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 로마나 - 아우구스투스 통치 중기
제2장 통치 중기
기원전 18년~기원전 6년(45세~57세)
역사가 타키투스가 평했듯이 반대파를 자극하지 않도록 야금야금 권력을 손에 넣은 아우구스투스는, 서방에 이어 동방에 대한 재편성을 끝낸 이제, ‘머리’를 강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착수한 일은 한마디로 말하면 ‘로마 시민권 소유자 전체의 강화’였다.
그는 카이사르가 속주의 유력자에게 원로원 의석을 준 것이 기존 원로원 계급의 반발을 샀던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먼저 로마 시민권 소유자 계층을 강화하는 것이 선결 문제라고 생각했다. 로마 시민이 제국의 핵심이 되어야 하고, 그들의 질과 양을 확보하는 것이 제국 통치에 효과적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자식을 적게 낳으려는 풍조에 대한 대책
기원전 1세기 말에 본국 이탈리아반도의 주민 구성을 분석해보면, 인종이나 민족의 상대적 비율이 뚜렷한 변화를 보였다. 본국 주민의 수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주민 구성이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로마에서는 자식을 적게 낳는 풍조가 뚜렷해졌다.
기원전 2세기까지만 해도 로마의 지도층 집안에서는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처럼 자녀를 10명이나 낳아서 키우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런데 카이사르 시대에는 자녀를 두세 명 낳는 게 보통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아예 결혼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났다.
기원전 1세기 말의 로마에서는 자녀를 낳아서 키우는 일 외에도 쾌적한 인생을 보내는 방법이 늘어났기 때문인다. 독신으로 지낸다 해도 불편한 점은 전혀 없었다. 집안일은 노예들이 맡아서 해주고, 게다가 ‘아트리엔시스’(집사로 번역할 수 있는 수석 노예)가 잠시도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고 모든 일을 꼼꼼히 챙겨준다.
아우구스투스의 윤리 대책
기원전 18년, 아우구스투스는 ‘윤리 대책’(쿠라 모룸)의 일환으로 두 가지 법안을 제출한다. 원로원에서는 상당한 반대를 받았지만, 45세의 최고 권력자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누구보다 강력한 권위를 내세워 그 법안을 정책화하는 데 성공했다.
• ‘간통 및 혼외정사에 관한 율리우스법’('간통 처벌법')
• ‘정식 혼인에 관한 율리우스법’('정식 혼인법')
‘간통 처벌법’의 성립으로 간통은 공적인 범죄가 되었다. 남편이나 아버지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간통한 여자를 고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법률은 간통한 남녀 외에도, 간통 사실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숨기거나 사실을 안 뒤에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남편이나 친정아버지를 ‘간통 방조죄’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식 혼인법
‘정식 혼인법’은 로마 사회의 상류층과 중류층에 해당하는 원로원 계급과 기사 계급, 즉 정치·경제·행정을 담당하는 계층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 두 계급에 속하는 시민들에게 채찍과 당근을 함께 사용하여 정식 결혼 생활을 장려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법률의 성립으로 국가 로마의 ‘두뇌’와 ‘심장’과 ‘신경’이 되어야 할 25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와 20세부터 50세까지의 여자는 결혼하지 않으면 독신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과부인 경우에도 자녀가 없으면 1년 안에 재혼해야 하고, 재혼하지 않으면 독신과 똑같이 취급된다.
자식이 없는 독신 여성은 50세가 넘으면 어떤 상속권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독신 여성이 5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갖고 있으면, 50세가 넘자마자 이것을 유지할 권리마저 잃게 된다. 몰수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양도해야 한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남자라도 자녀가 없으면, 첫아이가 태어나야만 비로소 법정 상속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유산을 상속할 권리를 가질 수 있고, 법정 상속인이 아니라도 유산을 상속받을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친구나 친지에게도 유산을 상속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고대 로마에서는 이 법률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혼 자체는 금지하지 않고 이혼하기가 어렵도록 규정을 바꾸었다. 이제는 공표 의무가 부과되었고, 이전에는 두 당사자와 아내쪽 아버지의 의향만으로 이혼이 성립되었지만, 이제는 원로원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에서 이혼을 인정한다는 결정을 내려야만 비로소 이혼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는 낳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27년 뒤인 서기 9년에 이 두 가지 법률의 수정안이 성립되었는데(‘파피우스 포페우스법’), 주로 자녀가 없는 부부의 상속권이 인정되고 독신 여성의 불이익이 재혼을 하면 완화되었다.
