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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Oct 30. 2024

로마인 이야기 5권 (1)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 루비콘강을 건너 폼페이우스를 꺾기까지

제6장 원숙기
기원전 49년 1월~기원전 44년 3월
(카이사르 50세~55세)
“누구나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현실밖에 보지 않는다.“
- 카이사르


'루비콘' 직후


루비콘강을 건넌 뒤 국경 도시 리미니(Rimini)까지는 직선거리로 15킬로미터에 불과하다. 로마의 중앙정부는 여기에 1개 대대(600명) 규모의 경비대조차 두지 않았다. 이곳 리미니에 카이사르와 그 휘하의 제13군단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입성했다. 카이사르 휘하에 있는 병력은 제13군단 10개 대대뿐이었다.

[루비콘강을 건너는 카이사르]

이 정도 병력으로, 더구나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한겨울에 국법을 어기고 루비콘강을 건너는 따위의 무모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는 게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그 예상을 뒤엎는 행동으로 나왔고, 그렇기 때문에 국법을 어긴 뒤의 행동에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카이사르는 자기 휘하로 돌아온 안토니우스에게 전체 병력의 절반이나 되는 5개 대대를 떼어준 뒤, 아펜니노산맥을 넘어 아레초를 공격하게 했다. 그의 휘하에 새롭게 들어온 쿠리오에게는 3개 대대를 떼어준 뒤, 아드리아해를 따라 남하하는 길목에 염주처럼 늘어서 있는 페사로·파노·안코나를 차례로 공략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나머지 2개 대대와 함께 리미니에 남았다.


아레초 공략은 수도 로마에서 북쪽으로 가는 간선도로의 하나인 카시아 가도를 장악하는 것을 의미했고, 페사로·파노·안코나를 수중에 넣는 것은 수도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간선도로인 아피아 가도를 시야에 넣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리미니를 확보하는 것은 로마에서 북쪽으로 가는 간선도로의 하나인 플라미니아 가도를 장악하는 것을 의미했다.

[리미니 출처 구글 이미지]

이때 원로원 결의를 카이사르에게 전달하기 위한 공식 사절 두 명이 수도 로마에서 리미니에 도착했다. 현직 법무관 로시우스와 카이사르의 동생뻘인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가져온 통보는 1월 7일 원로원 회의에서 의결된 ‘원로원 최종권고’였다.


폼페이우스도 루키우스를 통해 카이사르에게 사신(私信)을 보냈다. 사사로운 감정이나 원한보다는 국익을 우선해야 하고, 분노에 사로잡혀 반국가적인 행동으로 치달으면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신에 대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게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안했다.

첫째, 당신은 임지인 에스파냐로 떠날 것.
둘째, 당신도 나도 휘하 군단을 해산하여 이탈리아를 비군사화하고, 그로써 국가 로마를 평상시의 정치체제로 돌려놓을 것.
셋째, 이상의 두 가지 방안에 관심이 있다면, 양자 회담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러나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지고 리미니를 떠난 로시우스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플라미니아 가도를 급히 남하하여 수도에 도착했을 때, 로마에는 편지를 건네받을 사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폼페이우스도, 현직 집정관 두 사람도, 원로원의 대다수 의원도 수도 로마에서 달아나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 수도를 포기하다


전시가 아닌 한 수도에는 수비군을 두지 않는 것이 관례인 로마에서는 폼페이우스도 두 집정관도 ‘맨주먹 상태’였다. 원로원이 카이사르의 후임자로 임명한 에노발부스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이제 막 군단 편성에 착수한 단계였다. 루비콘강을 건넌 카이사르에 대해 전투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군단은 시리아에 파견한다는 구실로 카이사르한테서 빼앗아둔 카푸아의 2개 군단뿐이었다.


1월 17일, 폼페이우스는 수도를 버리고 떠났다. 현직 집정관인 마르켈루스와 렌툴루스도 확고한 카이사르 반대파였기 때문에, 그토록 믿었던 폼페이우스가 떠나버린 로마에 그대로 남아 있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들은 둘 다 폼페이우스가 떠난 이튿날 당장 수도를 떠났다. 로마에 남는 의원은 카이사르파로 간주하겠다는 협박이 효과를 거두어 상당수 원로원 의원도 두 집정관과 동행하게 되었다.


로마에 도착해 보니 모두 탈출한 뒤여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뒤따라온 것은 라비에누스도 마찬가지였다. 폼페이우스파는 카이사르의 ‘오른팔’이 자기 진영에 가담한 것을 뛸 듯이 기뻐했다. 로마에서 탈출하긴 했지만 좀처럼 태도를 결정하지 못한 키케로는 이틀 동안만 집정관 일행과 동행했을 뿐, 도중에 그들과 헤어져 아피아 가도 연변에 있는 포르미아의 별장에 틀어박혀버렸다.


카이사르는 수도로 가지 않았다. 폼페이우스와 두 집정관이 수도에서 탈출했다는 정보를 어느새 입수한 카이사르는 그들을 앞질러 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안토니우스와 쿠리오에게 합류할 것을 명령해놓고, 아드리아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2월 3일, 카이사르는 안코나에서 남쪽으로 10킬로미터쯤 떨어진 오시모에 입성했다. 안코나보다 더 남쪽으로 진격하려면 카이사르가 직접 나설 필요가 있었다. 이 일대는 ‘파트로네스’인 폼페이우스와 집안 대대로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는 ‘클리엔테스’들이 많이 사는 지방이다.


이틀 뒤인 2월 5일, 카이사르는 어느새 오시모에서 40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페르모에 들어가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기반으로 진격하는 작전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에 소집해둔 2개 군단 가운데 제12군단이 갈리아 중부의 월동지에서 먼 길을 지나 마침내 페르모에 도착했다. 카이사르는 지금까지 거느리고 있던 제13군단과 새로 합류한 제12군단을 이끌고 아스콜리피체노로 행군했다. 아스콜리피체노 공략도 간단히 끝났다. 카이사르가 진격해오는 것을 안 렌툴루스가 허둥지둥 도망쳐버렸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진로와 폼페이우스의 퇴로 출처 본문]

코르피니오 입성


폼페이우스가 급파한 비블리우스 루푸스는 13개 대대나 되는 나머지 병력을 긁어모아 코르피니오로 데려갔다. 카이사르 대신 갈리아 속주 총독에 임명된 에노발부스가 20개 대대를 이끌고 코르피니오에 도착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코르피니오 산펠리노 성당 출처 구글 이미지]

이 무렵, 북부 갈리아에 있던 제8군단이 카이사르와 합류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 이탈리아에 들어왔다. 이 군단이 합류하면 카이사르의 전력은 3개 군단이 되고, 대대로는 30개 대대가 된다.


불안해진 에노발부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전령을 보내 지원군을 요청했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코르피니오로 간 것을 안 폼페이우스는 코르피니오를 향해 북상하기는커녕 루체라에서 남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카노사로 남하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었다.

[카노사성 출처 구글 이미지]

2월 15일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된 카이사르군의 공격 준비는 그 후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럭저럭하는 동안 제8군단에 이어 남프랑스 속주의 갈리아인으로 구성된 ‘종다리 군단’ 22개 대대도 도착했다.


폼페이우스는 코르피니오에서 카이사르를 맞아 싸우기로 결정한 것은 자신의 전략이 아니라 에노발부스가 제멋대로 결정한 것이라면서 지원군 파병 요청을 거부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수비군을 데리고 코르피니오에서 철수하여 자기와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마침내 병사들은 에노발부스를 포위하여 사로잡은 다음, 카이사르에게 대표를 보내 자신들의 뜻을 전했다. 성문을 열고, 카이사르의 명령에 복종하고, 에노발부스를 넘겨줄 용의가 있다고.


이튿날인 2월 21일 아침, 카이사르는 우선 코르피니오 시내에 있는 요인들과 그 가족들을 데려오게 했다. 카이사르는 몇 마디 하고 나서 그들을 모두 석방했다. 병사들은 카이사르 밑에서 싸우겠다고 스스로 서약했기 때문에 카이사르 휘하에 편입되었다. 그날 오후에 이미 카이사르는 다시 남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 본국을 포기하다


현직 집정관 두 명과 상당수 원로원 의원을 포함한 폼페이우스파 일행은 코르피니오가 카이사르에게 함락된 지 나흘 뒤인 2월 25일에는 그리스로 건너가는 주요 항구인 브린디시에 도착했다. 이를 예상한 카이사르가 코르피니오를 손에 넣자마자 당장 남진을 다시 서두른 것은 폼페이우스와의 대결을 본국 안에서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참병으로 구성된 제8군단·제12군단·제13군단에 ‘종다리 군단’과 폼페이우스군 투항병을 합하여 브린디시로 향하는 카이사르군은 6개 군단으로 늘어나 있었다.


3월 4일, 브린디시에 도착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는 수도를 버린 데 이어 본국까지 버렸다. 그런데 3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한꺼번에 수송할 선박을 모을 수 없었고, 충분한 배가 모이기를 기다릴 마음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두 패로 나뉘어 이탈리아를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두 집정관이 먼저 30개 대대를 이끌고 떠났다.


