17세 미만의 남자, 즉 미성년자를 징집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리고 군복무 중에 필요한 장비와 무기 및 식량 등의 물자는 모두 국가에서 부담하도록 했다.
실업자 대책이 자작농 장려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한 가이우스는 ‘공공사업법’을 제출했다. 가도나 다리, 상하수도, 항만 공사 같은 공공사업을 진흥함으로써 실업자 구제를 꾀하였다. 또한 그는 이 활발한 경제활동의 받침접시를 만드는 것도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경제적인 관점으로 '식민시'를 건설하는 ‘식민법’이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로마 사회를 덮친 경제 구조의 변화를 이용할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그 변화의 물결을 타려고 했다. 경제활동의 활성화로 경제력을 키움으로써 사회 불안의 원천인 실업자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가 당시 부상하고 있던 ‘기사계급’의 활용에도 눈길을 돌리는 것이 당연하다.
가이우스는 형 티베리우스가 말은 꺼냈지만 미처 법제화하지 못했던 생각을 좀더 급진적인 법안으로 바꾸어서 다시 제출했다. ‘배심원 개혁법’이 그것이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원로원 의원들이 배심원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 배심원단을 ‘기사계급’만으로 구성한다는 것이 가이우스의 개혁안이었다.
젊은 호민관은 선거제도를 개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1계급부터 투표를 시작하여 과반수에 이르면 투표를 끝내는 왕정 이래의 관례인 기존 선거방식에서는 중류와 하류의 시민들에게는 투표할 기회조차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가이우스는 민회에서도 평민집회에서도 제1계급부터 무산자 계급까지 전원이 동시에 투표를 시작하도록 선거제도를 개혁했다.
가이우스는 ‘시민권 개혁법안’도 제출했다. ‘라틴 시민’에게는 ‘로마 시민권’ 취득을 인정하고, ‘이탈리아인’에게는 ‘라틴 시민권’ 취득을 인정했다. 기득권자인 로마의 일반 시민, 그리고 ‘로마 연합’ 방식이 최선의 방위체제라고 확신하는 원로원이 이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턱이 없었다.
‘시민권 개혁법안’을 제외한 모든 법안이 가결되어 법률로 성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이우스는 기원전 123년 여름에 실시된 선거에서도 무난하게 재선되었다. 이때부터 원로원의 반(反)그라쿠스 운동은 가이우스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를 허물어뜨리는 데 집중되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원로원의 수법도 교묘했다.
가이우스의 3선 연임 실패
옛 카르타고 땅에 건설될 '유노 식민시'가 시작되기 전에 가이우스는 농지 분배와 공공시설 건설지를 결정하기 위해 직접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그가 로마를 비운 기간은 70일도 채 안 되었지만, 이 기간을 원로원은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함께 기원전 122년의 호민관에 선출된 사람 가운데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Marcus Livius Drusus)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 드루수스가 반(反)그라쿠스 운동에 앞장섰다. 물론 원로원의 배후 조종을 받은 소행이었다*. * 이 부분은 학계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는것 같다.
정책 입안권을 가진 호민관 지위에 선출되자, 드루수스는 차례로 법안을 제출했다. 모두 오히려 가이우스의 법안을 상회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실무위원회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그는 약자의 보호자일뿐만 아니라 청렴결백한 인물이라는 평판까지 얻었다.
나아가 그라쿠스의 정적들은 카르타고 식민시 현장에서 몇 가지 사고가 일어나자 이런 변고들이 모두 불길한 조짐이고, 저주받은 카르타고 땅에 도시를 세우면 로마인 자신이 저주를 받게 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시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결국 가이우스는 3선 연임에 실패했고, 그에 따라 그해 12월 9일로 임기가 끝나게 된 상황이 되자 가이우스는 초조하게 굴었다. 아니, 가이우스보다 그의 지지자들의 초조감이 훨씬 강했다. 게다가 민회 소집권을 가진 기원전 122년의 집정관에는 강경파인 오피미우스가 선출되어 있었다.
가이우스의 죽음
이듬해인 기원전 121년, 카르타고의 옛터에 건설할 식민시의 운명이 걸린 투표가 실시되던 날, 투표장인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안틸리우스라는 하급 관리가 내장을 담은 쟁반을 들고 군중 사이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바로 그때 변고가 일어났다.
가이우스를 지지하는 시민들을 헤치고 나가던 안틸리우스가 주먹을 휘두르면서 외쳤다. “나쁜 시민들아, 좋은 시민에게 길을 열라.” 하급 관리는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 밀랍 바른 목판에 글자를 새길 때 쓰는 송곳 철필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이 사태에 대해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 권고’(세나투스 콘술툼 울티눔), 의역하면 ‘비상사태 선언’을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공표하였다. 이 선언은 반역자에 대해 재판하지 않고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집정관에게 부여했다. 단순한 권고가 계엄령으로 바뀐 것이다.
원로원에 의해 폭도로 몰린 그라쿠스 지지파는 태도가 강경해졌다. 점점 더 흥분한 그들은 아벤티노 언덕에서 농성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자고 외쳤다. 가이우스에게는 동지들을 제어할 힘이 없었다.