신앙심
기원전 17년 당시에 아우구스투스는 최고 제사장이 되지는 않았지만, 로마의 종교계를 재편성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고 있었다. 우선 그 자신이 제사장(폰티펙스)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윤리 개혁’의 책임자였다.
로마에서는 예부터 ‘세기제’(世紀祭, 루디 사이쿨라레스, ludi saeculares)가 열리고 있었다. 이는 비정기적이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이 축제를 정기적인 행사로 바꾸고, 의미도 부여했다. 5월 31일부터 사흘 밤 사흘 낮이 ‘세기제’를 여는 시기로 결정되었다.
첫날 무대는 마르스 광장에서도 테베레강변 쪽의 ‘타렌툼’이라는 곳이다. 주최자인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가 양과 산양을 각각 아홉 마리씩 운명의 여신에게 산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거행한다. 기도 내용은 로마인이 건강과 지혜를 얻고, 로마의 승리와 독립과 평화가 유지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튿날인 6월 1일 오전에는 무대가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옮겨진다. 이날은 최고신 유피테르에게 산 황소를 제물로 바친다. 날이 저물면, 무대는 다시 마르스 광장으로 돌아간다. 이날 밤에 기원할 상대는 다산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공물로는 밀과 보리와 누에콩 가루로 만든 세 종류의 빵이 27개 마련된다.
6월 2일 아침, 무대는 다시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돌아간다.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는 제각기 암소를 한 마리씩 끌고 최고신 유피테르의 아내인 유노에게 기원한다. 날이 저문 뒤에는 타렌툼으로 무대가 다시 옮겨진다. 기원할 상대는 임신을 관장하는 대지의 여신이고, 산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도 암퇘지로 바뀐다
이튿날인 6월 3일 아침,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가 제사를 드리는 무대는 팔라티노 언덕의 아폴로 신전으로 옮겨진다. 세 종류의 빵 27개를 아폴로 신과 디아나 여신에게 바친다. 다음에는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무대를 옮겨 ‘세기제’의 마지막 장면이 펼쳐진다.
‘세기제’와 같은 국가의 제사와는 별도로 민간 신앙에서는 도시 도로의 네거리마다 그 규모에 걸맞은 크기의 사당이나 제단이 만들어졌다. ‘그 일대의 수호신’이나 ‘아우구스투스의 영혼’을 모시는 장소다. 아우구스투스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신격화되는 것을 몹시 싫어했지만, 이 ‘아우구스투스의 영혼’ 신앙이야말로 훗날의 황제 숭배로 이어지게 된다.
알프스
이탈리아에서 알프스산맥을 넘어 갈리아로 가는 데에는 주요 루트만 해도 네 개가 있었다. 이 중 세 번째 루트는 토리노에서 서쪽으로 나아가 수사 골짜기를 오르는 방법으로 알프스를 넘는 길이다. 로마인들은 이 루트를 거기에 사는 부족의 이름을 따서 ‘알페스 코티아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16년 당시, 로마는 이 네 루트를 모두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굳이 아우구스투스가 몸소 나설 필요도 없었다. 다만 세 번째 루트인 ‘알페스 코티아이’만은 독립 부족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민족인 이 산악부족의 부족장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자신의 성(姓)인 율리우스까지 주어 동맹관계를 맺었다.
알프스를 넘는 루트는 이리하여 모두 로마의 것이 되었다. 로마의 것이 되자마자 아우구스투스가 한 일은 말할 나위도 없이 이 루트를 로마 가도화하는 것, 즉 고속도로화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루트를 이용한다면, 토리노에서 발랑스까지의 거리는 365킬로미터, 도보로는 열흘이 걸렸다.
‘서쪽’을 정비한다면 ‘동쪽’을 정비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기회는 언제나 그렇지만 적이 가져다주었다. 이 무렵 일리리쿰에 주둔하고 있는 군단이 동맹자였던 북방 부족의 습격을 받았다. 로마에서는 이 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아그리파를 북쪽으로 파견했다.
도나우강
카이사르에게 로마 시민권을 받아서 본국과 동등해진 루비콘 이북의 북이탈리아를 방어하는 것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빙 둘러 있는 알프스산맥이다. 하지만 그의 갈리아 정복은 국가 로마의 방어선을 알프스산맥에서 라인강으로 옮기는 방위전략의 일환이었다. 산이 아니라 강을 방어선으로 삼는다는 생각이 카이사르 이후 로마의 전략이 된다. 강이라면 건너편을 바라볼 수 있어서, 적을 관찰하기가 훨씬 쉬워지기 때문이다.