닷새밖에 지나지 않은 3월 9일, 카이사르도 브린디시에 도착했다. 브린디시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맨 먼저 지시한 것은 진영지 건설이었고, 그 일이 끝나자마자 항구를 봉쇄하는 공사를 명령했다. 폼페이우스가 떠나지 못하도록 방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3월 17일, 해가 지기를 기다려 20개 대대를 배에 태운 폼페이우스는 한밤중에 집단적인 저지선 돌파를 감행했다. 카이사르 진영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제방에서 선단의 출항을 방해하려고 애썼지만, 대형 선박이 잇달아 돌파하는 것까지는 도저히 저지할 수가 없었다.

[브린디시 출처 구글 이미지]

대전략


로마의 패권 아래 있는 ‘로마 세계’는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 서쪽으로는 지브롤터해협, 북쪽은 라인강과 그 연장선상에 있는 북해, 남쪽은 사하라사막을 경계로 하는 광활한 영역을 갖고 있었다. 그 중심에 그 이름에 어울리는 지중해가 있다.


폼페이우스는 해적소탕작전으로 지중해에 ‘팍스 로마나’(로마 주도의 평화)를 확립했기 때문에 지중해 일대의 ‘파트로네스’가 되어 있었다. 바꿔 말하면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은 그의 ‘클리엔테스’가 된 셈이다. 또한 폼페이우스가 오리엔트를 제패한 뒤에는 오리엔트 나라들이 그의 ‘클리엔테스’가 되었다.


카이사르도 갈리아를 제패하여 갈리아 부족들과 ‘파트로네스-클리엔테스’ 관계를 수립했지만,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로는 우선 2억 세스테르티우스의 속주세를 낼 수 있을 만큼 물산이 풍부한 소아시아와 시리아, 경제력에서는 그에 뒤지지 않는 그리스와 팔레스타인과 이집트가 있다. 그에 비하면 가난하지만 병력 제공 능력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에스파냐도 폼페이우스가 현직 총독이기 때문에 그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에 해적소탕작전 이후 그의 ‘클리엔테스’가 된 마르세유를 비롯한 항구도시들이 추가된다. 이런 ‘바다의 클리엔테스’는 ‘파트로네스’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선박 제공을 요청하고 기지로 사용할 수 있는 존재였다.


본국에서는 일단 탈출했지만, 폼페이우스의 머릿속에는 웅대한 전략이 있었다. 동쪽의 오리엔트와 서쪽의 에스파냐와 남쪽의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와 갈리아에 기반을 둔 카이사르를 포위 공격한다는 구상이었다. 폼페이우스는 바다까지 지배했기 때문에 그것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폼페이우스가 떠난 지 이틀 사이에 이런 문제들에 대한 지시를 끝낸 카이사르는 브린디시에서 아피아 가도를 따라 수도 로마로 출발했다. 고참병 군단이 그 뒤를 따랐다. 기원전 49년 3월 19일인 이날부터 내전 제2막이 시작되었다. 카푸아에 입성한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원 모두에게 4월 1일 수도에서 원로원 회의를 소집한다는 통보를 보냈다. 그렇게 해놓고 다시 아피아 가도를 따라 북상하기 시작한 카이사르가 도중에 딱 한 군데 들른 데가 있었다.


키케로 대책


카이사르가 진격하고 폼페이우스가 후퇴하고 있다는 소식은 바닷가 별장에 틀어박힌 키케로의 귀에 상세히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 키케로에게 아피아 가도를 따라 북상하고 있는 카이사르의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이 편지를 받고 키케로는 깜짝 놀랐다.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로 떠나버렸고, 이탈리아 안에서 현재 군사력을 갖고 있는 것은 카이사르다. 그런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키케로의 별장이 있던 포르미아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키케로는 로마에 가지 않겠다고 카이사르에게 회신했다. 그러자 카이사르의 키케로 방문은 이로부터 사흘 뒤에 실현되었다. 길을 서두르고 있는 카이사르는 군장도 풀지 않았고, 키케로도 원로원 의원에게 허용되어 있는 붉은 테두리 장식을 댄 하얀 토가 차림으로 그를 맞았을 것이다.


카이사르: ‘당신이 로마로 가지 않겠다는 것은 내 행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다른 원로원 의원들한테도 영향을 준다는 건 알고 있겠지요?‘

키케로: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소. 원로원은 에스파냐에 있는 폼페이우스 휘하의 세 장수에게 카이사르가 군대를 보내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폼페이우스가 달아난 그리스로 군대를 파견하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고. 그리고 폼페이우스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나는 개인적으로 깊이 슬퍼한다고.’

카이사르: ‘오오, 아니 되오.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원치 않소.’

키케로: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소. 하지만 그 때문에도 나는 로마에 가고 싶지 않소. 나로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원로원에 출석한 그대가 잠자코 들을 수 없다는 말까지 하는 상태가 되면 어떻게 하겠소? 그러니 나는 안 가는 게 좋겠소이다.’


카이사르가 키케로를 방문한 속뜻은 키케로가 로마에 가는 것을 막으려는 데 있었다. 입으로는 로마에 가서 원로원 회의에 참석해달라고 했지만, 실제 의도는 키케로가 원로원 회의에서 발언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로마 최고의 지식인인 키케로가 보기 좋게 넘어가버렸다. 게다가 그는 자기가 카이사르의 꾀에 넘어간 것을 전혀 의식하지도 못했다.


수도 로마


기원전 49년 4월 1일, 로마에서는 원로원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회의는 전직 집정관(프로콘술)인 속주 총독 카이사르가 참석할 수 있도록 성벽 밖에 있는 신전 회랑에서 열렸다. 군대를 가질 권리가 있는 전직 집정관은 로마 시내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국법이었기 때문이다.


군단도 로마 근교에 대기시킨 채 ‘맨주먹’으로 회의장에 참석한 카이사르는 우선 국법을 어기고 루비콘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설명했다. 또한 루비콘강을 건넌 뒤에도 폼페이우스와 대화를 하려고 노력한 사실도 이야기했다. 게다가 자기가 원한 것은 특별한 권리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헌신한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인정받아야 할 권리에 불과했다고 변명했다.


그리고 원로원 의원들에게 자기와 함께 공화국 로마의 국정을 담당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렇게 못을 박아두었다.

“그대들이 내 요청을 외면한다 해도, 나는 이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지는 않을 것이오. 국정은 나 혼자서라도 처리해나가겠소.”


사르데냐와 시칠리아라는 양대 곡창을 수중에 넣은 이상 본국에 대한 식량 확보는 일단 걱정을 덜게 된 셈이다. 또 다른 밀 산지인 북아프리카 속주가 남아 있었지만, 카이사르는 그 일을 시칠리아 공략에 성공한 쿠리오에게 맡겼다. 쿠리오는 시칠리아에 데려간 병력을 이끌고 준비가 갖추어지는 대로 아프리카로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내정이라는 가장 중요한 임무는 법무관 레피두스에게 맡겼다. 레피두스는 술라가 죽은 뒤 ‘민중파’를 내걸고 봉기했다가 어이없이 패배한 기원전 78년도 집정관 레피두스의 아들로서, 원래부터 카이사르파였다. 나중에 안토니우스 및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의 ‘한 머리’가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국방 책임자로는 호민관 안토니우스를 임명했다. 그 역시 나중에 ‘제2차 삼두정치’의 ‘한 머리’가 된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와 병립하는 형태로 두 젊은이에게 아드리아해의 제해권을 빼앗는 임무를 맡겼다. 하나는 호민관 안토니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이고, 또 하나는 명문 귀족 출신인 돌라벨라였다. 돌라벨라는 키케로의 외동딸의 남편이었다. 하나뿐인 사위까지 카이사르한테 달려간 것을 키케로는 탄식해 마지않았다.


계절은 아직 4월 초순이었다. 실제 달력으로는 3월이 될까 말까 한 시기다. 전투에 적합한 계절은 앞으로 반년이다. 카이사르는 이미 이 계절을 ‘서쪽을 치는’ 데 사용하기로 작정해놓고 있었다. ‘갈리아 트란살피나’(알프스 저쪽의 갈리아) 속주에 주둔해 있는 6개 군단에도 에스파냐로 남하하라는 명령을 내려놓았다.


서쪽을 치다


카이사르는 내전 제2막이라고 해도 좋은 지중해 서부 전투에는 그와 함께 루비콘강을 건너 이탈리아 제패를 실행한 3개 정예 군단을 데려갔다. 중북부 갈리아에서 겨울을 난 6개 군단에도 출동명령을 내렸으니까,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을 함께 치른 군단을 모두 투입하여 에스파냐의 폼페이우스 세력을 소탕할 작정이었다.