아벤티노 언덕에 틀어박혀 저항한 그라쿠스파는 폭도 진압의 일념에 불타는 집정관과 그 추종자들의 공격 앞에 어이없을 만큼 간단히 무너졌다. 집정관 오피미우스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플라쿠스의 목을 가져온 자에게는 목과 같은 무게의 황금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무자비한 인간 사냥이 시작되었다.
가이우스는 노예 한 사람만을 데리고 도망갔는데 추적자들은 숲속에 널부러져 있는 시체 두 구를 발견했을 뿐이다. 가이우스를 마지막까지 따라간 노예의 이름은 필로크라테스라고 한다. 이름으로 보아 그리스인이 분명하다. 아마 노예가 주인을 찌르고, 그 칼로 자기도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평가
원로원은 기원전 121년에 가이우스가 죽은 뒤에는 복고-그들 자신의 말을 빌리면 ‘수복’(修復)-의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우선 카르타고의 옛터에 세울 예정이었던 ‘유노 식민시’ 건설 계획은 백지화되었다. 그라쿠스 형제가 추진한 개혁의 핵심이라고 해야 할 ‘농지법’도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좌절한 요인을 대부분의 후세 연구자들은 시기상조론으로 돌린다. 인간은 사실을 눈앞에 들이대지 않는 한 눈을 뜨지 못하는 법이다. 실제로 그라쿠스 형제의 생각이 70년 뒤에나마 실현된 것은 무기를 가진, 즉 인간에게 눈을 뜨도록 강요할 만한 권력을 가진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라쿠스 형제의 좌절은 로마 시민의 지지를 잃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원로원으로 대표되는 당시 로마 지식층과 사이가 멀어진 탓도 있었다. 평민층을 대변하는 호민관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은 원로원을 주체로 성립해 있는 로마식 공화정의 붕괴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당시 지식인들이 품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어쨌든 그라쿠스 형제는 줄곧 성장의 길을 걸어왔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로마에 최초의 이정표를 세웠다. 이것이 그들의 역사적 존재이유다. 로마인들도 그 후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결국에는 그라쿠스 형제가 세운 이정표에 따라 길을 나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로마 시민들은 그라쿠스 형제가 추진했던 개혁의 진정한 의미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형제의 죽음을 무척이나 애석하게 여겼다. 그들은 가이우스가 죽은 곳에 형제를 기리는 동상과 빗돌을 세우고, 마치 자기네 조상의 무덤이라도 되는 것처럼 철마다 거기에 제물을 바치곤 했다.
티베리우스의 아들은 성년이 되기 전에 죽었고, 가이우스에게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라쿠스 가문은 여기서 대가 끊기고 말았다. 원로원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딸의 재산까지는 몰수할 수 없었는지,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는 가이우스가 죽은 뒤 나폴리만 서쪽 끝에 있는 미세노에 별장을 짓고 은둔했다.
칩거했다고는 하지만 집 안에 틀어박힌 채 아무도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바닷가 별장에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오리엔트나 아프리카 등지에서 왕과 제후들이 로마를 방문할 때마다 그녀를 예방했고, 문인이나 학자들도 국적을 불문하고 환대를 받았다.
애통하게 죽은 형제가 화제에 올라도 코르넬리아가 눈물을 짓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로마인들은 그녀의 동상도 만들어 바쳤다. 거기에는 '아프리카누스의 딸이며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라는 글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
기원전 120년~기원전 78년
마리우스의 가문
그라쿠스 형제가 잇따라 죽은 해로부터 10년 뒤, 로마가 아닌 아르피노라는 시골에서 미천한 가문 출신의 한 사나이가 로마의 중앙 정계에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였다. 마리우스는 비록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야심만만한 지방 출신의 젊은이답게 군인의 길을 지망했다. 전쟁터야말로 진정한 실력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남성의 경우, 로마 시민은 보통 이름을 세 개 갖고 있었다. 개인 이름(프라이노멘), 일족 이름(노멘), 가문 이름(코그노멘)의 세 개다. 예컨대 티베리우스는 개인 이름이고, 셈프로니우스는 일족 이름, 그라쿠스는 가문 이름, 즉 성(姓)이다. 이런 로마에서 마리우스를 비롯한 몇몇 시민이 이름을 두 개밖에 갖지 않은 이유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가이우스가 개인 이름이고 마리우스가 가문 이름이라면, 빠진 것은 일족 이름(노멘)이다.
마리우스의 성장
이름이 두 개밖에 없는 이 지방 출신자가 처음으로 주목을 받은 것도 에스파냐 누만티아의 전쟁터에서였다. 총사령관 막사에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한 사람이 물었다. “각하에 뒤이어 로마군을 이끌어갈 장군은 누가 될까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바로 옆자리에 있는 젊은 장교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사람일 거요.”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그해 나이 23세였다.
그로부터 13년 후인 기원전 119년, 그는 호민관에 취임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살해된 지 2년 뒤의 일이다. 이후 안찰관(아이딜리스)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4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결혼했다. 신부는 율리우스 일족에 속하는 카이사르 가문의 여자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모에 해당한다.