라인강 방어선은 카이사르가 확립해주었다. 유프라테스강은 아우구스투스가 외교 교섭으로 해결했다. 흑해도 남쪽은 속주, 동쪽은 동맹국으로 이루어져 있고, 북쪽의 보스포루스 왕국과도 동맹을 맺어 ‘팍스 로마나’는 절반쯤 완성되어 있었다. 남은 것은 도나우강이다. 도나우강의 남쪽 연안 일대가 아직 남아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나 옛 유고슬라비아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니까, 그렇게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것을 끝내야만 비로소 흑해 서안까지 포함하는 로마 제국의 북동부 방어선이 확립된다.
기원전 16년, 북진해 올라가는 대규모 군사행동은 아그리파의 총지휘로 시작되었다. 26세의 티베리우스와 그의 동생인 22세의 드루수스가 진두지휘를 맡았다. 아우구스투스가 리비아와 결혼했을 당시 티베리우스는 겨우 세 살이었고 드루수스는 아직 배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둘 다 늠름한 젊은 장수로 성장해 있었다.
산악부족과의 전투는 둘 다 에스파냐에서 이미 경험했다. 당면한 적은 오늘날의 티롤 주변에 살고 있던 라이티아족이었다. 아그리파가 짠 작전은 베로나에서 북상한 드루수스 군대와 갈리아에서 라인강을 건너 남동쪽으로 진격한 티베리우스 군대가 현재의 보덴호반에 있는 콘스탄츠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쳐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마치 큰 그물로 고기떼를 가두듯 오늘날의 스위스 전역에서 남쪽의 오스트리아 알프스까지를 제패할 수 있다. 두 군대의 합류 후 남쪽으로 향하는 로마군의 앞길을 가로막는 부족은 하나도 없었다. 기원전 16년과 기원전 15년의 2년 사이에 이탈리아 본국의 북쪽은 안전이 보장되었다.
평화의 제단
로마인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곳이야말로 성소를 짓기에 어울리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기원전 13년, 귀국한 아우구스투스를 맞이하여 원로원이 건설하기로 결의한 제단도 로마에서 북쪽으로 가는 플라미니아 가도가 테베레강을 향해 직선으로 뻗어 있는 구간에 세워졌다.
정식 명칭은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의 제단’(알타스 파키스 아우구스타에), 통칭 ‘평화의 제단’인데, 아우구스투스의 노력으로 평화가 도래한 것을 경축하고, 그 평화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로마인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평화의 제단’은 그 위치가 원래의 장소와 다르다. 1936년 독재자인 무솔리니의 생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황제묘’ 주변을 재개발할 때, 발굴한 ‘평화의 제단’을 ‘황제묘’와 테베레강 사이에 복원했다. 이 광장은 그 후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광장’(피아차 아우구스토 임페라토레)이라고 불린다.
‘평화의 제단’은 중앙 입구와 그 반대편 출구를 제외하면 사방이 모두 돋을새김으로 메워져 있다. 그것도 상하로 나누어, 상단에는 새와 곤충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아칸서스 잎사귀 모양을 돋을새김으로 표현했다. 하단에 묘사되어 있는 아이네이아스와 로물루스를 비롯한 여러 신과 인간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뒤쪽으로 돌아가서 왼쪽에는 두 갓난아기를 두 팔에 안은 대지의 여신 텔루스가 중앙에 앉아 있고, 그 양옆에는 바람과 불의 여신이 앉아 있는 구도로 되어 있다. 두 아이를 품에 안은 여신은 다산을 상징하고, 세 여신의 발치에 그려진 보리밭과 소와 양은 대지가 인간에게 베푸는 혜택을 나타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우구스투스도 『업적록』에서 말했듯이,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의 제단'을 건립하기로 결의했을 뿐 아니라 "이 제단에서 해마다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거행한다는 결정"도 내렸다. 해마다 의식을 거행한다는 것은 해마다 신들에게 평화를 기원한다는 뜻의 로마식 표현이다. '평화의 제단'은 '팍스 로마나'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세워졌고, 실제로도 그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다.