카이사르가 지중해 서부 제일의 항구도시로 번영하고 있는 마르세유에 도착한 것은 4월 19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문을 열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으로 제패한 중북부 갈리아의 경제활동을 활성화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 최선봉에 선 것은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그리스계 로마인이었다. 이들은 그리스인의 피를 이어받아 경제적인 재능이 뛰어난데다 로마 시민의 특권도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 줄곧 중북부 갈리아와의 통상을 독점해온 마르세유에는 강력한 경쟁자가 출현한 셈이다. 독점시장을 침해당했다고 생각한 마르세유인들은 카이사르를 좋게 여기지 않았다.


마르세유 공방전


무력 충돌이 일어날 것을 내다본 마르세유는 식량과 무기를 충분히 비축해두었고, 전투요원도 외부에서 충분히 보충해두었다. 조속한 해결을 바란 카이사르의 생각과는 반대로, 공방전은 점점 장기화 양상을 띠게 되었다. 폼페이우스도 ‘클리엔테스’에 대한 ‘파트로네스’의 책무를 충실히 지켜 에노발부스를 사령관으로 하는 지원군을 보냈다.

[마르세이유 출처 구글 이미지]

마르세유 공방전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날 무렵, 카이사르는 에스파냐에서 폼페이우스 군대와 대결하는 것을 더 이상은 늦출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에스파냐로 데려갈 작정이었던 트레보니우스 휘하의 3개 군단을 마르세유에 남겨두고, 이 3개 군단에 육지 쪽 공격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바다 쪽 공격은 갈리아 원정 때 대서양 연안의 베네티족을 격파함으로써 해전 전문가로 알려지게 된 데키우스 브루투스에게 맡기기로 했다.


카이사르 자신은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3개 군단과 기병 900기를 이끌고 마르세유를 떠나 서쪽으로 향했다. 나르본을 지나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바르셀로나에서 서쪽으로 13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레리다에 도착한 것은 6월 22일이었다. 여기서 파비우스가 지휘하는 3개 군단과 합류했다.


에스파냐 전쟁


카탈루냐 지방에 속하는 도시 레리다는 피레네산맥에서 발원한 세그레강이 에브로강으로 흘러드는 지점에서 북쪽으로 4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 도시 자체는 고지대에 있고, 동쪽을 흐르는 세그레강에는 로마식의 튼튼한 돌다리가 걸려 있었다. 이 돌다리는 로마의 기지 타라고나로 이어지고, 마르세유와 남프랑스 속주와도 이어져 있었다. 폼페이우스 진영이 에스파냐의 관문이라 해도 좋은 이곳에서 맞아 싸우려 한 것도 당연하다.

[레리다 출처 구글 이미지]

사령관격인 아프라니우스와 부사령관격인 페트레이우스는 모두 원숙기에 이른 노련한 장수다. 또한 에스파냐 남부에는 바로가 2개 군단과 함께 주둔해 있었다. 무명(武名)보다 문명(文名)이 높은 바로는 올해 67세이다.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9만 명에 가까운 전력을 거느렸기 때문에 시내에서 카이사르를 기다릴 수는 없어 레리다에서 남쪽으로 1킬로미터 떨어진 고지대에 진영을 세웠고, 레리다와 연결된 돌다리를 확보했다.


이때 카이사르가 3개 군단을 거느리고 도착했다. 기원전 49년 6월 22일이었다. 카이사르는 레리다 앞을 그대로 지나, 고지대에 포진하고 있는 적 앞에 나타나 싸움을 걸었다. 카이사르의 진짜 의도는 쉽사리 함락될 것 같지 않은 레리다와 아프라니우스의 진영 사이를 차단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이때 세그레강물이 또다시 불어나 세그레 강 상류에 설치한 두 개의 목재 다리가 모두 토사가 섞인 급류에 떠내려가버렸다.


이렇게 되면, 탁류에도 꿈쩍하지 않은 레리다 근처의 돌다리를 사용할 수 있는 적이 보급면에서는 단연 우위에 서게 된다. 카이사르 진영은 45킬로미터 간격을 두고 흐르는 세그레강의 두 지류 사이에 끼인 삼각주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류는 둘 다 소용돌이치는 탁류 때문에 건널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상태였다. 갈리아에서 식량을 싣고 온 보급부대도 강 건너편에서 오도가도 못한 채 쩔쩔매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비는 사정없이 계속 퍼부었다.


카이사르 진영의 곤경을 알아챈 적진은 환호성으로 폭발할 지경이었다.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카이사르, 출구가 없는 상태. 싸움은 우리가 이긴 거나 마찬가지”라는 급보를 수도 로마와 그리스의 폼페이우스에게 보냈다.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파도 흥분으로 들끓었겠지만, 수도 로마에서는 이제까지 중립을 가장하던 원로원 의원들이 이 소식을 듣고 태도를 결정했다. 이때 비로소 키케로는 폼페이우스에게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카이사르 부대는 브리타니아에서의 경험을 살려 30킬로미터 상류에 작은 배를 연결한 다리를 완성했다. 남프랑스와 연락이 트이자마자 승전보가 전해졌다. 6월 28일에 벌어진 해전에서 데키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카이사르 함대가 에노발부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마르세유 연합 함대에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이었다. 카이사르 진영에서는 오랜만에 환성이 울려퍼졌다.


역전


날마다 탁류가 소용돌이치는 강물을 바라보던 카이사르는 이 자연에 맞서서 다리를 놓는 고생을 계속하기보다는 자연의 추세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사기가 오른 병사들은 총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새로운 토목공사에 착수했다. 그것은 운하를 파는 공사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러 개였다. 각 운하의 너비는 9미터 안팎. 세그레강의 지류로 카이사르 진영을 위기에 빠뜨린 슈리스강의 물길을 바꾸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다.


카이사르 쪽의 운하공사가 끝나면, 이번에는 그들의 보급로가 차단당하게 된다. 게다가 보급로 차단으로 궁지에 빠지는 정도는 그들 쪽이 훨씬 크다. 카이사르 진영은 3만 명인 반면, 그들은 9만 명의 배를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 진영의 두 장수는 남쪽으로 철군하기로 결정했다. 철군은 7월 25일에서 26일로 넘어가는 한밤중에 결행되었다.


이렇게되자 카이사르의 목표는 적군의 에브로강 도하를 저지하는 것이 되었다. 카이사르군은 밤낮없이 행군을 계속했다. 레리다에서 에브로강까지 40킬로미터의 거리에 승부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강행군한 보람이 있어 에브로강 앞에서 적을 따라잡았다.


항복


카이사르군에 의해 앞이 막히자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다시 진영을 버리고 레리다쪽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진영이 비록 안전하긴 할망정 비축 식량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고, 물을 구하는 것은 아예 절망적이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퇴각과 카이사르군의 추격이 시작되었다.


폼페이우스 군대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궁지에 몰렸다. 이제 마실 물조차 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카이사르는 기다렸다. 전투에 호소하기보다는 물도 없는 상태에서 고생하는 적이 투항해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결국 적이 강화를 요청해왔다. 이에 대해 카이사르는 대답했다.

“내 조건은 단 하나, 아프라니우스 휘하 군대는 에스파냐 속주에서 나가서 해산하라는 것뿐이다. 이것이 실현된다면 누구의 목숨도 빼앗지 않겠다.”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를 비롯한 장수들에게는 거취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둘 다 폼페이우스가 있는 그리스로 떠나는 쪽을 선택했다. 그날은 기원전 49년 8월 2일이었다. 카이사르는 레리다 전쟁터에 도착한 지 한 달 일주일 만에, 그리고 그가 주도권을 쥔 뒤 불과 일주일 만에 에스파냐의 폼페이우스 군대를 해체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레리다 전투 후


그 후 카이사르는 9월 17일에 에스파냐 남쪽 끝의 카디스에 도착했고, 여기서 해로를 따라 북상하여 타라고나에 입성한 것은 9월 25일이었다. 2개 군단과 함께 에스파냐 남부를 지키던 바로는 카이사르가 접근하자 싸워보지도 않고 투항했다. 카이사르는 그에게도 거취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바로도 아프라니우스나 페트레이우스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에게 가는 쪽을 택했다.


이리하여 7개 군단이나 되었던 에스파냐의 폼페이우스 군대는 모두 해체되었다. 이것은 동쪽·서쪽·남쪽 세 방향에서 카이사르를 포위한다는 폼페이우스의 웅대한 전략이 서부 전선에서 틀어져버린 것을 의미했다.


에스파냐를 제압한 카이사르가 마르세유로 돌아온 것은 10월 중순이었다. 마르세유 공방전은 무르익은 과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7월 31일에 벌어진 두 번째 해전에서도 데키우스 브루투스가 이겼고, 패장 에노발부스가 도망친 뒤로는 마르세유 함락도 시간문제였다.


10월 25일, 마르세유도 마침내 함락되었다. 카이사르는 항복한 마르세유 사람들에게도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 주민을 노예로 삼지도 않았고 시내 약탈도 허용하지 않았다. 다만 도시국가 마르세유가 주변에 갖고 있던 영토는 대부분 몰수하여 남프랑스 속주에 편입시켰다. 마르세유도 아테네나 스파르타처럼 내정의 자율성을 인정받는 자치도시가 되었다.


