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 집정관에 취임하기까지
로마인 이야기 제4권과 제5권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CAIVS IVLIVS CAESAR)'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이다. 역사서술가로는 특이하게 190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테오도어 몸젠(Theodor Mommsen, 1817∼1903)은 그의 저서 『로마사』에서 카이사르를 '로마가 낳은 유일한 천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에게 삼두체제를 제안하여 권력을 쥐게 된 과정과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8년 동안 갈리아를 정복한 과정에 대해 직접 쓴 『갈리아 전쟁기』와 루비콘강을 건넌 이후를 다룬 『내전기』의 내용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이야말로 로마의 유일한 정치체제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원로원파에 대항해, 원로원의 통치력 쇠퇴와 경직화를 이유로 새로운 정치체제인 '제정'(帝政)의 청사진을 그렸다.
이탈리아의 일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다음과 같이 카이사르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고 한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다음 다섯 가지다.
지성・설득력・지구력・자제력・지속적인 의지.
카이사르만이 이 모든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유년 시절(카이사르 탄생~6세)
기원전 100년~기원전 94년
태어난 곳
고대 로마의 심장부인 '포로 로마노(라틴어로는 포룸 로마눔)'를 중심으로 신전과 부자인 귀족들이 거주지가 있는 '로마의 일곱 언덕'이 있다. 그리고 그 언덕 아랫쪽에는 서민들이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집중적으로 모여 살던 지역도 있었다.
이런 지역들 가운데 도심과 가장 가깝고 포로 로마노와 거의 맞닿아 있다고 해도 좋은 지역은 예로부터 ‘수부라’라고 불렸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서력 기원으로는 기원전 100년 7월 12일, 이 수부라에서 태어나, 37세의 나이로 최고 제사장에 뽑혀 포로 로마노 안에 있는 관저로 이사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집안 배경과 환경
율리우스 씨족은 코르넬리우스나 아피우스나 클라우디우스 씨족과 맞먹을 만큼 오래전까지 가계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명문 귀족이다.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의 어머니는 알바롱가의 공주이고, 율리우스 씨족은 이 알바롱가의 유력자였기 때문이다.
율리우스 씨족도 공화정 초기에는 상당히 활약한 모양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3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300년 가까이 소식이 완전히 끊긴다. 로마의 공식 기록인 ‘최고 제사장 연대기’에 율리우스라는 가문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제2차 포에니 전쟁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그런데 그 후 또다시 율리우스 씨족도 카이사르 가문도 완전히 소식이 끊기는 상태가 재연된다. 기원전 1세기에 접어들어 집정관이 한 명 나왔지만, 이 사람(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아니라 아저씨뻘 되는 친척이었다.
아버지는 법무관을 지낸 게 고작이었다. 그래도 부모의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술라와는 달리, 선대까지 가계를 더듬을 수 있는 것은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법무관까지 지냈고 어머니의 친정이 이름난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인 아우렐리아는 저명한 법학자로서 집정관을 지낸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누이동생이었다.
당시 수도 로마는 이주자들을 수용하느라 항상 골치를 앓는 상태에 있었다. 재산이 변변찮은 사람들의 수요를 충족시키려면 자연히 건물을 고층화할 수밖에 없다. 4~5층에 이르는 임대용 공동주택을 로마인들은 ‘인술라’(섬)라고 불렀는데, 술라도 청년 시절까지는 이 ‘인술라’에서 살았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인술라에서 살았다는 사료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카이사르는 비록 수부라의 주민이라 해도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던 셈이다. 고대에 로마 시내의 단독주택은 석조 건물이 보급되기 이전의 벽돌 건물도 외벽이 상당히 두꺼웠다고 한다. 그 벽으로 둘러싸인 내부는 기본적으로는 좌우대칭으로 되어 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누나와 누이 사이에 낀 외아들이었는데 어머니의 애정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평생 동안 그를 특징지은 것 하나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도 유쾌한 기분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낙천적일 수 있었던 것은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시절(카이사르 7세~16세)
기원전 93년~기원전 84년
가정교사
고대 로마에서도 자녀 교육은 6, 7세부터 시작되었다. 공립학교는 없었고, 일반 가정에서도 아이들은 사설 학원에 다녔다.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학자 집안으로 알려진 아우렐리우스 코타 가문 출신이었고, 교양있는 여자로도 이름나 있었다. 그런만큼 아들의 초기 교육은 그녀가 직접 맡았을지도 모른다.
로마의 양반집에서는 기초 교육이 끝나는 8, 9세 무렵부터 자녀 교육을 가정교사한테 맡기는 것도 관습이었다. 당시의 교사는 그리스인의 독점 시장이었고, 그중에서도 ‘고급 브랜드’는 아테네에서 공부한 그리스인이었다. 하지만 소년 카이사르의 가정교사가 된 사람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한 갈리아인이었다.
초등교육 후기부터 고등교육 초기(16세 정도)까지 배우는 과목은,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문법, 말을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적절히 표현하는 기능을 배우는 수사학(레토릭),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터득하기 위한 변증학 그리고 산수, 기하, 역사, 지리이다. 이 일곱 과목이 ‘아르테스 리베랄레스(영어로 Liberal Arts)’다.
로마에서는 기초 과정을 마친 뒤의 수업은 선인들이 남긴 글을 읽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문법, 수사학, 변증학, 역사, 지리 모두 호메로스나 투키디데스나 플라톤이나 대(大)카토의 저술을 읽음으로써 배워나간다. 학생들이 쓰는 ‘공책’은 밀랍을 먹인 목판이다. 여기에 철필이나 상아펜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당시 로마인들에게 대학 진학은 아테네나 페르가몬이나 로도스섬에 유학하는 것이었지만, 거기서 배우는 주요 과목은 수사학과 변증학 및 철학이었다. 변호사를 지망하는 젊은이라면 반드시 고명한 변호사 밑에서 수업을 받으며 기능을 익혔는데, 법학은 이런 과정을 거쳐 터득하는 실무적인 학문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체육
고대 로마에서 가정교사한테 배우든 사설 학원에 다니든 간에 이런 교양학과는 오전에만 공부했다. 오후는 체육 시간이다. 체육 시간에는 가정교사한테서 해방되어, 로마 곳곳에 흩어져 있었던 키르쿠스(원형경기장)나 스타디움(공설운동장)에 딸린 체육 시설로 신체를 단련하러 간다.
소년 카이사르가 특히 장기로 삼은 것은 말타기였다고 한다. 등자도 없던 시대에 두 손을 목덜미로 돌린 채 기세 좋게 말을 달리는 것은 말이라는 짐승을 잘 알아야만 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 재능은 훗날 그가 치른 생애 최대의 결전에서 그에게 승리를 안겨주게 된다.
당시 로마의 양반집 자제로서는 지극히 평범하게 자라난 카이사르는 아홉 살 무렵부터 가정교사도 신체 단련도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을 체험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그가 태어난 해인 기원전 100년부터 9년 동안 로마는 보기 드문 평화를 누렸지만, 그 로마를 치열한 동란이 다시 습격했다. ‘동맹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현장교육
동란에 맞서 편성된 로마군 사령관들 중에는 그의 아저씨뻘 되는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모부뻘 되는 마리우스도 사령관으로 참전했다. 카이사르의 아버지(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전선에 나갔을 가능성이 크다. 카이사르네 식탁에서도 한동안은 이 전쟁이 주로 화제에 올랐을 것이다.
‘동맹시 전쟁’은 다행히 기원전 89년, 카이사르가 열한 살 되던 해에 끝났다. 동맹시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내세운 요구사항, 즉 로마 시민권 취득을 로마가 인정한 것이다. 이를 제창하여 입법화한 사람이 소년 카이사르의 아저씨뻘 되는, 기원전 90년의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기원전 110년부터 기원전 78년까지 30여 년은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라 해도 좋을 만큼 이 두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 전개된다. 카이사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어 22세가 될 때까지에 해당하는 세월이다. 게다가 권력투쟁의 한쪽 영수인 마리우스는 카이사르의 고모부이기도 했다.