군대 재편성
카이사르와 같은 지도력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아우구스투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로마군은 누가 지휘를 맡아도 기능을 발휘하는 조직이었어야 했다. 로마의 군사제도를 재편성할 때 아우구스투스가 기본방침으로 생각한 사항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목적은 정복이 아니라 방위에 있다.
2. 통일국가 파르티아를 제외한 나머지 적들은 모두 개발되지 않고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야만족이다.
3. 방위가 목적인 만큼 상비군이 필요하다.
4. 방위 담당자, 즉 병사의 노동조건 향상과 확립.
5. 안전보장(세쿠리타스)에 필요한 종합 전략 확립.
6. 안전보장체제 유지에 필요한 재원 확보.
아우구스투스는 병역 기간을 개혁 초기에는 16년으로 정했다. 병역 자격 연령은 17세니까, 만기까지 근무했다 해도 33세다. 치세 말기에는 16년이었던 병역 기간이 20년으로 연장된다. 그는 동시에 고대에는 획기적인 퇴직금제도까지 확립했다. 또한 병사들이 토지와 현금 가운데 원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게 했다.
만기 제대자에게 주는 퇴직금 액수는 서기 6년에는 3천 데나리우스로 정착되었다. 13년치 본봉에 해당하는 액수다. 만기 제대자는 사회적으로 우대를 받았지만, 제대하면 다른 직업을 가질 필요가 있었고, 퇴직금은 그것을 전제로 한 경제적 보증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제국 전역의 방위력으로 처음에는 28개 군단을 두었지만, 서기 9년 이후에는 25개 군단으로 정착되었다. 25개 군단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만으로 편성된 군단만 헤아린 것이다. 1개 군단의 정원은 6천 명, 25개 군단이면 15만 명이다. ‘군단병’(레기오나리스)이라고 불린 이 15만 명이 제정으로 바뀐 뒤에도 국방의 주력이 되었다.
하지만 15만 병력만으로는 그 기다란 방어선을 지킬 수 없다. 그래서 갈리아인이나 게르만족으로 편성된 기병대 등의 비정규병을 ‘보조병’(아욱실리아리스)으로 부르면서도 로마군의 정규병으로 편입시켰다. 그들의 근무 기간은 25년이고 급료와 퇴직금도 지급되었으며, 만기 제대하면 로마 시민권도 주어졌다.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보조병’ 정원은 ‘군단병’과 같은 15만 명이었다. 그렇다면 단순히 계산해도 25년마다 15만 명의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새로 생겨나게 된다. 이 개혁으로 인해 먼저 방위비를 절약할 수 있게 되었고, 속주민에게도 자기 나라는 스스로 지킨다는 의식을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속주의 실업자 구제, 속주의 로마화 등의 여러 가지 이점을 얻게 되었다.
종합 전략
방어가 주목적이 된 로마군의 전략은 보조병이 버티고 있는 동안 군단병이 도착하여 결판을 내는 요격 체제였다. 모두 연결하면 지구를 두 바퀴 돌 수 있다고 할 만큼 거미줄처럼 쳐놓은 로마 가도는 이처럼 군용으로 건설된 것이었다. 30만 명이 채 안 되는 병력으로 어떻게 하면 그 넓은 영토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궁리에서 시작된 전략이었다.
제국 방위에서 주력을 맡은 로마 군단은, 그 규모가 28개 군단을 유지하고 있던 서기 9년까지는 다음과 같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것이 로마 시민으로 병역을 지원한 사람들의 근무지다. 그리고 추가로 군단병과 같거나 그보다 적은 수의 보조병을 현지에서 고용한다. ‘현지 고용’이기 때문에 보조병의 민족도 다양하다. 시리아 군사기지의 보조병 중에는 셈족 출신이 많았고, 라인강 연안 기지에 배치된 보조병 중에는 갈리아인과 게르만족이 많았다.
• 남부를 제외한 이베리아반도 전체에 4개 군단
• 라인강 하류 연안에 5개 군단
• 라인강 상류 연안에 2개 군단
• 고대의 일리리쿰과 달마티아(오늘날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지방에 5개 군단
• 도나우강 남쪽, 고대의 모이시아(오늘날의 세르비아) 일대에 3개 군단
• 고대의 시리아(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에 4개 군단
• 북아프리카 전역에 5개 군단
로마의 해군
군사대국 로마의 해군은 육군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지중해 일대를 패권 아래 넣은 뒤로는 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배들은 전투보다는 수송에 쓰이는 경우가 많았고, 그밖에는 로마의 감시망에 뚫린 구멍을 찔러 이따금 출몰하는 소규모 해적선단을 단속하는 해상 경찰의 임무만 맡게 되었다.