북아프리카 전선과 아드리아해에서의 패배


카이사르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로마 세계의 서방 장악을 이룩했지만, 이 무렵 처음으로 본격적인 손실을 입게 되었다. 그것은 남쪽, 즉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입은 손실이었다.


로마의 곡창이라고까지 불리던 시칠리아섬을 제패하기 위해 카이사르는 쿠리오에게 4개 군단을 주었다. 그리고 시칠리아 제패를 달성한 뒤에는 이 병력을 이끌고 폼페이우스파 장수가 총독을 맡고 있는 아프리카 속주(오늘날의 튀니지)로 진격하라고 명령해두었다.


기원전 49년 8월 11일, 쿠리오가 이끄는 2개 군단과 기병 500기가 북아프리카에 상륙했다. 그런데 유바 왕이 직접 지휘하는 누미디아군 본대가 있었다. 유바 왕은 코끼리 60마리와 기병 2천 기, 보병 1만 명을 이끌고, 누미디아군 기병 2천은 좌우 양쪽으로 우회하여 쿠리오 군대를 포위하여 무참히 짓밟았다.

[유바 1세와 누미디아인 출처 구글 이미지]

결국 쿠리오는 30대에 갓 접어든 젊은 나이에 장렬히 전사했다. 쿠리오 휘하의 3.5개 군단 2만 명에 이르는 로마 보병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몰살당했다. 이 패배는 남쪽에서 이탈리아로 쳐들어올 수 있는 거점을 폼페이우스 쪽에 내준 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편 카이사르는 돌라벨라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에게 20개 대대 1만 2천 병력을 내주고, 아드리아해의 제해권을 탈취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겼는데, 역시 아드리아해를 카이사르에게 넘겨줄 수 없는 폼페이우스 역시 ‘리보’라는 50대의 역전의 용사를 내보냈고, 리보는 바다에서 돌라베라와 안토니우스의 함대를 궤멸시켰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출처 구글 이미지]

카이사르는 이 패배로 9천 명이나 되는 병사와 40척의 배를 잃었을 뿐 아니라, 아드리아해의 제해권을 빼앗는 데에도 실패했다. 아드리아해의 맞은편 연안을 확보하고 기다리는 폼페이우스를 공격하기에는 참으로 불리한 정세가 된 셈이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 난관에서 다른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아냈다.


카이사르, 집정관이 되다


로마로 간 카이사르는 법무관 레피두스로 하여금 카이사르를 독재관에 지명한다는 법안을 제출하게 했다. 이것은 술라가 사용한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이 법안은 민회에서 가결되어 카이사르는 독재관에 취임했다. 집정관이 둘 다 수도를 비우는 경우에는 독재관이 차기 집정관 선출을 위한 민회 소집권까지도 갖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이 권리를 행사하여 집정관 선출을 위한 민회를 소집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48년도 집정관에 입후보한 사람이 몇 명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쨌든 자신이 소집하고 자신이 의장을 맡고 자신이 입후보한 민회에서 1위로 당선한 카이사르는 두 번째로 집정관에 취임했다.


그리고 12월 13일,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병사들이 집결해 있는 브린디시로 떠났다. 그가 수도 로마에 머문 기간은 단 열흘에 불과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에 취임함으로써 정통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고, 통수권도 정당화된 상태에서 폼페이우스를 격파하러 갈 수 있게 된 셈이다. 이것도 역시 불리함을 유리함으로 단번에 역전시켜버리는 카이사르의 역량을 보여주는 사례다.


폼페이우스와의 결전


전력 비교


카이사르는 『내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폼페이우스는 전투할 필요도 없고 다른 적들의 방해에 시달리지도 않은 채, 꼬박 1년을 전투 준비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를 버린 폼페이우스는 마르세유나 에스파냐를 지원하는 데에는 소극적이었지만, 그리스 땅에서 카이사르를 맞아 싸울 준비는 착실히 추진하고 있었다.


병사의 양은 폼페이우스 진영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질은 카이사르 진영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카이사르 진영의 10개 군단 중 제8군단·제9군단·제10군단·제11군단·제12군단의 5개 군단은 갈리아 원정 첫해부터 카이사르와 함께 싸운 병사들이다.


해상 전력은 구태여 양쪽을 비교할 필요도 없다. 폼페이우스 진영은 지중해 동부 전역에서 600척을 모은 반면, 카이사르는 보병 2만 5천 명과 기병 1,300기를 태울 수 있는 배조차도 확보하지 못해 병력을 두 차례에 나누어 수송해야 할 정도였으니까 100척을 크게 밑도는 규모였을 게 분명하다.


양쪽 진영의 군자금을 비교해보면, 여기서도 폼페이우스가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기원전 49년에는 현직 집정관이 둘 다 폼페이우스 진영에 있었다는 점이다. 로마 속주에 세금을 매길 권한도, 동맹국에 병력 제공을 요청할 권한도 폼페이우스 쪽이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두 영웅의 격돌을 앞두고, 두 사람이 갖고 있는 조건을 일람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총사령관의 나이는 58세와 52세니까 두 사람의 조건은 대등하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만점은 10점으로 한다.


그리스를 향하여


기원전 48년으로 해가 바뀐 1월 4일, 제1진으로 보병 1만 5천 명과 기병 500기를 거느린 카이사르가 브린디시를 떠났다. 브린디시에 도착한 지 13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모두 브린디시에 남겨두고 배를 띄웠다. 되도록 많은 병사를 태우기 위해서였다고 카이사르는 기록했다. 남겨둔 짐은 제1진을 그리스로 데려다주고 돌아온 선단이 제2진과 함께 그리스로 싣고 갈 예정이었다. 제2진인 보병 1만 명과 기병 800기는 차석 부사령관인 안토니우스가 인솔하기로 되어 있었다.


기원전 48년 1월 5일 그리스 서해안에 상륙한 카이사르는 우선 육지를 따라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는 오리쿰 공략에 착수했다. 이탈리아로 돌려보내지 않고 남겨둔 군선 12척이 바다에서 공격하고, 카이사르가 이끄는 보병대가 육지에서 공격하는 양면작전으로 오리쿰은 하루도 지나기 전에 쉽게 함락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쉬지 않고 바로 오리쿰에서 북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항구도시 아폴로니아 공략에 착수했다. 주민들은 카이사르에게 대표를 보내 우호적으로 성문을 열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리하여 오리쿰을 함락한 이튿날에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아폴로니아도 수중에 넣었다

바로 그때 카이사르의 상륙을 안 폼페이우스가 테살리아 지방에서 훈련하던 병력을 모두 이끌고 북상하여 에그나티아 가도를 따라 디라키움에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카이사르가 있는 아폴로니아와 폼페이우스가 도착한 디라키움은 직선거리로 7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게다가 아폴로니아 앞바다에서는 비불루스가 지휘하는 해군이 24시간 순찰을 돌고 있다. 육지와 바다에서 협공당할 것을 우려한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동시키기로 결심했다.


제2진 합류


그즈음 카이사르에 대한 증오심으로 바다를 지키던 비불루스가 죽었다. 그래도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제2진이 이탈리아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은 3월 하순이 되어서였다. 3월 하순이라 해도 실제 계절로는 2월 중순에 불과했다. 그러나 빨리 오라는 잦은 재촉도 모두 헛수고로 끝난 카이사르에게는 참으로 길고 괴로운 2개월 20일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조류와 바람 탓에 아폴로니아에서 직선거리로 130킬로미터나 북쪽에 상륙해버렸다. 그 바람에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사이에는 폼페이우스 진영의 보급기지인 디라키움이 가로놓이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압수스강 북쪽 연안에 포진해 있는 폼페이우스의 6만 대군이었다.


북쪽에 있던 안토니우스가 남동쪽으로 우회하면서 남하하고, 남쪽에 있던 카이사르가 북동쪽으로 우회하면서 북상하는 합류작전은 다행히 폼페이우스 대군의 방해가 끼어들기 전에 성공했다. 기원전 48년 4월 3일이었다. 카이사르의 제1진과 제2진의 합류는 제2진이 상륙한 뒤 불과 일주일 만에 이루어졌다.


폼페이우스의 장남 그나이우스가 이집트에서 제공한 선단 50척을 이끌고 오리쿰항을 공격하여, 거기에 놓아둔 카이사르의 나머지 배를 격파했다. 뒤이어 닌페움항을 공격하여 안토니우스와 제2진 병사들을 태우고 온 선단까지 격파해버렸다. 게다가 봄이 와서 폼페이우스의 해상 순찰대는 이제 날마다 출동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로 오는 보급로는 끊어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남은 방법은 현지 조달뿐이다. 카이사르가 직접 군량을 조달하러 나가기까지 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리스를 무대로 벌어질 폼페이우스와의 대결 제2막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역사상 ‘디라키움 공방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석 달 동안의 전투였다.