이후 마리우스와 술라의 대립, 술라의 제1차 로마 진입, 술라의 동방 원정 직후 킨나의 배신 그리고 마리우스의 재집권 과정은 열두 살에서 열세 살의 소년에게는 난생처음 겪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아저씨뻘 되는 두 친척,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의 아우가 함께 고모부의 손에 죽은 것이다.
이후 킨나의 독재치하에 있는 것치고는 평온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카이사르도 어느덧 열여섯 살이 되었다. 이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카이사르는 열여섯 살의 나이에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버렸다.
로마의 풍습은 상류층 여자, 특히 출산 경험이 있는 여자의 재혼을 오히려 장려하는 쪽이었지만,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중매가 들어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정을 꿋꿋하게 꾸려나갔다. 어머니의 이 같은 태도가 젊은 가장에게는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결혼
술라의 귀국을 앞두고 그를 맞아 싸울 태세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킨나는 원로원 계급에 접근하려 했다. 킨나가 손에 쥐고 있는 첫 번째 카드는 마리우스가 죽은 뒤 이탈리아를 정상화한 치적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카드는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자기 딸 코르넬리아를 혼인시키는 것이었다.
킨나가 사위로 삼고자 하는 젊은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처조카이긴 했지만, 마리우스에게 살해당한 전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도 조카뻘이 된다. ‘율리우스 시민권법’의 입안자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해서는 보수파가 지배하는 원로원 안에서도 경의를 표하는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마리우스는 죽은 뒤에도 여전히 평민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런 마리우스의 처조카를 사위로 삼으면 킨나에 대한 서민층의 지지는 더욱 확고해질 터였다. 이리하여 카이사르의 첫 결혼은 말 그대로 정략결혼이 되었다.
신부 쪽은 그렇다 해도, 그렇게 이른 결혼을 신랑 쪽에서 승낙한 이유는 무엇일까. 짐작건대 카이사르가 장년기에 접어든 뒤에도 정사를 의논했다는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뜻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킨나의 딸과 혼담이 오가기 전에 카이사르에게는 이미 아버지가 정해준 배필이 있었다. ‘기사계급’에 속하는 집안으로 로마에서 손꼽히는 부잣집 딸이었다. 명문 귀족이라 해도 검소하게 살고 있는 카이사르 집안으로서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 약혼을 파기하고 킨나와 손을 잡은 것이다.
아우렐리아는 외아들이 장차 나아갈 길을 민중파로 선택했다. 마리우스의 처조카인 만큼 세상 사람들은 이미 그를 민중파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데 이제 킨나의 딸을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그 점을 더욱 분명히 한 것이다.
성년식
고대 로마인들의 결혼식은 신 앞에서 서약하고, 반지를 교환하고, 친척과 친지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이고, 신랑이 신부를 안고 집에 들어가는 순서로 진행된다. 오늘날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어쨌든 아직 미성년인 남편과 아내의 소꿉장난 같은 결혼생활은 수부라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귀족이 성년식을 치르기 전에 결혼하는 것을 예법에 어긋나는 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통상 17세에 하는 성년식도 1년쯤 앞당겨 치렀을 것이다. 성년식을 치르지 않은 소년은 ‘투니카’를 입는데, 명문 카이사르 집안의 가장에다 아내까지 거느린 그가 로마인의 정장인 ‘토가’를 입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토가는 타원형으로 재단한 하얀색 모직 천 한 장으로 되어 있다. 천의 두께는 계절에 따라 달랐다. 원로원 의원이 되면 옷단을 진홍빛 띠로 장식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천의 길이는 입는 사람의 키에 따라 결정된다. 이것을 몸에 두르는 일은 꽤 번거로워서 노예의 도움을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서로 겹쳐진 주름이 몸의 어느 부분에 더 많이 오고 어느 부분에 더 적게 오느냐에 따라, 차림새가 세련되어 보이느냐 둔중해 보이느냐가 결정된다. 그래서 멋쟁이는 주름 처리에 신경을 많이 썼다.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부터 투니카에 두르는 허리띠에 공을 들이거나 토가 주름에 신경을 써서, 멋쟁이로 유명했다.
그러나 소꿉장난 같은 결혼생활도, 토가를 입고 움직이는 연습도 평화롭게 계속할 수 없는 시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태풍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찾아왔다. 기원전 84년 말, 술라를 맞아 싸울 준비에 몰두해 있던 킨나가 군단을 편성하는 과정에 일어난 혼란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기원전 83년 봄에는 4만 명의 대군을 거느린 술라가 마침내 이탈리아반도의 남쪽 끝에 있는 브룬디시움(오늘날의 브린디시)에 상륙했다.
청년 시절(카이사르 17세~30세)
기원전 83년~기원전 70년
독재자 술라가 카이사르를 살려주면서 이혼을 명령했지만 18세의 카이사르가 이를 거부하고 이탈리아를 도망다니다가 소아시아로 건너갔다는 이야기는 이미 3권에서 다루어졌으므로 이 부분은 생략한다.
망명과 귀국
이 무렵 카이사르는 19세였고, 술라는 57세였다. 카이사르는 집안의 연줄을 총동원하여 귀국운동을 벌이면서 그 추이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차라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즉, 술라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동안에 카이사르는 군대에 지원하는 길을 택했다. 군단 병사들 틈에 섞여 들어가버리면, 여기저기 이동하면서 전투를 거듭하는 것이 군대인 이상, 경험을 쌓고 견문을 넓히면서 몸을 숨기기에도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9세의 젊은이는 아시아 속주(오늘날의 소아시아 서해안 일대) 총독인 미누키우스의 진영에 가서 입대를 지원했다. 이후 22세가 된 카이사르는 해적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킬리키아 총독 세르빌리우스 휘하에서 일하려고 전출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전출 되자마자 군영 본부에 로마의 전령이 도착했다. 술라의 죽음을 알리러 달려온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당장 총독에게 제대를 신청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고는 닻을 올리고 있는 배라면 행선지도 묻지 않고 올라탈 만큼 성급하게 로마로 출발했다.
수부라의 집에서는 어머니 아우렐리아와 아내 코르넬리아, 그리고 처음 보는 딸 율리아가 카이사를 맞이 하였다. 하지만 4년 만에 보는 로마는 22세의 젊은이에게 아직 활약할 기회를 베풀어주지 않았다. 아직 술라파의 중진인 루쿨루스와 크라수스, 폼페이우스가 포로 로마노를 활보하는 주인공들이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돌아온 로마에는 민중은 있었지만 민중파는 빈 껍데기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독재자 술라가 민중파와 그 동조자들을 편집광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철저하게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그 후에 실시된 술라의 개혁도 철저했기 때문에, 민중파가 의지처로 삼아온 호민관을 맡을 인재조차 부족한 형편이었다.
카이사르가 귀국한 직후, 강철같이 견고한 것으로 여겨지던 ‘술라 체제’에 대한 최초의 반격이 일어난다. 기원전 78년의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가 총독으로 부임하기 위해 편성한 군단을 이용하여 ‘술라 체제’를 실력으로 뒤엎으려 한 것이다. 술라의 희생자들 가운데 살아남은 소수의 한 사람인 카이사르에게 교섭이 없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의 ‘선견지명’은 결국 옳았다.
변호사 개업
23세의 카이사르는 변호사로 출세하려고 생각한 모양이다. 로마의 변호사는 변호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고발자가 되는 경우도 많으니까 때로는 검사 역할도 맡았다. 게다가 유력자나 저명인사를 고발하여 승소라도 하면 당장에 명성이 높아지니까, 변호사는 정계 진출을 지향하는 사람에게도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카이사르는 거물급 인사를 노렸다. 술라의 측근으로 알려져 있고, 집정관을 지낸 뒤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소아시아 속주 총독까지 지낸 돌라벨라가 상대였다. 원로원에서도 유력한 이 인물을 고발한 이유는 속주를 통치하는 동안 부정 축재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패배로 끝났다.