2년 뒤인 기원전 115년에는 법무관(프라이토르)에 출마하여 당선했고, 그 이듬해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속주 에스파냐 총독에 취임했다. 마리우스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가 5년 뒤에 다시 찾아왔다. 이른바 ‘유구르타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48세에 로마군 총사령관 메텔루스의 부장(副將)으로 아프리카에 파견되었다.
누마디아의 유구르트 전쟁
로마와 동맹관계에 있었던 마시니사 왕은 기원전 149년에 89세로 세상을 떠나고, 누미디아 왕국은 그의 세 아들이 물려받았다. 마시니사의 부탁으로 유언 집행인이 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왕위는 맏아들인 미킵사에게, 나머지 대권은 둘째아들 그루사와 막내아들 마스타나발에게 물려주었다.
마스타나발의 아들 가운데 유구르타(Jugurtha)라는 왕자가 있었다. 백부인 미킵사 왕은 그를 누만티나에 보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밑에서 종사하게 하였다. 젊은 왕자는 눈부시게 활약하여,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미킵사 왕에게 칭찬과 감사의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그러자 미킵사 왕은 유그루타를 양자로 삼았다.
그로부터 14년 뒤, 세 형제 가운데 혼자 살아남은 미킵사마저 세상을 떠나자 문제가 일어났다. 로마 원로원을 보증인으로 한 미킵사의 유언은 친아들 둘과 양자인 유구르타가 누미디아의 왕권을 삼분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왕권 분할에 불만을 품은 미킵사의 친아들 두 명과 유구르타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
하지만 칼을 맞대자마자 승부는 금방 판가름나고 말았다. 이긴 쪽은 유구르타였다. 친아들 중 한 명은 전사하였고 궁지에 몰린 또 다른 아들 아데르발은 로마에 사절을 보내 자신의 곤경을 호소하였다. 중재 역할을 맡은 원로원은 둘이 누미디아 왕국 전체를 양분하라고 제안했다. 서부는 아데르발이, 동부는 유구르타가 통치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상태는 5년도 지속되지 않았다. 군사력에 자신이 있던 유구르타가 아데르발의 영토로 쳐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싸움에서 아데르발이 전사하고 장사때문에 누마디아에 있던 이탈리안들도 많이 죽었다. 그러자 로마는 유구르타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111년,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로마군을 맞이한 것은 유구르타의 군대가 아니라 유구르타가 보낸 항복 사절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로마가 자신을 누미디아 왕으로 인정해주는 것뿐이었다.
군단을 이끌고 있던 집정관 베스티아는 유구르타의 왕위를 인정한다 해도 그것은 기정 사실을 인정하는 데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유구르타의 제의를 수락했다. 그런데 여기서 유구르타가 이탈리아인 살해에 이어 두 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로마에 체재하고 있던 누미디아 왕족 가운데 그의 사촌뻘 되는 인물을 암살한 것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110년, 로마는 다시 아프리카에 군단을 파병했다. 로마군을 맞이한 것은 이번에는 무장한 누미디아 병사들이었다. 미처 진영을 갖추기도 전에 허를 찔린 로마군은 당장 포위되어 열흘 안에 아프리카를 떠나라는 강화 조건을 받아들여 굴욕적인 상태로 로마에 돌아갔다.
이에 아프리카에 파병할 로마군의 총지휘는 기원전 109년의 집정관으로 선출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Quintus Caecilius Metellus)가 맡기로 결정되었다. 부장(副將)으로는 온갖 고초를 겪으며 밑바닥부터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실력이 뛰어난 인물로 인정받고 있던 48세의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임명되었다.
기원전 109년 여름, 카르타고의 옛터에서 서쪽을 향해 출발한 메텔루스 군대와 누미디아 영토 안에서 맞아 싸우는 유구르타 군대 사이에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메텔루스가 보병대를 지휘하고, 부장인 마리우스가 기병대를 이끌고 싸운 첫 번째 전투는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메텔루스는 달아난 유구르타를 끝까지 추적하지는 않았다. 이후 유구르타의 인기가 워낙 높아 주변부족들을 포섭하려는 로마의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고 전쟁은 장기전으로 접어들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리우스는 상관인 메텔루스에게 전략 변경을 요구했지만, 메텔루스는 듣지 않았다. 총지휘권을 장악하지 않는 한 병사들도 자기도 아프리카 땅에서 꼼짝 못하게 될 거라고 판단한 마리우스는 집정관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마리우스의 집정관 취임
기원전 107년 로마에서 열린 민회에서 마리우스는 집정관 출마 의지를 분명히 했을 뿐 아니라 공약도 분명히 밝혔다. 유구르타를 생포하든 죽이든, 유구르타 전쟁을 조기에 종결짓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민회는 ‘신참자’인 마리우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담당할 전선을 아프리카로 결정했다.
50세에 집정관으로 선임된 마리우스는 지금까지 평생을 군단에서 보낸 만큼, 로마 군단의 실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 그것을 타개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때 마리우스는 로마 역사상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병사들을 모집하려 하고 있었다.