디라키움 공방전


전쟁의 장기화를 우려한 카이사르는 ‘기다리는’ 폼페이우스에 대해 ‘공세’로 맞서기로 결심한다.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 군대의 합류를 알고 되돌아가자, 카이사르는 그 뒤를 쫓아가서 이틀 후에는 폼페이우스를 따라잡았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에게 싸움을 걸었다.


하지만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전쟁의 장기화도 두려울 게 없는 폼페이우스는 도전에 응하지 않는다. 카이사르도 장기화를 염두에 넣고 전략을 다시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 폼페이우스의 진영과 보급기지인 디라키움을 차단하는 작전에 착수했다.


4월 15일, 포위망 공사가 시작되었다. 폼페이우스가 본영을 설치한 페트라는 바닷가의 고지대에 있고, 육지 쪽에는 높고 가파른 언덕들이 남쪽을 향해 늘어서 있었다. 그 언덕마다 보루를 쌓은 다음, 그것들을 서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포위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디라키움(현 알바니아의 두러스) 출처 구글 이미지]

카이사르의 포위망이 조금씩 모양을 갖추어가는 것을 본 폼페이우스는 이쪽에서도 방어선을 쌓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반달 모양으로 이어진 방책과 참호와 보루가 이중으로 해안선을 둘러싸게 되었다. 안쪽이 폼페이우스의 방어선, 바깥쪽이 카이사르의 포위망이었다.


폼페이우스 진영의 방어선이 먼저 완성되었다. 방어선의 전체 길이는 22.5킬로미터, 언덕을 이용한 보루의 수는 22개나 되었다. 한편 카이사르 진영의 포위망은 전체 길이가 25.5킬로미터였지만, 보루의 수는 16개에 불과했다. 일단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진영으로 흘러드는 모든 강에 댐을 쌓아서 물길을 막아버렸다.

하지만 불리한 것은 카이사르 쪽이었다. 우선 포위망의 길이가 너무 길고, 언덕을 이용한 보루의 수도 너무 적었다. 게다가 25.5킬로미터나 되는 포위망에 병력을 충분히 배치하기에는 병사의 수가 너무 적었다. 먼저 심각한 군량 부족 사태를 맞은 것은 카이사르 쪽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디라키움 시내에 카이사르 쪽으로 돌아서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이 소문을 믿고 카이사르가 디라키움으로 떠난 틈에 포위망의 세 군데를 동시에 공격했다.


게다가 카이사르를 포위망에서 되도록 오랫동안 떼어놓기 위해 바다 쪽에서 디라키움으로 병력을 보내 세 군데에서 공세를 취했기 때문에, 그날 6월 25일은 모두 여섯 군데에서 폼페이우스 군대의 공세가 일제히 불을 뿜게 되었다.


하지만 그 중 한 곳에서 카이사르군 병사 250명은 백인대장 셰바의 지휘 아래 100배나 많은 적의 공격을 네 시간 동안 버텨냈다. 네 시간 뒤, 술라가 이끄는 2개 군단 5천 명이 도착하여 겨우 적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전선에서도 카이사르군은 격투 끝에 적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폼페이우스 진영의 전사자는 약 2천 명. 여기에는 적지 않은 수의 백인대장과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같은 명문 출신 고관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이사르군에 빼앗긴 군기의 수는 6개. 하지만 폼페이우스도 결코 낙담한 것은 아니었다. 2천 명의 손실은 대단치 않았다.


카이사르 진영의 손실은 모든 전선에서 20명도 채 안 되었다. 하지만 부상자는 많았다. 백인대장 4명도 한쪽 눈을 잃었다. 카이사르는 군단에서 서열 8위의 백인대장이었던 셰바를 수석 백인대장으로 승진시키고, 2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포상금도 주었다.

 

치열한 전투


이런 상황에서 카이사르쪽에 참가한 갈리아인 기병 형제가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폼페이우스에게 달려가서 중요한 정보를 흘렸다. 카이사르의 포위망은 건설이 아직 끝나지 않은 부분이 한 군데 있다는 것. 그곳은 포위망의 남쪽 끝에서 해변까지 4킬로미터인데, 병약한 젊은 지휘관 마르켈루스가 지키고 있다는 것.


폼페이우스는 이 두 번째 포위망 돌파 공격에 휘하 병력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0개 대대와 경무장 보병 전원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처음으로 폼페이우스는 육상 공격 외에, 보급 물자를 싣고 입항해 있던 모든 선박에 병사를 태워 바다 쪽에서도 상륙작전을 동시에 결행하는 전법을 택했다


이날 하루에 치러진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중무장 보병 960명과 기병 200기, 그리고 대대장 5명과 백인대장 32명을 잃었다. 그 대부분은 적의 칼에 죽은 것이 아니라, 참호에 떨어져 압사하거나 도주하는 아군을 막으려다가 오히려 아군에게 짓밟혀 죽은 것이었다. 그리고 부대 깃발은 33개나 잃어버렸다.

물론 디라키움에서 1,200명을 잃은 것은 카이사르에게는 뼈아픈 손실이었지만, 이것은 전체 병력의 5퍼센트에 불과했다. 치명타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모든 병사에게 포위를 풀고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그것도 되도록 빨리. 폼페이우스군의 추격을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퇴각은 일단 성공했다.


유인작전


카이사르 휘하에는 이제 중무장 보병 1만 7천 명과 기병 500기밖에 남지 않았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도미티우스의 2개 군단과 합류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그리스 서해안을 떠나 그리스 중앙부로 들어가야 한다.


동시에 카이사르는 디라키움을 떠나려 하지 않는 폼페이우스를 본거지에서 끌어내어 회전으로 유인할 생각이었다. 7월 24일, 카이사르의 명령을 받고 남하한 도미티우스와 테살리아 지방 북쪽 끝에 있는 아이기니움에서 합류했다.


폼페이우스도 그리스 중부로 행군하고 있었다. 역시 카이사르가 예상한 대로였다. 폼페이우스를 보급기지인 디라키움에서 멀리 떼어놓고 우세한 해군력의 지원을 바랄 수 있는 그리스 서해안에서도 떼어놓으면, 카이사르 자신도 말했듯이 “대등한 조건에서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파르살로스 평원에 도착한 것은 7월 29일이었다. 디라키움에서 철군한 지 23일이 지났다. 카이사르를 뒤쫓아 그리스 중부로 행군해온 폼페이우스가 라리사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합류한 것은 8월 1일이었다. 두 영웅이 격돌하는 결전의 무대는 이것으로 모두 갖추어진 셈이다.


결전

폼페이우스는 최대 보급기지인 디라키움과 그리스 서해안을 수비하기 위해 2만여 병력을 남겨놓고 떠났지만, 그리스 중부의 테살리아 지방에 들어가서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합류한 뒤에는 보병 4만 7천 명과 기병 7천 기를 거느리게 되었다. 반면에 카이사르 진영의 기병 전력은 1천 기에 불과했다.


폼페이우스 진영은 이제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는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폼페이우스를 따라 19개월 전에 로마에서 달아나 그리스에 망명해 있던 원로원 의원들은 벌써 수도에 개선한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결전이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탈리아로 돌아간 뒤의 공직 배분을 둘러싸고 싸우기 시작했다.


파르살로스 평원


펠로폰네소스반도를 포함한 그리스 전체로 보면, 파르살로스 평원은 중부라기보다는 북부의 남쪽 끝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해발 500미터도 안 되는 구릉에 둘러싸인 평원은 동서가 20킬로미터, 남북이 17킬로미터였다. 다리가 없어도 건널 수 있는 강이 평원의 북쪽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그 넓이로 보아, 우선 병력에서 열세인 카이사르 쪽이 불리하다. 특히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 전력의 열세를 생각하면 그 불리함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수비에 유리한 고지대가 아니라 평원 한복판에 진영을 짓게 했다. 병력에서 열세이기 때문에 한층 더 철저한 ‘공세’로 나갈 작정이었을 것이다.


북쪽에서 온 폼페이우스는 평원 중앙부에 있는 고지대를 골라서 진영을 설치했다. 파르살로스 평원에서는 보병 4만 7천 명과 2만 2천 명, 기병 7천 기와 1천 기가 맞붙게 되었다.


폼페이우스 쪽에서는 우익이 강에 더 가까이 자리 잡게 되는데, 그 우익에 폼페이우스는 아프라니우스가 지휘하는 킬리키아와 에스파냐 병사들을 배치했다.  중앙에는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시리아에서 데려온 2개 군단을 배치했다.


좌익에는 파르티아에 파병한다는 명목으로 2년 전에 카이사르한테서 빼앗은 2개 군단을 배치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는 중무장 보병대의 왼쪽인 극좌익에 기병 7천 기를 모두 배치했다. 그리고 전황 타개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이 기병대의 지휘를 라비에누스에게 맡겼다.


이에 맞서 강을 왼쪽에 두고 포진하게 된 카이사르군의 진형은 다음과 같다.