게다가 로마의 유력자들은 4년 전에 술라의 명령을 거부한 젊은이가 이 고발자와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생각해냈다. 술라가 죽은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술라파 사람들의 천하였다. 그는 또다시 국외로 탈출했다. 이번에는 쫓겨서 망명한 것이 아니므로 군단에 지원하지 않고 ‘대학’에 진학하기로 했다.
그가 진학할 대학은 아테네와 함께 당시의 ‘최고학부’로 이름높은 로도스섬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목적지인 로도스섬으로 가는 도중에 카이사르가 타고 있던 배가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그만 포로가 되어버렸다.
해적과 유학 생활
해적들은 카이사르에게는 20탈렌트의 몸값을 매겼다. 이 금액은 당시 4,300명의 병력을 모을 수 있는 큰 금액이었다. 그런데 자기한테 매겨진 몸값이 20탈렌트라는 말을 들은 젊은이는 껄껄 웃고 나서, “네놈들은 누구를 붙잡았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스스로 몸값을 50탈렌트로 올렸다.
종자가 몸값을 가지고 돌아와 카이사르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들에게서 해방되자마자 그는 가까운 밀레투스로 달려가 배를 빌리고 사람들을 모아서 해적을 토벌하러 갔다. 그는 밀레투스 근처에 정박해 있는 해적선을 기습하여 해적들을 모두 사로잡는 데 성공했고, 그들을 감옥에서 끌어내어 모두 교수형에 처했다.
로도스섬에서의 유학 생활은 1년 동안 계속 되었다. 중간에 외삼촌인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비티니아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해서 그 쪽에 가 있기도 했지만, 그가 폰투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 왕에게 밀려 비티니아에서 도망쳤다가 병을 얻어 죽는 바람에 로마에서는 집정관 루쿨루스를 다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카이사르능 다시 로도스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때 갑자기 수도 로마에서 급한 기별이 왔다.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죽는 바람에 공석이 된 제사장 자리에 카이사르가 임명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귀국
로마의 성직자 계급은 최고 제사장(폰티펙스 막시무스), 제사장(폰티펙스), 사제(플라멘), 점술사(아라겔)의 순서다. 여사제(베스탈레)는 별도로 취급된다. 원로원 계급의 강화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은 ‘술라의 개혁’ 이후 원로원 의원의 자제를 우선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이리하여 27세의 카이사르는 제사장이 되었다.
당시 로마에서 제사장은 제의(祭儀)를 집행하는 역할 외에는 보통 시민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3년 만에 귀국한 카이사르는 하얀색 토가를 걸치고 민회가 열리고 있는 포로 로마노의 연단에 섰다. 그가 입후보한 자리는 대대장(트리부누스)이었다. 1개 군단에는 10명의 대대장이 있는데 카이사르는 여기에 당선되었다.
지위는 얻었지만, 제사장으로서는 15명 가운데 한 명이고, 전략 단위인 2개 군단에서는 20명의 대대장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하다. 괄목할 만한 승진은 결코 아니었다. 27세가 되었는데도 카이사르의 출세 속도는 고작 이 정도였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권력을 잡고 집정관에 선출된 기원전 70년과 이듬해인 기원전 69년에 카이사르는 회계감사관에 선출되었다. 선출된 이듬해 1년 동안 카이사르의 근무지는 '먼 에스파냐'(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라고 부리는 이베리아 반도 남부였다.
당시 30세 때의 카이사르가 완전히 무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무명은커녕 상당한 유명인사였다. 아무리 20명 가운데 한 명이라 해도 군단 대대장과 회계감사관에 선출되었으니까, 하지만 30세의 그가 유명해진 것은 명문 출신 젊은이라서가 아니라 젊은 멋쟁이의 화려한 생활방식과 그 결과인 막대한 부채 때문이었다.
장년 시절(카이사르 31세~39세)
기원전 69년~기원전 61년
출발점
일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회계감사관에 취임할 때까지 진 부채는 총액이 무려 1,300탈렌트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11만 명 이상의 병력을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는 거금이다. 사료에서 엿볼 수 있는 그의 자금 용도는 크게 다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독서와 화려한 옷치레 등 자기 자신을 위한 소비이고, 두 번째는, 친구들과 ‘클리엔테스’와의 교제에도 돈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세 번째 원인은 애인들한테 주는 선물값이었다. 그는 이 방면에서도 씀씀이가 헤프기로 유명했고 여자들한테 선물한 이야기가 세간에 오르내렸다.
카이사르는 엄청난 액수에 이른 부채를 그대로 둔 채 에스파냐로 부임했지만, 문제가 별로 없는 지방의 근무였기 때문에 1년의 임기는 평범하게 끝났다. 다만 속주 통치의 경제적 분야를 담당하는 것이 회계감사관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임지인 에스파냐 남부를 자주 순방한 모양이다.
에스파냐 남부의 무역항 카디스에는 헤라클레스에게 바쳐진 신전이 있었는데, 출장길에 그 신전을 참배한 카이사르는 그 안에 안치되어 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초상 앞에서 이렇게 혼자말로 탄식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갓 서른도 안 되어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는데, 서른을 넘긴 내 꼴은 지금 뭐란 말인가?”
하지만 임기를 마치고 귀국 후 달라진 점이라고는 회계감사관을 지낸 사람에게는 자동적으로 원로원 의석을 준다는 ‘술라의 개혁’에 따라 원로원에 들어간 것뿐이다. 하얀색뿐이었던 토가에 주홍색 옷단 장식을 댈 수 있는 신분이 된 것이다.
카이사르의 선언
에스파냐에서 귀국한 카이사르는 고모의 유해 앞에서 추도 연설을 행하였다. 율리아는 그의 아버지의 누나이고, 평민의 영웅이었던 마리우스의 미망인이다. 추도사는 대개 고인과 가장 가까운 육친이 하도록 되어 있지만, 마리우스의 아들은 술라와의 내전 때 붙잡혀 죽었다. 그래서 조카인 카이사르가 추도사를 읽은 것이다.
카이사르는 율리아 고모의 장례 행렬에 고모부인 마리우스의 초상도 참가시켰다. 아무리 고인이라 해도 역적으로 선고된 사람의 초상을 유해 바로 옆에 세운 것은 대담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마리우스가 죽은 지 18년 만에 일찍이 자기네 영웅이었던 마리우스의 초상을 목격한 평민들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같은 무렵, 카이사르는 아내 코르넬리아를 잃었다. 카이사르는 아내의 장례식도 로마의 명문 집안 여자에게 어울리는 격식으로 치렀는데, 이때도 그는 추도사에서 장인인 킨나를 언급하지 않았다. 킨나의 초상도 장례 행렬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킨나는 민중파의 중진이었지만, 마리우스는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민중파 재건 선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카이사르의 이 같은 행위에 대해 술라파가 지배하는 원로원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로마의 고관들이 이제 막 원로원에 들어온 젊은 멋쟁이를 문제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찰관 취임
해적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고, 경제 활동도 활기를 되찾고, 오리엔트 문제도 폼페이우스에게 맡긴 뒤 승전보만 기다리게 된 로마가 활기에 가득 찬 평화를 누리고 있던 기원전 65년, 35세의 카이사르는 ‘명예로운 경력’, 즉 정치 경력의 두 번째 단계에 도달한다. 안찰관(아이딜리스)에 선출된 것이다.
안찰관은 공공 시설물 관리를 책임진 자리인 만큼 민중과 직접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카이사르는 이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선 기원전 312년에 건설된 이래 차츰 그 중요성이 인식되어 ‘로마 가도의 여왕’이라고까지 불리게 된 아피아 가도를 대대적으로 보수하기 시작했다.
한편 화려한 규모의 검투사 시합을 주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것은 분명 인기를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만 안찰관을 지내면서 지출한 비용 때문에 안 그래도 이미 엄청난 액수에 달해 있던 카이사르의 부채는 1년 사이에 천문학적 숫자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태평스러웠다.