공화정 로마의 주변부에서 태어나 자란 마리우스는 당면 문제를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는 교육도 받지 못했고 그럴 만한 교양도 없었지만, 직업군인으로서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로마 군단이 양적·질적으로 수준이 저하되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그 자신의 체험만 가지고도 민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징병제에서 지원병제로
마리우스는 집정관의 권리인 정규 군단 편성을 기존의 징병제가 아니라 지원병 제도로 바꾸었다. 마리우스의 호소에 응해 지원한 로마 시민들 대다수는 농지를 잃거나 하여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다. 시민병이 병역에 종사하는 동안 지급되고 있던 경비는 지원병들의 급료가 되었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공화정 로마의 근간을 건드리는 중대한 개혁이었다. 그런데도 이렇다 할 반대 없이 순조롭게 실현되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첫째는, 싸움만 했다 하면 패하거나 애를 먹기 일쑤인 당시의 로마군과 그 군대를 이끄는 원로원 계급의 지휘 능력을 로마 시민들이 불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마리우스의 개혁은 농지개혁을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유층의 반발을 사지 않았다는 점이다.
셋째, 병역에 끌려나갈 필요가 없어진 하층민들과 가슴을 펴고 당당히 살 수 있는 직업을 되찾은 ‘전(前) 실업자’들한테 대단한 호평과 환영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네 번째 이유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체제 밖 개혁’이었던 반면에 마리우스의 개혁은 ‘체제 내 개혁’이었다는 점이다. 마리우스는 호민관 시절에 개혁을 외치지 않고, 집정관으로서 개혁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과감한 전법이 장기인 마리우스를 총사령관으로 맞이함으로써 아프리카 전선이 활기를 띤 것은 확실하다. 프롤레타리아 출신 지원병들도 열심히 싸웠다.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는 유구르타의 거점들을 차례로 공략한 로마군은 그해 가을이 끝날 무렵에는 누미디아의 동쪽 절반을 평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구르타는 여전히 건재했다. 전쟁은 끝난 게 아니었다. 끝나고 있는 것은 마리우스의 집정관 임기였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절대 지휘권’(임페리움)을 계속 부여해달라고 로마 민회에 요청했다. 민회는 그것을 가결했다. 그래서 이듬해인 기원전 106년에도 마리우스는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술라의 등장
유구르타의 최대 후원자인 마우리타니아 왕과 유구르타의 사이를 끊지 않으면 유구르타를 완전히 고립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외교적 재능이 필요했다. 마리우스 휘하에 그 방면에 재능이 있는 인물이 새로 가담했다. 회계감사관으로 로마에서 부임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바로 그 인물이었다.
로마 역사상 또 하나의 주인공이 등장한 것이다. 그해에 술라의 나이는 32세였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는 달리, 스키피오 가문이 속해 있는 명문 귀족인 코르넬리우스 일족에 속해 있었다. 다만 조상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귀족이긴 해도 별로 두드러지지 않은 집안 출신이었다.
그런 탓도 있어서 술라의 집은 가난했다. 로마에서는 단독주택을 ‘도무스’라 부르고, 임대 아파트는 ‘인술라’라고 불렀는데, 술라는 귀족이면서도 인술라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창녀들이 보태주는 돈으로 고학을 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호방한 성격으로 병사들에게 평판이 좋았다. 상관에 대해서는 예의를 지키면서도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고, 할 말은 거리낌없이 했다. 키가 훤칠하고, 훗날처럼 곰보가 되지 않았던 시절의 그는 살결이 하얀 미남이었고, 행동거지에는 늘 품위가 있었다.
첫 시도는 실패했지만 두 번째 시도에서 술라 혼자서 유구르타의 병사들이 배회하는 곳을 통과하는 위험한 역할을 떠맡았다. 마우리타니아의 보쿠스 왕을 만난 술라는 둘만의 단독 회담을 요구했다. 이튿날 보쿠스 왕은 잔치 초대에 응해 도착한 유구르타를 즉석에서 체포해서 쇠사슬에 묶은 채 술라에게 넘겼다.
오랫동안 로마를 괴롭힌 유구르타 문제도 마침내 해결되었다. 로마인들은 모든 것이 마리우스의 공적이라고 믿고, 그가 아직 아프리카에 있는데도 이듬해인 기원전 104년의 집정관으로 그를 선출했다. 유구르타 전쟁은 로마 역사를 움직인 또 하나의 인물인 술라의 화려한 데뷔 무대가 되었다.
이즈음 알프스 북쪽에서 야만족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기원전 104년 로마 민회가 마리우스를 집정관에 다시 선출한 것은 이 야만족을 마리우스라면 격퇴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북쪽 야만족들이 남하하기 시작한 이후 8년 동안, 로마군은 다섯 번에 걸쳐 파병되었지만 모두 패배했다.