- 좌익제8군단, 제9군단이 주력. 지휘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중앙주력은 제11군단. 지휘는 도미티우스

- 우익주력은 제10군단, 제12군단. 지휘는 술라

- 극우익기병


카이사르는 좌익과 중앙과 우익의 트리알리에서 ‘노련한 병사’만 모아 1개 군단의 별동대를 편성했다. 여기에 고참병을 고른 이유는 그들이 보병이면서도 적군 기병 앞을 가로막는 역할을 맡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병 앞에서도 꼼짝하지 않는 배짱이 필요하다. 카이사르는 이 별동대 군단을 적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우익의 배후, 즉 바로 자기 앞에 배치했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카이사르군 기병 1천 기는 라비에누스를 선두로 질주해오는 적군 기병 7천 기를 보고 겁에 질린 척하면서 옆으로 피했다. 그러자 적군 기병은 더욱 기세를 올려 돌진했다. 카이사르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숨겨둔 별동대 2천 명에게 출전명령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옆으로 피한 척했던 기병 1천 기와 보병 400명이 적군 기병의 배후로 돌아갔다. 적군 기병을 인간 ‘울타리’ 속에 몰아넣는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카이사르군 고참병들은 창을 겨누고 앞을 막아설 뿐 아니라 앞뒤에서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왔다. 폼페이우스군 기병 7천 기 가운데 카이사르군 고참병들이 만든 이 ‘울타리’를 돌파할 수 있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카이사르는 회전 첫 단계에서는 첫째 줄과 둘째 줄의 병사만 투입했다. 셋째 줄인 트리알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노련한 병사’들에게 비로소 출전명령이 떨어졌다. 세 배나 많은 적과 용감히 싸운 첫째 및 둘째 줄은 잠시 뒤로 물러나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는다. 그 대신 비록 수는 적지만 원기왕성한 셋째 줄이 투입되었다.


폼페이우스군의 우익과 중앙도 좌익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무너졌다. 끝까지 버티며 싸우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스의 한낮의 태양이 전쟁터에 널부러진 산더미 같은 시체 위에 사정없이 내리쬐었다. 패주하는 병사들 대다수는 진영지와는 반대쪽인 강 건너편의 고지대를 향해 달아났다.

[전투의 전개 양상(파란색이 카이사르 진영) 출처 구글 이미지]

어제까지만 해도 무패를 자랑하던 장군은 이때 처음으로 진영지를 버렸다. 라리사로 달아나는 폼페이우스를 따른 것은 기병 몇 기뿐이었다. 그 폼페이우스를 따라간 것은 먼저 라리사로 도망친 30명이었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기원전 49년도 집정관인 렌툴루스와 마르켈루스도 끼어 있었다.


카이사르는 앞에 늘어선 폼페이우스군 패잔병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명령했다. 포로가 된 사람의 수는 2만 4천. 카이사르는 모든 포로에게 거취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아군 병사들한테는 패잔병을 해치면 안 되고 그들의 물건에 손을 대서도 안 된다고 엄명했다.


포로로 잡혔다가 석방된 자들 중에는 카이사르가 애인인 세르빌리아한테 특별히 부탁받은 마르쿠스 브루투스도 끼어 있었다. 세르빌리아의 아들인 브루투스는 그해 나이 37세였다. 그는 카이사르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도망친 폼페이우스 쪽 고관들과 행동을 함께하지 않고 앞으로는 카이사르한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한 병사들과 같은 길을 택했다.


패배한 폼페이우스 쪽 요인들 중에서는 에노발부스만이 패주하다가 카이사르의 기병에게 추격당해 죽었다. 우익을 지휘하고 있던 아프라니우스, 아프라니우스와 함께 에스파냐에서 카이사르에게 패배한 경험이 있는 페트레이우스와 바로, 또한 폼페이우스가 어느 누구보다도 군사적 재능을 인정하고 아군의 주력인 기병대의 지휘를 맡긴 라비에누스. 이 네 사람은 그 혼란 속에서 디라키움까지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파르살로스 전투 출처 구글 이미지]

아직은 해군이 건재한 폼페이우스파는 그것을 이용하여 북아프리카로 망명하기로 결정했다. 카이사르파인 쿠리오와 4개 군단을 궤멸시킨 아프리카 속주에 가서 폼페이우스를 기다리고 병력을 모으며 권토중래를 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에 반해 마르쿠스 마르켈루스는 은퇴하여 그리스의 섬에서 여생을 보낼 작정이라면서 떠났고, 바로는 이탈리아로 돌아가 다시 학구적인 생활을 시작하겠다고 말하고 떠났다. 키케로 역시 북아프리카로 가지 않고 이탈리아로 돌아가 문필생활에 전념하겠다고 하여 변절자로 매도당하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수도에 남아 있는 동료 집정관 이살리쿠스에게 기원전 48년 12월 말일에 자기를 독재관에 임명해달라고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독재관에게는 부독재관(직역하면 ‘기병단장’)을 임명할 권리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34세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부독재관에 임명했다.


폼페이우스 추격


폼페이우스는 우선 라리사로 도망쳤다가 곡물 수송선을 징발하여 에게해에 이르렀다. 하지만 보통 범선으로는 불안해서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 지방에 있는 항구 안티폴리스에 일단 상륙하기로 했다. 그날이 8월 12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안티폴리스에서 5단층짜리 대형 갤리선을 징발했다.


이즈음 폼페이우스가 자기 기반이라고 생각한 지중해 동부 지역의 나라들도 일제히 카이사르 쪽으로 돌아섰다. 이로 말미암아 폼페이우스는 시리아를 본거지로 삼아 권토중래를 꾀하겠다는 기개를 잃어버렸다.


이제는 소아시아에도 시리아에도 갈 곳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폼페이우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아직 두 가지가 남아 있었다.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였다. 폼페이우스는 장인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전직 집정관 두 사람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를 선택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의 소년 왕에게 친서를 보내 자신의 일행을 손님으로 받아들여달라고 요청했다. 친서를 싣고 달려갔던 쾌속선이 돌아와서 전하기를, 이집트 왕가는 폼페이우스 일행을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안심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친서를 받고 손님으로 환영하겠다고 대답하긴 했지만, 소년 왕을 보좌하고 있던, 아니 조종하고 있던 측근들의 생각은 말이나 행동과는 정반대였다.


폼페이우스의 최후


알렉산드리아의 항구는 대형 선박도 접안할 수 있는 설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지만, 가정교사와 환관으로 이루어진 측근들은 마중을 나갈 테니까 항구 밖에서 기다리라고 15세가 된 왕의 이름으로 폼페이우스에게 전했다. 폼페이우스는 이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항구 밖에서 기다렸다.

[알렉산드리아 출처 구글 이미지]

얼마 후, 마중 나온 배가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거기에는 논리학 교사라는 그리스인 아킬라스와 로마 병사인 셉티무스가 타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해적소탕 때 자기 밑에서 백인대장을 지낸 셉티무스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는 얼굴을 보고 안심했다.


아킬라스의 권유를 받아들여, 작은 배에는 폼페이우스 이외에 기원전 49년도 집정관인 렌툴루스와 병사 몇 명밖에 타지 않았다. 탁 트인 바다에서는 100미터쯤 떨어진 배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훤히 보인다. 셉티무스가 폼페이우스에게 몸을 부딪쳐간 것도, 폼페이우스가 뱃전에 고꾸라진 것도 훤히 보였다.


폼페이우스를 따라간 몇몇 병사는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렌툴루스는 감옥에 갇혔다가 거기서 살해되었다. 기원전 48년 9월 28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흘 뒤에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앞바다에 모습을 나타냈고, 그에게 향유 항아리에 담긴 폼페이우스의 목과 도장을 겸한 폼페이우스의 금반지가 전해졌다.


2천 년 뒤, 영국의 한 연구자는 이렇게 말했다.

“폼페이우스는 전쟁터에서는 카이사르가 상대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장군이었다. 그러나 디라키움에서 패배한 카이사르는 맨 나중에 전쟁터를 떠난 전사였던 반면, 파르살로스에서 패배한 폼페이우스는 맨 먼저 전쟁터를 떠난 전사였다. 그리고 단순히 재능있는 사람과 천재를 구별해주는 것은 지성과 정열의 합일인데, 폼페이우스에게는 그것이 모자랐다.”


클레오파트라


폼페이우스의 목과 반지를 보낸 뒤, 가정교사와 환관으로 이루어진 그들은 이제 로마 제일의 실력자인 동시에 로마의 현직 집정관인 카이사르에게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으니 빨리 이집트를 떠나달라고 요구했다.


이집트는 독립국가지만,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고 로마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다. 로마가 독립국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그런 로마의 최고위 공직자인 현직 집정관으로서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기로 결심했다.


카이사르는 이집트 왕실이 향유 항아리에 담아서 보내온 폼페이우스의 목을 화장하여 미망인에게 보냈다. 미망인 코르넬리아는 그 유골을 폼페이우스가 어느 곳보다도 좋아한 알바의 별장 뜰에 묻었다고 한다. 폼페이우스의 무덤은 지금도 남아 있다.