또한 카이사르는 술라의 쿠데타 당시에 파괴된 채 16년이 지난 마리우스의 승전 기념비를 다시 원래의 장소에 세웠다. 아직 역적으로 취급되는 마리우스의 승전비를 재건한 것은 정치적 행위이지만, 원로원은 또다시 눈살을 찌푸릴뿐이었다. 자기네 영웅을 기리는 기념비를 오랜만에 본 민중은 그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런 일로 말미암아 로마 평민들은 카이사르를 자기네 희망으로 여기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처음 맡은 중요 관직의 임기를 이런 식으로 마쳤다. 정치적으로 대단한 업적은 이룩하지 못했다 해도, 평민층의 호감은 얻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많은 빚도 얻었지만.
최고 제사장이 된 카이사르
기원전 63년, 최고 제사장 메텔루스 피우스가 사망했다. 그러자 37세의 카이사르는 이 자리를 노렸다. 하지만 최고 제사장은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린 사람이 취임하는 명예직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게다가 카이사르와 대립한 두 후보도 쟁쟁한 인물이었다.
한 사람은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인데, 기원전 79년에 집정관을 지내고 개선식을 거행한 실적을 자랑한다. 또 한 사람은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인데, 기원전 78년에 집정관을 지낸 원로원의 ‘제일인자’(프린켑스)였다. 둘 다 나이는 60세 안팎.
카이사르에게는 나이가 젊다는 것말고도 불리한 점이 있었다. ‘술라의 개혁’으로 최고 제사장은 제사장들이 ‘합의’하여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제사장에 뽑히는 사람은 원로원 계급 출신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 만의 담합으로 선출되는 최고 제사장도 실제로는 원로원 계급이 독점하게 하려는 배려였다.
카이사르는 친구인 호민관 라비에누스를 시켜 한 가지 법안을 제출하게 했다. 기원전 104년에 제정되었으나 그 후 유명무실해진 ‘도미티아누스법’을 다시 제안하도록 한 것이다. 이 법에 따르면 최고 제사장은 35개 선거구 가운데 추첨으로 결정된 17개 선거구에서 투표로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표면상의 제안자인 라비에누스는 민회에 참석한 시민들에게 종교 행사의 최고 책임자를 원로원 계급의 독점에서 해방하여 시민 전체의 것으로 되찾아야 한다고 제안 이유를 설명했다. 시민들로서는 물론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호민관 라비에누스가 제출한 법안은 가결되었다.
그리고나서 카이사르는 선거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선거 자금도 빚에 의존했기 때문에 빚은 계속 쌓여갈 뿐이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대담한 승부사를 편든다. 드디어 37세의 카이사르는 선거에서 승리하여 최고 제사장이 되었다.
최고 제사장에 취임하자마자 카이사르는 거처를 관저로 옮겼다. 관저는 포로 로마노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포로 로마노에 자주 모이는 백성들에 대한 심리적 효과도 고려했을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암살당하는 날까지 이 관저에서 살게 된다.
반체제 활동의 첫걸음
최고 제사장에 취임한 해에 카이사르는 호민관 라비에누스를 통해 원로원 의원인 라비리우스를 고발했다. 라비리우스에 대한 혐의는 37년 전인 기원전 100년에 당시의 호민관 사투르니누스 일파를 살해한 주범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목표는 늙어빠진 원로원 의원 한 사람을 탄핵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보다 58년 전인 기원전 121년에 당시의 호민관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그때까지 불문율로 지켜져왔던 것을 명문화하여 하나의 법률로 성립시켰다. ‘셈프로니우스법’이 그것이다. 여기에 따르면 로마 시민권 소유자는 사형 선고를 받아도 민회에 항소할 권리를 갖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원로원은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하여 이 법률을 짓밟았다. 이 비상사태 선언은 반역 행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는 재판을 거치지 않고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집정관에게 부여했고, 그 최초의 희생자가 폭도로 몰린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 동지들이었다.
입법자 자신이 희생된 탓도 있어서 ‘셈프로니우스법’은 그 후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와 반비례라도 하듯 ‘원로원 최종 권고’가 점점 많이 나오게 되었다. 카이사르의 진짜 목적은 ‘원로원 최종 권고’의 비합법성을 공격하는 데 있었다.
‘원로원 최종 권고’에 힘입어 호민관 사투르니누스를 비롯한 로마 시민들을 재판도 하지 않고 항소권도 인정하지 않은 채 죽여버린 주범으로서 늙은 라비리우스를 법정으로 끌어내어, ‘원로원 최종 권고’의 비합법성을 시민들 앞에 폭로하여 원로원파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그들의 손에서 빼앗는 것이 카이사르의 속셈이었다.
카틸리나 역모 사건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는 기원전 63년 당시 45세였다.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술라 휘하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다. 장군으로서의 재능도 타고났지만 무엇보다도 무자비하게 명령을 실행하는 점을 술라는 높이 사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 로마의 경제적 호황으로 젊은이들에게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모자라는 시대가 되었고,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 원래 돈이 없는 카틸리나도 욕구를 채우고 싶으면 부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빚은 신세를 망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고, 그 결과 성격도 행동도 점점 어둡게 변해갔다.
2년 전인 기원전 65년, 43세로 자격 연령을 넘은 카틸리나는 집정관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부채를 전액 탕감한다는 것이 그의 공약이었다. 원로원의 대세는 급진적이고 경제 원리에도 어긋난 공약을 내건 카틸리나의 입후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체념하지 않고 이듬해에도 집정관 자리를 노렸지만 이번에는 선거에서 키케로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래도 카틸리나는 포기하지 않고 기원전 63년 10월 20일에 열린 이듬해 집정관 선거에 다시 출마했다. 이번에도 카틸리나는 또다시 3등에 그쳤다.
그런데 두 명의 당선자 가운데 무레나가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당했다. 그가 당선을 박탈당하면 카틸리나가 당선자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노련한 키케로의 변론으로 무레나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결국 카틸리나의 당선의 꿈도 날아가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카틸리나와 당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만을 품고 있던 술라의 옛 부하들을 중심으로 집정관 키케로를 죽이고 로마를 장악하자는 모의가 이루어졌다. 결행 날짜는 10월 28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를 주모자 중의 하나가 애인에게 털어놓았고 그 여자는 키케로에게 찾아가 이를 일러바쳤다.
키케로는 즉시 원로원을 소집했고 원로원 의원들 중에는 카틸리나의 배후로 크라수스와 카이사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별다른 증거는 없었고 10월 28일에 별다른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카틸리나는 11월 7일 암살자를 보내 키케로를 암살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에 키케로는 다시 원로원을 소집했다.
11월 8일, 로마에 있는 원로원 의원들은 집정관 키케로의 소집에 따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회의장에 모였다. 카이사르도 크라수스도 카토도, 그리고 카틸리나도 참석했다. 43세의 키케로는 처음부터 열변을 토했다. 이 연설이 유럽의 고등학생들이 한 번은 번역하는 저 유명한 '카틸리나 탄핵'이다.
“카틸리나여, 언제까지 시험할 작정인가, 우리의 인내를. 언제까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뗄 작정인가, 그대의 무모한 행위를. 다음에는 어떤 수법에 호소할 작정인가, 그대의 끝없는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그대의 음모는 이제 명백히 밝혀졌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카틸리나. 그대의 생각은 이제 누구나 다 알게 되었다는 것을. 어젯밤에 무엇을 했는가. 어디에 갔는가. 공모자 가운데 누구누구를 소집했는가. 거기서 무엇이 결정되었는가. 설마 이런 사실을 그대만 모른다고 주장할 생각은 아니렷다.
오오, 빛나는 과거여. 빛나는 전통이여. 과거의 원로원과 집정관들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대책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질서 파괴자가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곳 원로원에 참석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사실상 이미 추방되었다는 사실만은 말해두겠다. 로마를 떠나라, 카틸리나여. 공화국을 공포에서 해방하기 위해 로마를 떠나라. 나는 그대에게 한 가지만 요구하겠다. 로마를 떠나라고.(......)