기원전 105년에는 정규 규모의 군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이 군단도 패배를 면치 못하는 바람에 남프랑스는 야만족의 침입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알프스라는 천연의 방벽이 지키고 있는 이탈리아마저 위험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그에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남하를 계속하던 야만족이 웬일인지 그해에는 남하를 멈추고, 서쪽의 에스파냐로 방향을 돌렸기 때문이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마리우스는 기원전 104년의 비교적 평온했던 시기를 이용하여 군제 개혁을 확립하려 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총사령관이 지휘할 수 있는 군단의 수가 신축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방어를 기본원칙으로 하여 성립된 이전의 군제가 로마의 패권이 미치는 지중해 전역을 염두에 둔 공격형으로 바뀐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재산 정도에 따라 나뉘어 있던 벨리테스, 하스탈리, 프린키페스, 트리알리의 분류를 완전히 폐지한 것이다. 세 번째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인 지원병과 ‘로마 연합’ 동맹시에서 참가하는 병사의 구별을 없앤 점이다. 네 번째는 장교나 막료들도 전처럼 민회에서 선출하지 않고 총사령관이 임명하도록 명시한 것이다.
다섯 번째 개혁은 보병 사이의 구별을 나타내고 있던 무기와 장비의 차이도 없애버린 것이다. 여섯 번째, 마리우스는 지금까지 재산에 따른 계급을 나타내어 나뉘어 있던 부대 깃발을 폐지하고, 모든 군단이 똑같이 은빛 독수리를 깃발로 삼도록 결정했다. 독수리가 로마를 상징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일곱 번째, 마리우스 이후의 로마군 기병대는 말을 잘 타는 누미디아나 에스파냐, 갈리아, 그리스 등지의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집단이 되었다. 끝으로 여덟 번째는, 전에는 ‘로마 연합’ 동맹시에서 참가한 병사들 중에서 총사령관의 직속 근위대를 선발하던 것을 로마 시민병을 포함한 군단 전체에서 선발하기로 한 점이다.
로마군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이루어진 마리우스의 개혁에도 얼마 후에는 나쁜 면이 나타나게 된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비판하는 로마 군단의 ‘사병화’(私兵化)가 그것이다. 그들은 비난하기를,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이야말로 나중에 술라와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같은 인물이 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주었다고 말한다.
마리우스는 기원전 104년부터 매년 계속해서 다섯 차례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마리우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이 개혁의 정치적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마리우스 개인의 야심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요청에 따른 필연적인 귀결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게르만족의 침입
기원전 102년, 이동을 다시 시작한 게르만족은 전투원인 성년 남자의 수만 해도 무려 3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자들은 물론 가축까지 데리고, 수레에 잡다한 짐을 잔뜩 실은 민족 대이동이다.
게르만족은 부족별로 나뉘어 세 방향에서 침입하기로 했다. 테우토니족은 남프랑스의 바다를 따라 서쪽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간다. 킴브리족은 알프스를 넘어 북쪽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간다. 티그리니족은 동쪽 방면에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간다.
여기에 대처하는 로마에서는, 마리우스가 서쪽을 맡고, 마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된 카툴루스가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킴브리족을 상대하게 되었다. 마르세유에서 북쪽으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아쿠아이 섹스티아이(오늘날의 엑상프로방스)에서 벌어진 유명한 ‘아쿠아이 섹스티아이 전투’는 로마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로마군은 킴브리족이 일부러 무방비로 지나가도록 놔둔 후에 뒤에서 급습했고, 10만 명이 넘는 게르만족이 죽거나 붙잡혀 전멸했다. 동맹시 마르세유와 속주 남프랑스는 게르만족의 위협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동료 집정관 카툴루스가 지휘를 맡고 술라도 막료로 종군해 있던 전선에서는 이쪽과 똑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카툴루스는 마리우스와 달리, 적을 기다리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쳐올라가는 전술을 택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101년 봄, 마리우스와 카툴루스가 이끄는 연합 로마군은 야만족의 남하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포강을 건넜다. 그러고는 바로 북쪽에 있는 베르첼리에서 적이 접근해 오기를 기다렸다. 베르첼리는 토리노와 밀라노의 중간지점에 펼쳐진 평원이다.
게르만족의 병력은 10만이 훨씬 넘는데 비해 로마 연합군은 5만 2천 명이다. 그런데도 전투는 로마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마리우스와 카툴루스는 수도에서 거행된 개선식에서는 둘 다 백마 네 필이 끄는 전차를 몰았다. 이제 이탈리아도 야만족의 침입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된 것이다.
게르만족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 직후, 마리우스의 인기는 참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상태였다. 민회는 그를 기원전 100년의 집정관으로 다시 선출했다. 통산 여섯 번째였고, 기원전 104년부터 5년 동안 매년 계속해서 집정관에 선출된 셈이다. 건국 이래의 명문 귀족도 달성하지 못했던 지위와 영예로 빛났다.
마리우스가 도입한 지원제에 따라 로마 군단의 병사들은 직업군인이 되었다. 그들은 마리우스를 따라 아프리카와 남프랑스, 이탈리아 북부에서 줄곧 싸웠다. 그리고 어디에서나 이겼다. 하지만 개선식이 끝나자마자, 7년 동안 마리우스 휘하에서 싸운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군대 해산이었다.
호민관 사트르니누스의 개혁
플루타르코스의 말에 따르면, ‘평시의 지도자가 아니라 전시의 지도자’였던 마리우스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부하병사들에 대한) 의무감을 어떻게 하면 정책화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호민관 사투르니누스가 마리우스의 두뇌 역할을 맡게 된다.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Lucius Appuleius saturninus)는 그라쿠스 형제의 숭배자였다. 호민관은 우선 서민층에 대해 정책 가격으로 밀을 판매하는 ‘곡물법’을 개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호민관은 해외에 식민시를 건설하는 새로운 ‘식민법’도 제안했다.