카이사르는 이집트의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는 것이 로마 집정관인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륙하자마자 분쟁 당사자인 누나(클레오파트라)와 남동생(프톨레마이오스 13세)을 사흘 뒤인 10월 7일로 날짜를 정해 궁궐로 불렀다. 이것이 이집트의 궁정신하들을 자극했다.

[카이사르 앞에 나타난 클레오파트라 출처 구글 이미지]

10월 7일에 열린 두 당사자의 회담에서, 카이사르는 오누이가 화해하고 다시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라는 판정을 내렸다. 기원전 48년에 카이사르가 내린 판정은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던 소년 왕과 그 측근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판정이 내려진 지 한 달 뒤, 그들은 카이사르에 대해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리아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전쟁


가정교사 아킬라스와 환관 포티우스는 소년 왕의 군대를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집결시켰다. 이집트군은 보병 2만 명과 기병 2천 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에는 7년 전 폼페이우스가 파병한 가비니우스 휘하의 병사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카이사르는 보병 3,200명과 기병 800기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군선도 카이사르가 10척인 반면에 적은 72척이나 갖고 있었다. 이래서는 카이사르도 수비에 전념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시가전을 치르면서 수비를 해내야 한다.


카이사르군 병사들은 적의 선단에 불을 질렀는데, 그 불길이 번지는 바람에 헬레니즘 문화의 본산이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장서 40만 권과 함께 불타버렸다. 카이사르는 당장 등대(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파로스 등대)가 서 있는 섬을 점거하려고 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파로스 등대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럭저럭하는 동안에 환관 포티우스가 죽었다. 하지만 소년 왕만이 아니라 아르시노에 공주까지 아킬라스 편에 가담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편에 서서 싸우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얼마 후 아르시노에 공주의 명령으로 아킬라스까지 살해되었다.


카이사르의 지령에 따라 소아시아에서 원군이 도착한 것은 기원전 47년 2월 말경. 이집트에 도착한 원군은 도미티우스가 보낸 2개 군단만이 아니었다. 소아시아와 시리아에서도 카이사르 휘하에서 싸운다는 것만으로도 흥분한 용사들이 자진해서 모여들었다. 여기에는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라는 용장도 끼어 있었다.


한편 소년 왕쪽에서는 그 합류를 저지하려고 한다. 이리하여 전쟁터는 알렉산드리아 시내에서 나일강 어귀(델타)로 이동했다. 번잡하고 성가신 시가전에서 해방되어 원군과 합류한 카이사르는 드디어 그 특유의 전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나일 델타에서 벌어진 전투는 한 달도 지나기 전에 결말이 난 모양이다.


소년 왕은 패주하는 군대의 혼란에 휩싸여 전사했다. 지휘를 맡고 있던 환관 가니메데스도 전사했다. 아르시노에 공주는 포로가 되었다. 카이사르는 그가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충실한 게르만 기병대의 선두에 서서 알렉산드리아 시내에 개선했다. 기원전 47년 3월 27일이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로부터 이집트 왕이 되어달라는 이야기까지 들었으나 클레오파트라와 두 왕자 가운데 살아남은 동생이 이집트를 공동 통치하는 것이 선왕의 유지에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공동 통치자인 클레오파트라 7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는 카이사르와 새로운 동맹조약도 맺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여동생이고 반란의 주모자이기도 한 아르시노에는 이집트에 그대로 두면 또다시 내분의 씨앗이 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로마로 압송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나서 카이사르는 휴가를 얻기로 결정해버렸다. 하나는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서였고, 또 하나는 나일강의 수원을 찾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의 여행 목적은 나일강 유람에 있었을 게 분명하다. 이 여행의 동반자는 말할 것도 없이 클레오파트라였다. 휴가는 두 달 동안이나 되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영화 '클레오파트라' 출처 구글 이미지]

휴가를 끝내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카이사르를 기다리는 것은 소아시아 방어를 맡고 있던 도미티우스가 보낸 급보였다. 그는 폰투스 왕 파르나케스를 상대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파르살로스 회전 이후 폼페이우스를 추격해온 제6군단과 게르만 기병 800기만 데려가기로 했다

 

다만 카이사르는 분쟁지인 소아시아로 직행하지는 않았다. 가는 길에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53세 생일을 앞둔 카이사르는 그 후 석 달 동안 주도면밀하면서도 신속한 여느 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팔레스타인 지방의 프톨레마이오스 아케(오늘날 이스라엘의 아콘)까지는 바닷길을 이용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카이사르는 유대인에게 그리스인과 평등한 통상권을 인정했다. 그는 최고제사장에게 유대 지상권(地上權)의 최고위자 자리를 돌려주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도 허가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안티오키아로 가서 시리아 속주와 그 주변 지역의 제후들을 소집했다. 사막 민족인 베두인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소아시아 남해안에 있는 속주 킬리키아로 갔고, 여기에서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 오리엔트의 여러 종교도 카이사르가 신전 영지를 재확인해준 덕택에 되살아났다.


파르나케스와의 전투


폰투스 왕 파르나케스는 술라와 루쿨루스 등 로마에서 손꼽히는 용장들을 상대로 패배와 승리를 되풀이한 끝에 결국 폼페이우스에게 쫓겨 자살한 미트라다테스의 아들이다. 로마의 내전을 틈탄 파르나케스의 행동은 우선 흑해 남해안에서 가장 큰 도시인 시노프를 함락하고, 그 여세를 몰아 카파도키아까지 침략하는 것이었다.


카이사르가 도착했다는 소식만으로도 파르나케스에게 위압감을 주어 외교 교섭에 나오도록 하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여기서 파르나케스는 교섭 사절의 출발을 늦추거나 그밖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외교 교섭을 질질 끌었다. 결국 양군은 카파도키아 지방에서도 흑해와 가까운 젤라(오늘날 터키의 질레)에서 마주쳤다.


수는 줄어들었지만 카이사르의 정예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제6군단의 맹공 앞에서 오리엔트 병사들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 전투가 끝난 뒤, 카이사르는 로마 원로원에 보낸 전과 보고를 다음 세 마디로 시작했다고 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VENI, VIDI, VICI’(베니, 비디, 비시)

[젤라 전투 출처 구글 이미지]

카이사르가 ‘와서 보고 이긴’ 상대인 파르나케스는 전쟁터에서는 겨우 도망칠 수 있었지만, 4년 뒤에 쓸쓸히 죽었다. 폰투스 왕국은 알렉산드리아 전쟁 때 지원군의 선두에 서서 용감히 싸운 폰투스 왕가의 미트라다테스에게 주어졌다.


그리스 평정


카이사르가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남은 문제는 그리스뿐이었다. 폼페이우스가 죽은 뒤 카이사르가 해야 할 일은 폼페이우스의 기반이었던 지방을 자신의 기반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중부 그리스로 들어간 카이사르는 그리스 도시들의 대표를 아테네로 소집했다. 여기서도 폼페이우스 편에 선 죄는 묻지 않았다.


이렇게 그리스도 카이사르색(色)으로 물들인 뒤, 그는 디라키움에서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떠났다. 아드리아해의 제해권도 이제는 카이사르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 그가 제6군단과 게르만 기병대를 이끌고 브린디시에 상륙한 것은 기원전 47년 9월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집트에 대한 패권을 완전히 확립하고 폰투스 왕에게 깨끗한 승리를 거둔 것은 로마 시민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민회는 그를 독재관에 임명하고, 무려 5년 동안의 임기를 인정하는 것으로 카이사르를 환영했다. 모두 카이사르와 로마에 복종을 맹세했다.


카이사르와 키케로


키케로에게 지난 1년은 카이사르의 1년과는 전혀 달랐다. 키케로는 파르살로스 회전에서 패배한 뒤에도 북아프리카로 망명한 폼페이우스파 동지들과 행동을 같이하지 않고 이탈리아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승자가 된 카이사르와는 친구 사이니까, 자기라면 그것도 허용될 거라는 생각으로 귀국한 것이다. 그런데 브린디시에 상륙했을 때 ‘브레이크’가 걸렸다. 카이사르가 본국 통치를 맡긴 안토니우스가 자기한테는 그런 것을 허가할 권한이 없다는 편지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브린디시에서 발목이 잡혀버린 키케로의 나날은 절망과 불안에 가득 찬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이집트와 오리엔트를 평정하고 1년 만에 귀국하여 브린디시에 상륙한 것을 알자마자 그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섰다.


카이사르를 만나러 가는 길에 키케로의 마음속에는 카이사르라면 자신을 호의적으로 대해줄 거라는 희망이 조금이나마 싹트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승자가 된 카이사르에게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를 선처해달라고 부탁하기는 부끄럽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길가에 모여든 환영 인파 속에서 키케로의 망설이는 모습을 보자마자 키케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을 타지 않은 키케로에 맞춰 말에서 내린 카이사르는 반갑게 키케로를 포옹하고 친밀하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는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며 수백 미터나 되는 먼 길을 함께 걸어갔다.


아프리카 전쟁


이해(기원전 47년)의 전쟁터는 폼페이우스파 잔당이 기다리고 있는 아프리카 속주(오늘날의 튀니지)였다. 카이사르의 병력은 시칠리아 서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 마르살라에 집결하여, 거기서 배를 타고 북아프리카로 건너간다.