유피테르 신이여, 만약에 당신의 예언에 따라 로물루스가 이 도시를 세웠다면, 우리는 당신한테 빌겠나이다. 저 카틸리나와 그의 일당을 로마에서, 로마인들의 집에서, 수도를 둘러싼 성벽에서, 포도밭에서, 재산에서, 모든 주민한테서 떼어놓아주소서."
이날 밤 카틸리나는 로마를 떠났다. 이튿날인 11월 9일에 소집된 원로원에서 키케로는 승리를 선언이라도 하듯 의기양양하게 이를 보고했다. 로마를 떠난 카틸리나는 당시 에트루리아라고 불린 오늘날의 토스카나 지방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있던 만리우스에게 갔지만, 군사행동은 아직 일으키지 않았다.
키케로는 함정 수사를 하기로 했다.키케로가 물적 증거를 손에 넣은 것은 12월 2일에서 3일로 넘어가는 한밤중이었다. 증거를 손에 넣자마자 키케로는 그 서약서에 서명한 렌툴루스, 카테고스, 가비니우스, 스타틸리우스와 또 한 사람을 합하여 다섯 명을 체포했고, 이들은 '원로원 최종 권고'에 따라 바로 사형에 처해졌다.
카틸리나는 동지 다섯 명이 처형당한 것을 알고도 행동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키케로는 ‘원로원 최종 권고’를 착착 실행에 옮겼다. 남쪽에서는 키케로의 동료 집정관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2개 군단이, 북쪽에서는 메텔루스가 이끄는 3개 군단이, 반역자로 선고된 카틸리나를 토벌하러 출정한 것이다.
카틸리나와 생사를 같이할 작정으로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3천 명가량. 카틸리나가 3천 명의 동지를 이끌고 피렌체 근처에서 아르노강을 따라 피스토이아까지 이동했으니까,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로 탈출할 작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피스토이아까지 갔을 때 그들은 로마 정규군에 포위되었다.
격전이었지만 시간적으로는 신속하게 끝난 전투였다. 몸소 적진 깊숙이 쳐들어간 카틸리나를 비롯하여 3천 명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포로가 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등에 상처를 입고 죽은 자도 없었다. 하나같이 가슴이나 얼굴이 칼에 찔려 죽었다. 기원전 62년 1월 말이었다. 이것이 ‘카틸리나 역모사건’의 결말이었다.
'위대한 폼페이우스'(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원로원파의 장로로서 원로원의 ‘제일인자’ 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인 카툴루스가 고령으로 원로원 회의에 자주 결석하자, 법무관 카이사르는 그를 직무 태만이라는 이유로 해임하고 그 대신 폼페이우스를 임명하자고 민회에 제안했다.
그러자 원로원파의 태도가 강경해졌다. 카툴루스를 해임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승리로 기세가 오른 군단과 거기에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는 시민들의 인기를 등에 업은 폼페이우스에게 원로원의 제일인자라는 권위까지 부여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폼페이우스가 오리엔트 일대를 평정한 뒤, 로마 국가의 세입도 단번에 두 배로 늘어났다. 일반 시민의 눈에 43세의 폼페이우스의 모습이 더한층 커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로마 국가로서는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원로원파의 걱정은 점점 커질 뿐이었다.
동방 원정을 마치고 이탈리아반도 남쪽 끝의 브린디시에 상륙한 뒤, 폼페이우스는 과연 ‘술라의 개혁’으로 결정된 규정을 충실히 지켜서 군단을 해산할 것인가. 아니면 특례만 인정받으면서 출세한 그답게 이번에도 20년 전에 술라가 감행한 것처럼 군대를 이끌고 수도 로마로 진군하여 독재 정치를 펼 것인가.
원로원파가 이렇게 불안에 찬 마음으로 폼페이우스의 귀국을 기다리는 가운데 원로원 의원들, 아니 로마 시민 전체의 주의를 폼페이우스에서 잠시나마 떠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스캔들
기원전 312년에 아피아 가도를 건설하여 로마 가도에 사회간접자본으로서의 의미를 처음으로 부여한 아피우스를 배출한 클라우디우스 씨족은 로마의 명문 귀족 중에서도 으뜸가는 명문으로 여겨져왔다.
이 씨족에 속하는 풀케르 가문의 우두머리는 33세의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였는데, 이 사나이가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가 죽은 뒤 카이사르가 후처로 맞아들인 폼페이아를 짝사랑했기 때문에 사건이 일어났다.
해마다 12월이 가까워지면 집정관이나 법무관 같은 국가 요직에 있는 인사들의 집에서는 여자들이 보나 여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12월 1일 밤에 열리는 이 제사는 출산을 담당하는 여신에게 바쳐지는 것이어서 여인들만 참가한다.
카이사르의 집에서도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지휘하에 그의 아내 폼페이아는 물론 로마의 상류층 부인들까지 모여서 보나 여신제를 시작하고 있었다. 여기에 여자로 변장한 클라우디우스가 몰래 숨어들었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은 로마 전체를 들썩이게 만든 스캔들이었고 카이사르는 아내와 이혼했다.
카이사르 반대파가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여장하고 침입한 젊은이는 법정으로 끌려나왔다. 그런데 증언대에 선 아우렐리아는 어두운 곳이어서 침입자가 누구였는지 알 수 없다고 대답했다. 카이사르 집안의 여자 노예들도 똑같은 증언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러자 검사역을 맡은 동료 법무관은 그렇다면 왜 폼페이아와 이혼했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이렇게 대답했다. “카이사르의 아내되는 여자는 의심조차도 받아서는 안 됩니다.”
피고측은 그날 밤 클라우디우스가 100킬로미터나 떨어진 별장에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키케로가 나서서 그날 아침에 클라우디우스는 자기 집을 방문했다고 증언하였다. 이때 크라수스가 움직였다. 로마 제일의 갑부로 경제계의 대표격인 크라수스는 경제적인 이권을 미끼로 배심원들을 매수했다.
어쨌든 판결은 유죄가 25표, 증거 불충분에 따른 무죄가 31표였다. 명문 귀족의 젊은이는 방면되었다. 그러나 이때 클라우디우스는 키케로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스캔들에서 벗어난 카이사르에게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속주를 다스리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임지로 결정된 곳은 에스파냐 남부. 그런데 에스파냐로 떠날 예정이었던 카이사르가 집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빚쟁이들이 몰려와 빚을 갚지 않으면 못 떠난다면서 농성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이사르에게는 크라수스가 있었다. 로마 제일의 갑부로 로마 경제계를 대표하는 크라수스가 보증했기 때문에 빚쟁이들도 철수했다. 카이사르 ‘총독 각하’는 겨우 임지로 떠날 수 있었다.
카이사르와 여자
카이사르는 결코 미남이 아니다. 젊은 시절부터 뺨에는 주름이 깊이 새겨져 있었고, 40대 후반부터는 머리가 눈에 띄게 후퇴하는 바람에 가운뎃부분의 머리카락까지 이마 쪽으로 끌어내려서 대머리를 감추느라 고심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세계가 그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하기 전에, 즉 40대까지의 그는 항상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었기 때문에 유복할 리도 없고, 여자의 허영심을 채워줄 만한 권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여자라는 여자는 모두 카이사르를 좋아했고, 오직 카이사르만이 자기 차례가 오기를 줄지어 기다리는 상류층 부인들을 모조리 맛보는 빛나는 영광을 누렸다. 기록에 남아 있는 이름만 열거해도 호화판이다.
카이사르의 최대 채권자인 크라수스의 아내 테우토리아. 남편이 오리엔트에 출정해 있는 동안 얌전히 집을 지켜야 했을 터인 폼페이우스의 아내 무키아. 폼페이우스의 부장(副將)으로 역시 전쟁터에 나가 있는 가비니우스의 아내 로리아. 원로원 의원의 3분의 1이 카이사르에게 아내를 ‘도둑맞았다’고 말하는 역사가도 있다.