여기에 대해 원로원이 단호히 반대하고 나섰다. 반대 이유는 재원 부족이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달리 사투르니누스는 재원 확보 방안까지는 마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마리우스의 퇴역병들을 수도 로마로 소집하여, 그들이 회의장을 가득 메운 민회에서 그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뿐만 아니라 원로원의 심기를 건드리는 법안까지 추가로 가결시켜 버렸다. 앞으로 원로원은 민회에서 가결된 법안에 대해 5일 이내에 그 법안을 인정한다는 것을 선서로 밝히도록 규정한 법안이다. 선서를 거부한 자는 원로원 의석을 박탈한다는 규정도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서를 끝까지 거부한 것은 유구르타 전쟁에서 마리우스의 상관이기도 했던 메텔루스였다. 귀족적인 이 사람은 원로원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자진 망명이라는 형태로 로마에서도 떠나버렸다. 마리우스를 존경하고 있던 원로원 의원들도 이때부터는 마리우스에게 거리를 두게 되었다.
사트르니누스의 죽음
호민관 사투르니누스는 원로원을 굴복시킨 승리감에 도취해 있었다. 수많은 지지자를 거느리게 된 그는 이듬해인 기원전 99년의 호민관에 출마하여 연속 재선을 노렸다. 사투르니누스는 하수인을 시켜서 경쟁자(*정확히는 반대파인 당시 집정관 당선자 가이우스 멤미우스)를 살해했다. 원로원이 기다리고 있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원로원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무질서 상태에 대한 대책으로 '원로원 최종 권고'를 의결했는데, 집정관인 마리우스가 이를 따를리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호민관은 카피톨리나 언덕에 지지자들을 소집하여 농성을 벌이면서 기세를 올렸다.
오랜 망설임 끝에 마리우스는 마침내 ‘폭도’ 진압의 선두에 섰다. 그는 간단히 투항한 사투르니누스와 그의 일파를 죽이지도 않았고, 감옥에 가두지도 않았다. 그저 포로 로마노에 있는 한 건물에 감금했을 뿐이다.
그런데 사투르니누스를 증오하고 있던 일파가 건물 지붕을 부수고, 그 안에 있던 자들에게 돌과 기와를 던져 죽여버렸다. 마리우스는 이 무법행위를 저지하는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마리우스의 인기 하락
이 사건 이후 평민들은 자기네 대변인이라고 믿었던 마리우스에게 실망하게 된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한 발짝만 거리로 나가도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던 영웅이 이듬해인 기원전 99년에는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는 것조차 포기해야 했다.
그런 마리우스를 비웃기나 하듯, 원로원은 망명 중인 메텔루스를 불러들이자는 제안을 압도적인 다수로 의결했다. 그리고 8년이 지났다. 로마가 표면상으로는 평화를 누린 8년이었다. 그러나 수면 밑에서는 흐름이 서서히 큰 물결로 바뀌고 있었다.
자작농을 장려함으로써 사회 기반을 튼튼히 다지려는 시도는 농지개혁법이 좌절되는 바람에 뒤로 미뤄진 채 그런 상태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실업 문제 해결책의 하나이기도 했던 식민시 건설은 북아프리카에 마리우스의 퇴역병들을 이주시켜 정착촌을 만든 뒤에는 중단되어버렸다.
동맹시 전쟁
평화가 9년째에 접어든 기원전 91년, 이해의 호민관에는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선출되어 있었다. 호민관 드루수스는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제안해놓고 가결시키지 못한 ‘시민권 개혁법’, 즉 동맹시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되살렸다.
사실 동맹시의 시민권 문제는 그것을 맨 먼저 지적한 가이우스 그라쿠스 이래로 로마의 국정 개혁을 가로막는 암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농지개혁도, 경제 구조 변화에 대한 대처도, 군제 개혁조차도 철저히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민회에서 기원전 91년의 집정관 필리푸스는 드루수스의 법안에 반대하는 동의안을 제출했다. 드루수스는 거부권 행사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면 대결을 거부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암살 당했다. "로마인은 언제나 나와 같은 인물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해가 바뀌기도 전에 역사상 ‘동맹시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전쟁이 일어났다. 이탈리아반도의 중부와 남부에 사는 비교적 가난한 여러 부족이 일제히 무장 봉기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로마 연합’에 가맹한 도시국가들이었다. 250년 동안이나 로마의 ‘동맹자’였던 그들이 맹주 로마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다.
봉기한 부족들을 북쪽부터 차례로 열거하면, 아드리아해안 쪽의 피첸토족, 베스티노족, 마루키노족, 내륙으로 들어가서 파엘리노족, 마르시족, 남쪽으로 내려가서 역시 아드리아해안의 프렌타노족, 산악 부족인 삼니움족, 이탈리아 남부의 히르피노족 등 처음 궐기했을 당시만 해도 8개 부족이 된다.