오늘날의 튀니지에서 기다리고 있는 폼페이우스파 군대의 전력은 막강했다. 10개 군단 3만 5천 명의 보병과 지중해 각지에서 고용한 기병 9천, 누미디아의 중무장 보병이 4개 군단 2만 5천, 이름난 누미디아 기병이 6천으로 합하면 보병 6만 명에 기병이 1만 5천 기가 된다. 여기에 누미디아의 코끼리 120마리가 가세한다.


아프리카는 카이사르가 한 번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미지의 땅이었다. 카이사르가 선택한 상륙지점은 튀니지 북부가 아니라 튀니지 동부였다. 아프리카 전쟁에서 카이사르는 처음부터 적의 보급기지인 우티카에서 적군을 끌어내는 것을 가장 중요한 전략으로 삼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카이사르는 렙티스에서 남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타프수스를 점찍었다. 폼페이우스의 휘하 장수 가운데 한 사람이 지키고 있는 타프수스는 이 부근에서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타프수스를 공격하는 것은 말하자면 ‘미끼’였다.


타프수스 회전


기원전 46년 4월 6일, 동이 트자마자 카이사르는 행동을 개시했다. 배후의 적을 막기 위해 타프수스 앞에 2개 군단을 배치한 뒤,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진영을 떠났다. 타프수스에서 카이사르는 기병을 모두 중앙에 배치했다.


카이사르는 남쪽에 있는 누미디아 군대가 응원하러 달려오기 전에 스키피오 군대를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방법은 속공뿐이다. 정석을 어기면서까지 중앙에 기병을 배치한 것은 보병으로 편성된 적진 중앙을 기병이 돌파하여 양분한 다음, 적의 우익과 좌익의 배후로 돌아가는 전술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황은 카이사르가 예상한 대로 전개되었다. 제5군단 병사들의 공격으로 상처를 입고 화가 난 코끼리떼는 적을 쓰러뜨리기는커녕 아군 병사들을 짓밟으며 달아나 순식간에 전선을 이탈해버렸다.


라비에누스가 지휘하는 기병대도 앞쪽은 카이사르의 고참병, 뒤쪽은 기병에게 포위되어 라비에누스를 비롯한 몇 명이 겨우 도망쳤을 뿐 전멸하고 말았다.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3만 보병은 1만 명이나 되는 전사자를 남기고 사방팔방으로 뿔뿔이 패주했다.

[타프수스 전투 출처 구글 이미지]

카이사르는 바로 누미디아 왕 유바의 진영지를 공격하였다. 누미디아군은 싸워보지도 않고 모두 줄행랑을 쳤다. 누미디아 왕 유바는 자마에서 카이사르를 맞아 싸울 형편이 아니었다. 자마 주민들이 도망쳐온 자기네 왕의 코앞에서 성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체념한 왕은 동행한 폼페이우스파 장수 페트레이우스와 동시에 칼을 휘둘러 동반 자살했다. 150년 전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함께 성장한 누미디아 왕조도 이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우티카로 가고 있는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파 수뇌진의 소식이 잇달아 전해졌다. 총사령관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배를 타고 도망치려다가 그를 알아보지 못한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술라의 아들 파우스투스 술라도 도망치다가 죽었다. 아프라니우스는 가족과 노예들과 함께 도망치다가 도적떼를 만나 목숨을 잃었다.


소(小)카토


우티카는 지금은 해안선이 연장되어 내륙 도시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지만, 고대에는 번창한 항구도시다. 우티카의 방어시설은 잘 갖추어져 있었다. 이 본거지를 수비하고 있던 소(小)카토는 타프수스 전투 결과를 안 뒤에도 도망치지 않고, 방어태세를 충분히 갖춘 우티카에서 항전을 계속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우티카 주민들이 방어에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그들도 타프수스 전투 결과를 알고 있었다. 주민의 협력을 기대할 수 없으면 항전도 꿈으로 끝난다. 카토는 카이사르의 친척이면서도 폼페이우스파에 속한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불러서, 요인과 가족들을 안전하게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


타프수스 회전이 끝난 지 엿새가 지난 4월 12일, 카토는 우티카의 유지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향연이 끝나고 손님들이 돌아간 뒤, 카토는 침실로 물러갔다. 그리고 플라톤의 『파이돈』을 읽은 뒤, 단검을 꺼내 배를 찌르고 스스로 내장을 꺼내 죽었다고 한다. 향년 49세였다.

[소 카토의 죽음 출처 구글 이미지]

아프리카를 제패하는 데 석 달이나 걸렸으니까, 보통은 우티카에서 배를 타고 시칠리아로 돌아가 거기서 해로나 육로를 거쳐 수도 로마로 곧장 개선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군대에는 귀국을 명령해놓고 그 자신은 소수의 병사만 거느리고 시찰을 위해 사르데냐섬으로 갔다.


이런 사정으로 말미암아 우티카를 떠난 것은 4월 중순이었고,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시찰을 끝내고 로마로 돌아온 것은 7월 25일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유능한 참모가 있었기에 귀국한 지 불과 열흘 만에 네 차례로 나누어 폼페이우스 때보다 더욱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개선식


54세를 맞이한 카이사르가 로마인으로 태어난 사나이에게 최고의 영예인 개선식을 거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열흘 안팎의 기간을 사이에 두고 네 차례로 나누어 개선식을 거행한 것은 승리한 상대가 네 나라에 이르렀기 때문에 나누어서 거행할 필요성도 있었다.


첫째 날은 갈리아인에 대한 승리를, 둘째 날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아르시노에 공주에 대한 승리를, 셋째 날은 폰투스 왕 파르나케스에 대한 승리를, 넷째 날은 누미디아 왕 유바에 대한 승리를 축하했다. 다만 폼페이우스에게 거둔 승리는 개선식으로 축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개선장군이 도착하면 개선 퍼레이드가 출발한다. 전리품을 실은 마차 행렬이 지나가면, 승리한 전쟁 상황을 그린 플래카드 행렬이 나타난다. 갈리아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날에는 갈리아 지도 위에 로마 군단기인 독수리 깃발이 꽂힌 그림이라든가, 라인강에 걸린 다리, 알레시아 공방전이 끝난 뒤 카이사르 앞에 무릎을 꿇은 패장 베르킨게토릭스의 그림 등이다.

[로마의 개선식 출처 구글 이미지]

플래카드 뒤에는 그 ‘전쟁의 결과’인 패배자를 태운 마차가 등장한다. 마차 위에 쇠사슬로 묶여 있는 패배자 대표는 갈리아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날에는 베르킨게토릭스, 이집트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날에는 아르시노에 공주, 폰투스에서의 승리를 축하하는 날에는 파르나케스의 아들, 누미디아 왕에 대한 승리를 축하하는 날에는 유바의 다섯 살 난 아들이었다.


개선장군의 전차 뒤에는 참모들이 말을 타고 나아가고, 그 뒤에 기병대가 따른다. 그들은 일제히 큰 소리로 그날을 위해 미리 정해둔 구호를 합창한다. 카이사르의 개선식에서 군단병들이 외친 구호는 이것이었다.

“시민들이여! 마누라를 숨겨라. 대머리 난봉꾼이 나가신다!”


마르스 광장을 출발한 개선식 퍼레이드가 포로 로마노로 들어간 다음, 포로 로마노 한복판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로지르는 성도(聖道 : 비아 사크라)를 지나 카피톨리노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하면, 군단병들도 이제는 구호 합창을 삼가고 엄숙한 표정으로 바뀐다. 카피톨리노 언덕에서는 신들에게 승전보를 올리고 감사를 바치는 의식이 거행되기 때문이다.


개선식을 거행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공공건물을 한 개 정도는 세워서 국가에 기증하는 것이 보통이다. 카이사르는 개선 기념사업으로 ‘셈프로니우스 회당’을 개축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회당은 워낙 파손이 심했기 때문에, 결국 토대부터 다시 짓게 되어 ‘율리우스 회당’(바실리카 율리아)이라고 불리게 된다.

[바실리카 율리아 복원 이미지와 현재 출처 구글 이미지]

카이사르의 공공건물의 건설과 기증은 개선 기념사업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국가 로마에 새로운 정치질서를 주는 동시에 새로 단장한 수도도 함께 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구상한 수도 재개발 사업도 역시 카이사르에 의한 로마의 새로운 탄생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했다.




“역사는 이따금 하나의 인물 속에 자신을 응축시키고, 그 후 세계는 이 인물이 지시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좋아하는 법이다. 이런 위대한 개인에게는 보편과 특수, 멈춤과 움직임이 한 사람의 인격에 집약되어 있다. 그들은 국가나 종교나 문화나 사회의 위기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존재다……. 위기에는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여 하나가 되고, 위대한 개인에게서 정점에 이른다. 이런 위인들의 존재는 세계사의 수수께끼다.”

- 부르크하르트의 『세계사에 관한 고찰』에서 발췌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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