카이사르의 애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여자는 훗날의 클레오파트라를 제외하면 세르빌리아일 것이다. 나중에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가 된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재혼을 거절하면서까지 카이사르의 애인으로 남아 있기를 고집한 여자였다.
훌륭한 남자들까지 그에게 부러움을 느끼는 것은 카이사르가 그렇게 많은 여성을 편력했는데도 그에게 원한을 품은 여자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문은 여자가 남자한테 화가 났을 때 일어난다. 그러면 여자는 왜 화가 나는가. 화가 나는 것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비결은 무엇인가.
첫째, 사랑하는 상대를 화려한 선물로 공략한 것은 여자가 아니라 카이사르 쪽이다. 카이사르가 세르빌리아에게 선물한 600만 세스테르티우스짜리 진주는 한때 로마 여인들의 화제를 독차지했다. 둘째, 카이사르는 애인의 존재를 숨기지 않았다. 그의 애인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아니, 여자의 남편까지 알고 있었으니까 비밀도 아니다.
셋째,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차례로 관계한 여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하고도 결정적으로 인연을 끊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다시 말해서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가 아내와 함께 참석한 잔치에서 옛 애인을 만났다고 하자. 평범한 남자라면 난처하게 여긴 나머지 본의 아니게 모르는 척하고 지나칠 것이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내한테는 잠깐 기다리라고 말해놓고, 당당히 옛 애인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상냥하게 잡으면서 묻는다. “어떻게 지내시오? 별고 없으시죠?” 여자가 무엇보다도 깊은 상처를 입는 것은 남자한테 무시당했을 때다.
이탈리아의 어떤 작가는 말하기를, “카이사르는 여자들한테 인기가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여자들한테 한 번도 원한을 산 적이 없는 보기 드문 재능의 소유자”라고 했다.
카이사르와 돈
고금의 역사가나 연구자들에게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또 한 가지 문제는 카이사르가 왜 그렇게 엄청난 빚을 지었는가 하는 것보다, 어떻게 그처럼 막대한 빚을 질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빚이 소액일 때는 단순한 빚에 불과하고, 채무자에게는 아무 ‘보증’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빚이 늘어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빚을 많이 지게 되면 ‘보증’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많은 빚은 채무자에게 골칫거리가 되기보다 오히려 채권자에게 골칫거리가 된다. 떼였다고 체념하기에는 액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채권자는 채무자가 파산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지원할 수밖에 없다. 총독에 임명되어 에스파냐로 떠나야 하는 카이사르가 몰려온 빚쟁이들 때문에 발목이 잡혔을 때, 보증을 서주어 떠날 수 있게 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크라수스였다. 그 후에도 결과적으로 카이사르의 출세를 도와주게 되는 것도 언제나 크라수스였다.
현대 연구자들 중에는 이 시기의 카이사르가 빚으로 발목이 잡힌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크라수스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행동의 자유를 갖고 있었던 것은 크라수스보다 오히려 카이사르 쪽이었다. 그 증거도 제시할 수 있다.
카이사르 자신이 『내전기』(內戰記)에서 이렇게 썼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대대장이나 백인대장들한테 돈을 빌려 병사들에게 보너스로 주었다. 이것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왔다. 지휘관들은 돈을 못 받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싸웠고, 총사령관의 선심에 감격한 병사들은 전심전력을 기울여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중년 시절
기원전 60년~기원전 49년 1월
마흔에 일어서다
보나 여신제가 열린 날 밤의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벌어진 재판 결과를 기다려야 했고, 또한 빚쟁이들이 관저에 몰려와 눌러앉는 바람에 발목이 잡히기도 하여, 카이사르는 예정보다 많이 늦어진 기원전 61년 봄에야 임지로 떠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먼 에스파냐’ 속주를 통치한 기간은 1년도 채 안 되었던 모양이다.
카이사르는 에스파냐에 총독으로 부임한 이후 현지의 인재를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Lucius Cornelius Balbus)다. 발부스는 에스파냐가 한니발 일가의 통치를 받고 있던 시대부터 번영한 이베리아반도 남쪽 끝의 항구도시 카디스 출신으로, 로마 시민권 소유자였다.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갈 때에도 발부스를 동행했고, 그 후에도 이 에스파냐인은 카이사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존재가 되었다. 발부스는 미묘한 움직임이 필요한 교섭에는 안성맞춤의 인재로 활약을 계속했고, 카이사르가 암살된 지 4년 뒤에는 집정관 지위에까지 올랐다.
이처럼 현지의 인재가 브레인으로서 정책을 실행하는 동안, 카이사르 자신은 군단을 이끌고 오늘날의 포르투갈에 해당하는 이베리아반도의 대서양 연안을 제패하는 데 전념했다. 이 일대의 주민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은 아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패권이 미치지 않는 지방을 정복하여 개선식을 거행할 작정이었다.
카이사르는 이처럼 필요한 일만 하고 재빨리 로마로 돌아왔지만, 그를 맞이한 로마의 분위기는 에스파냐에서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원로원파가 그렇게 우쭐해진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1년 전에 폼페이우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온 것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62년 말, 폼페이우스와 그의 10개 군단 6만 명의 병사들은 시민들의 환호와 원로원의 불안 속에서 브린디시에 상륙했다. 조숙한 군사 천재로서 20대부터 갈채와 칭찬에 익숙해진 폼페이우스는 그런 허영심 때문에 이번에도 그 자신에게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긴다. 브린디시에 상륙하자마자 군대를 해산한 것이다.
기원전 61년으로 해가 바뀐 1월 말, 폼페이우스는 50명도 안 되는 군단장과 대대장만 거느린 채 마침내 로마 성벽에 도착했다. 그리고 로마 성벽 밖에서 다음 사항을 요구했다.
1) 자신의 개선식을 해 줄것
2) 기원전 60년도 집정관에 출마하는 것을 허가해줄 것
3) 휘하 병사들에게 '퇴직금'으로 경작지를 배분해줄 것
4) 폼페이우스가 제패한 뒤 재조직한 오리엔트 속주와 동맹국 편성안을 승인해줄 것.
하지만 원로원은 개선식은 허용했지만 나머지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모두 반대하거나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더구나 개선식 전인 기원전 61년 2월 성벽 밖에 있는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에서 열린 민회 연설에서 모든 계층으로부터 냉담한 반응밖에 얻지 못해 결국 폼페이우스는 집정관에 출마하지 못했다.
게다가 아내가 카이사르와 바람을 피운 사실이 동방까지 전해졌기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귀국하는 도중에 아내와 이혼했고, 카토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고 청혼했지만 카토의 쌀쌀맞은 거절로 실패하고 말았다. 속이 뒤틀린 폼페이우스는 알바의 별장에 틀어박힌 채 수도에는 얼굴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카이사르가 기원전 60년 초에 일찌감치 로마로 돌아온 것은 그 나름대로 결심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듬해 집정관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개선식을 거행하면 그 때까지는 로마 시내에 들어올 수 없어 그 다음 해 집정관 선거에 입후보할 수 없게 된다.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포기하고 집정관에 출마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40세의 카이사르는 명분보다 실리를 택했다. 명예보다 권력을 택한 것이다. 카이사르의 입후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원로원파는 하나로 똘똘 뭉쳐 강력한 경쟁자 두 명을 추천하고, 그들의 출마도 인정했다.
'삼두정치'(트리움비라투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접촉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7년 전의 해적 소탕작전과 그 직후의 동방 원정을 앞두고 폼페이우스에게 대권을 부여하는 문제를 놓고 원로원에서 토론이 벌어졌을 때, 키케로와 함께 폼페이우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원로원파의 반대를 잠재운 사람이 카이사르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에 비밀 협정이 맺어졌다. 폼페이우스가 옛 부하들을 동원하여 카이사르의 당선을 돕는 대신, 카이사르는 집정관이 되면 폼페이우스의 옛 부하들에게 농지를 분배하고 폼페이우스가 조직한 오리엔트 재편성안을 승인한다는 협약이다. 이것으로 카이사르의 당선은 확실해졌다.