로마가 건설한 가도 덕분에, 반란군은 아무리 먼 곳에서도 한 달 남짓만 행군하면 수도 로마의 성벽까지 들이닥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여덟 부족은 연합하여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나라 이름은 이탈리아. 신생국 이탈리아의 수도는 아펜니노산맥 기슭에 있는 코르피니움으로 정했다.
로마 입장에서는 '로마 연합’ 군대의 절반이나 되는 병력이 빠져나가버린 셈이 된다. 빠져나간 것은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로마 집정관 밑에서 참모나 장교로 일하고 있던 동맹시 출신 장교들 중에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도 고향 사람들과 행동을 같이했다.
기원전 90년 초, 로마는 캄파니아 지방에 선을 긋듯이 하여 전선을 북부와 남부로 나누었다. 기원전 90년의 집정관으로 선출된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가 북부 전선, 역시 집정관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먼 친척)가 남부 전선의 총지휘를 맡기로 결정되었다.
집정관 루푸스가 총지휘를 맡은 북부 전선에서는 게르만족을 무찌른 승장 마리우스가 67세의 노익장을 과시하며 재등장했다. 폼페이우스의 아버지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도 최전선에 나섰다.
집정관 카이사르가 총지휘를 맡은 남부 전선에는 48세의 무르익은 나이에 이른 술라를 선두로, 아직은 24세의 청년이지만 훗날 폼페이우스 및 카이사르와 함께 삼두정치의 일익을 담당하게 될 크라수스도 군단장에 임명되어 있었다.
전쟁 2년째인 기원전 90년의 전황은, 전반에는 이탈리아가 우세했고 후반에는 로마의 우세로 끝났다. 로마는 북부 전선의 총지휘를 맡은 집정관 루푸스를 잃었다. 남부 전선에서도 군단장 두 명이 전사했다. 하지만 속공을 구사한 술라의 과감한 전술에 대항할 수 있었던 지휘관은 이탈리아 쪽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집정관 카이사르는 수도로 돌아가 민회를 소집하고 민회에 법안 하나를 제출했다. 이 ‘율리우스 시민권법’(렉스 율리아 데 키비타테)은 ‘동맹시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동맹자’들이 요구한 것, 곧 로마 시민권 취득을 전면적으로 수용한 것이었다. 이로써 ‘동맹시 전쟁’은 사실상 기원전 89년에 끝났다.
‘율리우스 시민권법’은 오랜 ‘동맹자’가 이혼장을 들이밀었을 때에야 비로소 성립되었지만, 귀족과 평민이 공직에 취임할 기회를 균등하게 함으로써 두 계급 간의 오랜 항쟁을 끝낸 기원전 367년의 ‘리키니우스법’과 맞먹는 획기적인 법, 즉 로마 국가의 방향 전환이었다.
미트라다테스의 야망
이즈음 로마는 속주(프로빈키아)라는 형태로 자신의 통치하에 편입시킨 지방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을 동맹국으로 삼고 있었다. 누미디아 왕국과 같이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를 맺는 방식도 있었지만, 로마와 통상적인 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그밖의 나라들은 아직 로마와 직접 대결한 적이 없었다.
이런 부류의 동맹국으로는 로마가 ‘혼미’를 맞기 시작한 기원전 133년 시점에서는 소아시아의 비티니아, 폰투스, 카파도키아, 그 동쪽에 있는 아르메니아,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계승자 가운데 아직 남아 있는 시리아와 이집트가 있었다. 그들의 통치 방식은 모두 아시아적인 전제국가였다.
이들 가운데 하나인 폰투스 왕국에서는 미트라다테스 6세가 기원전 115년부터 왕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사내였지만 영명한 군주였다. 로마가 혼란기에 접어든 것을 보고, 그는 이 틈을 이용하여 제국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기원전 92년,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해, 인접국 비티니아의 왕이 죽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났고 미트라다테스는 배후에서 손을 써서 자신의 측근을 왕위에 앉혔다. 곧이어 인접국인 카파도키아의 왕위에도 아들 가운데 하나를 앉히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쫓겨난 양국의 왕족들은 동맹관계의 로마에 호소해 왔다.
그런데 1년도 지나기 전에 ‘동맹시 전쟁’이 일어났다. 미트라다테스는 이 전쟁이 오래 지속될 것이고, 로마는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군대를 서쪽으로 보냈다.
30만에 달하는 폰투스군은 비티니아를 유린한 다음, 그 서쪽에 있는 옛 페르가몬 영토로 물밀듯이 쳐들어갔다. 그곳은 이제 로마의 속주다. 로마가 ‘동맹시 전쟁’의 종결을 서두른 이면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술라와 마리우스의 충돌
‘동맹시 전쟁’이 끝난 기원전 89년 겨울, 로마로 돌아온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이듬해인 기원전 88년의 집정관에 출마하여 당선했다. 그리고 그의 소원대로 오리엔트 전선을 담당하는 임무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칠순을 맞이한 마리우스가 오리엔트 정벌에 야심을 품었다. 자기가 하고 싶다기보다는 술라한테 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이름을 떨치고 있는 장군끼리의 대립에 호민관이 관여함으로써 문제가 복잡해졌다.