그러나 2인 연합으로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힘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 폼페이우스 쪽이 훨씬 강하다. 그래서 카이사르의 제안으로 크라수스를 끌어들여, 3인 연합으로 하게 되었다.
크라수스를 참여시키자고 폼페이우스를 설득하기는 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했고, 폼페이우스는 크라수스를 항상 자기보다 한 수 아래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경제계의 대표이다. 폼페이우스가 제패한 동방이 순조롭게 통치되느냐는 경제계의 협력에 달려 있었고, 폼페이우스 자신도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크라수스도 동방 통치에 협력하면 자기가 대표하는 ‘기사계급’의 시장이 확대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리하여 기원전 60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역사상 유명한 ‘삼두정치’가 성립되었다. 이제 막 40세를 맞이한 카이사르는 압도적인 다수표로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삼두정치’라는 새로운 체제를 수립함으로써 카이사르가 얻은 ‘개인적인 이익’은 우선 집정관 당선이었고, 두 번째는 그가 집정관 임기를 마칠 때까지 예상되는 원로원파의 반격에 맞설 강력한 ‘여당’을 확보한 것이었다. 그리고 ‘남의 이익’은 물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삼두’는 무려 반년 동안이나 모르는 채 시치미를 뗐다. 정보통을 자처하는 키케로조차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다.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포커 페이스에 완전히 당하고 말았다.
카이사르가 1등으로 집정관에 당선되자 원로원파는 여기에 경계심을 품었지만, 카이사르는 원로원파의 대변인격인 키케로에게 재빨리 손을 쓴다. 심복인 발부스로 하여금 키케로를 방문하게 한 것이다. 키케로 자신이 친구인 아티쿠스에게 쓴 편지의 일부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발부스가 와서 말하기를, 카이사르는 내 협력을 기대하고 있다더군. 자기는 무슨 일이든 키케로와 폼페이우스의 판단에 따를 작정이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도 노력할 작정이라고. 그렇게 되면 우리 원로원파는 폼페이우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고, (...) 내 노후도 평온할 텐데.”
발부스의 방문으로 당장 경계심을 푼 키케로는 계속해서 이렇게 썼다. “폼페이우스도 길들일 수 있었으니까, 카이사르 정도는 그보다 훨씬 간단히 길들일 수 있겠지.” 그러나 기원전 59년 1월 1일에 집정관에 취임한 카이사르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집정관 취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오랜만에 등장한 급진파였다. 원로원파만이 아니라 온건한 시민들도 그의 첫 번째 집정관 취임을 불안한 기색으로 맞이했다. 카이사르는 우선 이런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일부터 착수했다. 자기는 로마의 전통을 파괴하는 자가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두 명의 집정관은 군의 통수권을 하루씩 교대로 가지며, 둘 다 수도에 있을 경우에는 한 달씩 교대로 정무를 맡아보는 것이 관례인데, 카이사르는 공화정 초기에 엄격하게 지켜진 이 관례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집정관이 정무를 보지 않는 달에는 권표를 들고 다니지 못하게 했다. 이것도 전통을 되살린 사례였다.
바로 뒤이어 아무도 상상조차 못했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을 ‘집정관 통달(通達)’이라는 형태로 실현했다.
집정관 통달은 라틴어로 ‘악타 디우르나’ 또는 ‘악타 세나투스’라고 부르는데, 직역하면 ‘일보’(日報) 또는 ‘원로원 의사록’이 된다.
원로원에서 이루어진 모든 논의나 토론이나 결의를 이튿날 포로 로마노의 한쪽 벽에 써붙이는 것이다. 이때까지 원로원 회의는 배타적인 회원제 클럽 같은 것이어서, 토의나 의결은 닫힌 문 안에서 이루어졌는데, 카이사르는 그것을 공개해버린 것이다. 유권자는 정보를 얻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악타 디우르나’ 제도는 원로원에도 타격이었지만, 특히 언제나 자신의 발언을 나중에 공들여 퇴고하는 버릇이 있었던 키케로한테는 커다란 타격이었다. '일보’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카이사르는 원로원이 가지고 있던 특권 하나를 무너뜨린 셈이다.
정무를 담당하지 않는 달에도 카이사르는 쉬지 않았다. 자파 호민관인 바티니우스를 통해 호민관 입법의 형태로 법안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가 오리엔트를 평정한 뒤에 조직한 편성안은 원로원의 반대로 허공에 뜬 상태에 있었는데, 이것도 이런 방법으로 정책화했다.
율리우스 레페르토리
카이사르는 자기가 정무를 맡는 달이 되면 집정관 입법의 형태로 발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중 하나는 ‘율리우스 레페르토리’라는 법인데, 직역하면 ‘율리우스 판례법’이지만, 의역하면 ‘율리우스 공직자 윤리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로마 공직자의 행동 강령을 100여 항목에 걸쳐 규정한 법이다.
‘율리우스 공직자 윤리법’의 한 조항은 그가 세제의 공정성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보여주어, 오늘을 사는 우리한테도 새삼 그 점을 상기시킨다. 그 조항에 따라 속주에 근무하는 공무원은 납세자 명단을 공표해야 할 의무를 갖게 되었다.
각 속주의 주요 도시 두 개와 수도 로마를 합하여 세 곳에 납세자 일람표를 벽에 써붙여, 그 내용을 누구나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도록 했다. 투명하고 공명정대하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야말로 현지 담당자가 제멋대로 잣대를 휘두르는 직권 남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차례로 가해지는 타격을 원로원파도 가만히 앉아서 맞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로원파의 장로인 루쿨루스는 자신의 반대 의견이 ‘일보’를 통해 일반에게 전달되는 것도 각오하고, 카이사르가 제출한 법안에는 원로원에 대한 경시가 명백히 드러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자 집정관 카이사르는, 제3권에도 소개한 루쿨루스의 호화 만찬에 초대받은 자리에서, 루쿨루스에게 지나는 이야기처럼 속삭였다. "당신이 총독 시절에 부정을 저질렀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일찍이 술라 문하에서 제일가는 용장이었던 57세의 루쿨루스는 다음번 회의부터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농지법'
집정관 임기가 3개월째로 접어든 기원전 59년 3월, 카이사르는 드디어 숙원의 법안을 제출했다. 그것은 그라쿠스 형제 이후 줄곧 문제가 되어온 ‘농지법’이었다. ‘셈프로니우스 농지법’(렉스 셈프로니아 데 아그라리아)을 보완한 내용이었는데 다만 재분배 대상은 어디까지나 국유지에 한정된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숙원이었던 ‘농지법’을 성립시키기 위해 우선 원로원에서 가결하고 민회가 승인하는 방법을 시도했다. 원로원에 의석이 없는 호민관이었던 그라쿠스 형제나 사투르니누스와는 달리,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장이기도 한 집정관이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농지법’은 이렇게까지 원로원을 자극하지 않도록 배려했는데도 원로원 토의에서는 반대가 대세를 차지했다.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을 사수하려는 원로원파에게 ‘농지법’은 곧 반체제 운동이었다. 키케로도 반대했고, 카토는 또다시 장광설로 의사 진행을 방해하고 나섰다.
그러자 마침내 카이사르는 의원들에게 말했다. “원로원 의원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농지법’의 재판관이자 심판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원로원에서 철저한 토론을 거친 뒤 민회에 회부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렇게 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시민들의 결정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나서 카이사르는 민회 가결이라는 강행 돌파를 결심했다. 지금까지 비밀로 유지되어온 ‘삼두정치’가 로마의 햇살 아래 정체를 드러낼 때이기도 했다. 그날 민회의 의장은 집정관 카이사르가 맡았고,크라수스는 짧은 연설로 찬성의 뜻만 밝히고 연단에서 내려왔다.
마지막으로 폼페이우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연설을 맺었다. “만약 누군가가 이 법안에 칼을 들이댄다면, 이 폼페이우스가 방패가 되어 막아설 것입니다!” 이어 연단을 향해 몰려오는 군중을 보고, 비불루스를 포함한 반대파들은 거부권 발동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연단에서 곧장 집으로 도망쳐버렸다.