기원전 88년의 호민관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였다. 루푸스가 정책화하고 싶어하는 법안이 성립되도록 마리우스가 ‘클리엔테스’를 동원하여 협력하는 대신, 마리우스의 오리엔트 정벌에 루푸스가 이끄는 평민집회가 협력한다는 공동투쟁 관계가 성립되었다.
결국 신시민들이 거주지역에 따라 35개 선거구 어디에서나 투표할 수 있는 '술피키우스'법은 통과되고 오리엔트 정벌의 총사령관도 마리우스에게 맡긴다는 결의도 평민집회를 통과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시민'과 반대파의 난투극이 벌어졌고 술라도 피신하게 된다.
술라의 반격
로마에서 피신한 술라는 놀라에서 편성 중인 군단에 도착하여 병사들을 소집했다. 그러고는 자기는 지금부터 로마로 돌아가 실력을 행사해서라도 더럽혀진 명예를 회복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병사들은 대부분 술라를 따라 2년 동안 ‘동맹시 전쟁’을 함께 치른 자들이었다. 그들은 술라의 ‘사병’(私兵)이 되어 있었다.
로마에 있던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 일파가 허를 찔린 것은, 설마 로마 집정관이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쳐들어올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방어 준비도 갖추지 않았던 수도는 몇 시간의 작은 충돌을 거쳐 술라 군대에 제압되었다. 마리우스는 에트루리아 지방으로 달아났지만, 술피키우스는 붙잡혀 살해되었다.
이후 집정관 술라는 설령 민회나 평민집회에서 의결된 사항이라도 원로원의 승인을 얻지 못하면 실시되지 않는다는 법안을 제출했고, 이 법안은 반대하는 소리도 없이 가결되었다.
이어서 술라는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 일파, 이른바 ‘민중파’ 지도자들을 반역자로 선언하고, 그들을 도와준 자에 대해서도 똑같은 죄로 처벌한다는 법안을 성립시켰다.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에트루리아 지방으로 피신한 마리우스가 그곳에서도 쫓겨나 아프리카까지 달아나야 했던 이유도 바로 이 법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87년 집정관에 선출된 것은 옥타비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Lucius Cornelius Cinna)였다. 이즈음 미트라다테스 6세는, 로마가 당분간 군대를 보낼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소아시아 서해안 지역을 점령한 후 그곳에 주재하는 8만 명이나 되는 로마 시민과 이탈리아인들을 피의 제물로 바쳤다.
술라는 차기 집정관 킨나를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불러, 최고신 유피테르의 신전 안에서 술라가 성립시킨 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그해 말, 5개 군단에 기병을 더한 로마군 3만 5천 명은 술라를 따라 브린디시에서 바다를 건너 그리스로 떠났다. 미트라다테스의 예상은 또다시 빗나간 셈이었다.
킨나의 배신과 마리우스의 죽음
술라가 그리스로 떠나자마자, 킨나는 맹세를 깨뜨렸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의 집정관 옥타비우스가 거부권을 발동했다. 또다시 로마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패한 킨나는 로마에서 달아났다. 이때 마리우스가 아프리카에서 병사 6천 명과 함께 귀국했다. 무력으로 로마를 장악한 것은 이번에는 마리우스와 킨나 쪽이었다.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처갓집 사람인데도 살해되었다. 루키우스의 동생으로, ‘동맹시 전쟁’에서 마리우스와 함께 군단장을 지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도 살해되었다. 나중에 ‘삼두정치’의 ‘두 머리’가 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도 모두 이해에 아버지를 잃었다. 원로원 의원 50명, '기사 계급'은 무려 1천 명이 살해되었다.
민회는 이듬해인 기원전 86년의 집정관으로 마리우스와 킨나를 선출했다. 마리우스에게는 일곱 번째 영광이었지만 임기가 시작된지 13일째인 기원전 86년 1월 13일 향년 71세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킨나는 이 자리에 자파인 플라쿠스를 앉히는데 성공했고, 이때부터 킨나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다.
킨나의 독재정치
그는 우선 ‘술피키우스법’을 다시 민회의 표결에 부쳐 성립시켰다. 또한 죽은 마리우스 대신 ‘민중파’를 대표하게 된 킨나는 하층민을 구제하기 위해 채권자들이 빚의 4분의 3에 대한 징수권을 포기하도록 규정한 법안도 성립시켰다. 이에 금융업자들이 속해 있는 ‘기사계급’은 킨나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킨나는 ‘신시민’과 하층민들의 표를 배경으로, 해외 원정에 나가 있는 술라를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는 결의안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해임했을 뿐 아니라, 술라와 그 일파의 재산 몰수와 국외 추방까지 결의해버렸다.
킨나는 동료 집정관 플라쿠스가 이끄는 ‘정규군’을 파견하여 미트라다테스와 대결시키기로 했다. 플라쿠스의 정규군은 그해 말에 브린디시를 떠나 그리스를 거치지 않고 직접 소아시아에 상륙하기로 결정했다. 술라는 킨나의 서약을 믿은 탓으로 적지에 고립되어버린 셈이지만, 상대가 술라인 만큼 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