갈리아 총독
사실상 1인 집정관으로 국정을 담당한 기원전 59년 후반을 카이사르는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크라수스의 이익을 유도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이사르는 ‘속주법’ 가운데 하나인 징세업자법의 수정안을 제출했다. 수정안이 원로원에서 가결됨으로써 크라수스는 ‘기사계급’에 대해 면목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폼페이우스의 면목을 세워줄 차례였다.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에게 쫒겨난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폼페이우스의 옛 막료가 이끄는 군단의 호위를 받아 이집트 왕위에 복귀하면서 폼페이우스가 이집트까지 자신의 ‘클리엔테스’로 삼도록 해 준 것이다.
카이사르에게는 첫아내 코르넬리아가 낳은 율리아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율리아를 파혼시키고 폼페이우스에게 시집보냈다. 이 결혼이 화제가 된 것은 신부의 나이가 22세인데 신랑의 나이는 47세라는 나이차 때문이 아니었다. 폼페이우스가 홀몸이 된 원인이 애당초 카이사르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유력자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한테 딸을 아내로 달라고 요청했다. 장인이 되는 피소는 특별히 재능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학자 기질의 온후한 성격 덕택에 적이 별로 없었다. 카이사르에게는 이것도 물론 정략결혼이었다.
이렇게 기반을 다진 카이사르는 충실한 호민관 바티니우스를 통해 ‘카이사르의 속주 통치권에 관한 바티니우스법’을 민회에 제출했다. 당초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집정관 임기를 마친 뒤에 이탈리아의 삼림과 도로 담당자로 임명하려고 했다. 교통부 장관 겸 산림청장 같은 자리인데, 이 임무에는 군단이 필요없다.
이 법은 카이사르가 부임할 임지를 ‘삼림과 가도’ 담당에서 ‘갈리아 키살피나’(오늘날의 이탈리아 북부 지방)와 일리리아(오늘날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속주로 변경하자는 제안인데, 이번에도 카이사르는 강행 돌파를 선택했다. 민회가 소집되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찬성으로 ‘바티니우스법’은 가결되었다.
그런데 그 후 한 달도 지나기 전에 ‘갈리아 트란살피나’ 총독이었던 메텔루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카이사르는 이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속주 통치권에 관한 바티니우스법’의 수정안이 제출되었다. 카이사르의 임지에 ‘갈리아 트란살피나’를 추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리하여 카이사르는 세 개나 되는 속주의 최고 책임자를 맡게 되었다. ‘바티니우스법’에 따르면 42세의 카이사르가 갖게 될 권한은 다음과 같았다.
1. 이탈리아 북부와 일리리아 및 프랑스 남부 등 3개 속주의 총독.
2. 임기는 5년.
3. 군사력은 3개 군단과 프랑스 남부에 주둔해 있는 1개 군단을 합하여 4개 군단.
4. 막료 전원의 임명권.
'수족'의 확보
카이사르가 우선 해두어야 할 첫 번째 일은 갈리아에 부임한 뒤에도 로마 정계를 원격 조종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해두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58년의 집정관도 ‘삼두’의 담합으로 결정되었다. 카이사르의 장인이 된 피소와 폼페이우스의 오른팔인 가비니우스였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볼 때 그들의 충성심에는 문제가 없어도 그들의 정치력에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정치력으로 보자면 ‘삼두’의 일원인 크라수스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이런 상태에서 원로원파의 선봉장인 카토한테도 대항할 수 있을 만큼 젊고, 키케로를 위협할 만한 정력도 갖춘 행동가가 필요했다.
이 임무에 꼭 알맞은 젊은이가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였다. 3년 전 보나 여신제가 열린 날 밤의 스캔들 사건으로 인해 키케로한테는 깊은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 풀케르가 다음에 노린 것은 호민관 자리였다.
귀족은 호민관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귀족의 지위를 버리고 평민의 양자가 되어 호민관 선거에 출마하는 전대미문의 스캔들을 일으켰다. 이렇게 귀족이 평민의 양자가 되려면 로마에서는 우선 최고 제사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최고 제사장만은 종신직인데, 3년 전부터 그 자리는 카이사르가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카이사르라도 이런 일은 인정하지 않을 거라는 원로원파의 기대는 깨끗이 빗나가고 말았다. 카이사는 이를 허가했고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라는 평민식 이름으로 바뀌어 호민관으로 선출되었다.
『갈리아 전쟁기』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8년 동안 전개된 갈리아 전쟁을 서술할 때, 이 전쟁의 주인공 카이사르가 직접 쓴 『갈리아 전쟁기』를 참고하지 않고 서술할 수 있는 사람은 고금을 막론하고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갈리아 전쟁기』는 참고사료가 아니라 기본사료다.
키케로가 말했듯이, ‘알몸이고 순수한’ 문체의 『갈리아 전쟁기』는 머리말도 도입부도 없이 다짜고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갈리아는 그 전체가 셋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에는 벨가이(벨기에인), 두 번째에는 아퀴타니(아키텐인), 세 번째에는 그들 말로는 켈타이(켈트인), 우리 말로는 갈리(갈리아인)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여기서 카이사르가 갈리아라고 부른 지방은 라인강을 경계로 서쪽에 펼쳐진 지방이니까, 오늘날의 프로방스 지방을 제외한 프랑스 전역,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남부, 독일 서부, 그리고 스위스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즉 후세의 서유럽이다.
그리스인들이 세운 도시 마실리아(오늘날의 마르세유)가 건재하는 남부의 갈리아인들은 완전히 로마에 동화되어 로마식으로 머리를 짧게 자르게 된 반면, 중부와 북부의 갈리아인들은 여전히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어서 로마인들은 그들을 ‘갈리아 코마타’(장발의 갈리아)라고 불렀다.
이 ‘장발의 갈리아’를 위협하는 존재는 동쪽에 있었으니, 라인강 동쪽의 울창한 숲속에 살고 있는 게르만인이 바로 그들로, 우리가 오늘날 게르만족이라고 부르는 민족의 조상이다. 라인강 동쪽(게르마니아)은 서쪽(갈리아)과 달리 기후가 혹독해서, 계속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할 만한 식량을 조달할 수단이 충분하지 않았다.
야만족이 라인강을 넘어 쳐들어오는 이른바 ‘오랑캐 침입’은 식량 조달이 어려워질 때마다 되풀이되는 상례 행사처럼 되어 있었다. 게르만인은 갈리아인끼리의 싸움을 이용하여, 마치 종이에 떨어진 잉크가 번지듯 라인강 서쪽으로 침투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를 견딜 수 없게 된 갈리아인 부족이 레마누스(오늘날의 레만호) 동쪽의 헬베티아에 둥지를 틀고 있던 헬베티족이다. 헬베티아라는 호칭은 오늘날에도 스위스를 가리킬 때 쓰인다. 게르만인과 싸워서 패배한 이들은 동쪽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떠밀리듯 갈리아 서쪽 끝의 브르타뉴 지방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부족 전체의 대이동이다. 이웃 약소 부족까지 동행하여 아녀자들까지 포함한 총인원은 36만 8천 명. 이들 가운데 전사(戰士)로 출전할 수 있는 청장년 남자는 9만 2천 명이었다. 이동 준비는 2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나중에 미련이 남지 않도록, 12개나 되는 도시와 400개에 이르는 촌락을 모두 불태우고 떠났다.
그들은 로마 속주 총독에게 허가를 요청했고 총독으로 부임할 카이사르가 거부했는데도 이주를 단념할 수 없었던 헬베티족은 제네바에서 곧장 서쪽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이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들의 이동 방향에 살고 있는 하이두이족을 비롯한 다른 갈리아 부족과의 사이에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헬베티족은 제네바에서 로다누스(오늘날의 론 강)를 따라 남하한 뒤, 로마 속주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들어가서 아르베르나를 거쳐 브르타뉴로 가는 경로를 가기 위해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총독 임지로 떠나기 전에 로마에서 이곳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