로마의 해군기지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두 군데였다. 아드리아해의 제해권을 유지하기 위한 라벤나(오늘날의 이름도 라벤나)와 나폴리만에 있는 미세눔(오늘날의 미세노)이다. 이 두 개의 주요 기지 외에 동지중해에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해군기지가 설치되었고, 서지중해에서는 카이사르가 해군기지로 만든 남프랑스의 포룸율리(오늘날의 프레쥐스)가 로마 군선의 정박지가 되었다.
악티움 해전을 끝으로 전투보다는 수송을 주로 담당하게 된 로마 해군은 구성원의 질을 유지하는 데에도 육군만큼 신경을 쓰지 않는다. 지휘관만 로마 시민이고, 선원이나 노잡이는 민족을 가리지 않았다. 복무 기간은 28년으로 정해져 있었다.
근위대 창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으로 돌아가겠다고 공언해놓고, 제정으로 나아가는 포석을 조용히 두어가고 있었다. 그가 단행한 군제개혁 중에서 이런 색채가 가장 짙은 것은 ‘근위대’(프라이토리아) 창설일 것이다. 군단을 두지 않는 본국을 방위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이고, 실제로는 본국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근위대 창설자의 본심이었을 게 분명하다. 말하자면 황제 반대파에 대한 억지력이다.
근위대는 9개 ‘대대’(코호르스)로 이루어져 있고, 1개 대대는 보병과 기병을 합하여 1천 명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근위병은 모두 9천 명이 된다. 연봉은 675데나리우스로 군단병의 세 배다. 복무 기간도 근위병은 16년으로 우대했다. 퇴직금도 5천 데나리우스다. 군복도 화려했다. 말하자면 로마군의 ‘꽃’이었다.
근위대의 총지휘권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있고, 실제로 지휘를 맡는 근위대장은 두 명이다. 9개 대대 가운데 수도에 주둔시킨 것은 3개 대대뿐이었다. 나머지 6개 대대는 이탈리아의 각지에 분산시켰다. 수도에 주둔하고 있는 3개 대대의 근위병을 위한 상설 막사도 짓지 않았다.
세제 개혁
어떤 사업이든 재원을 확보하지 않고는 지속되기를 바랄 수 없다. 방위가 주목적이 되었기 때문에 상비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아우구스투스는 방위비도 ‘상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현대식으로 말하면 목적세 신설이고, 이것을 포함한 조세제도 전체의 재편성으로 연결된다. 아우구스투스가 개혁하여 300년 동안이나 계속된 로마의 세제를 도표로 설명해놓았다.
속주민에게 부과되는 토지세는, 재산이 곧 토지였던 시대에는 재산세나 마찬가지였다. ‘노예해방세’가 로마 시민에게만 부과된 것은 이 세금이 속주를 갖지 않았던 시대부터 로마에 존재한 세금이었기 때문이다. 몸값의 20분의 1을 낼 수 있을 만한 생활력이 있다고 판정된 노예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관세’와 마찬가지로 로마인과 속주민이 똑같이 내는 간접세로는 ‘매상세’가 있다. 상품에 대해 부과되는 것으로, 일종의 ‘소비세’라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군단에서 만기까지 복무한 병사들에게 퇴직금을 지불하기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고대인의 개념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상속세’를 생각해냈다. 공제 범위는 6촌 이내의 혈연자로 한다. 로마인에게는 절친한 친구나 존경하는 사람에게 유산을 남기는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점을 노린 것이다.
군단이 있는 ‘황제 속주’의 국고는 늘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아우구스투스는 제 주머니를 털었다. 하지만 그 바로 다음에는 이런 기술이 이어진다. “서기 6년, 내 제안으로 군자금 제도가 신설되었고, 그 후로는 만기 제대한 병사들에게 주는 퇴직금은 이 자금에서 지급하게 되었다. 이 자금에는 나도 1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기부했다.”
흥미로운 것은 아우구스투스의 방식이다. 모자라면 우선 제 주머니를 턴다. 그리고 상속세를 신설해 재원을 확보했을 때, 그는 1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나 되는 거금을 기부했다. 이래서는 반대하고 싶어도 반대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는 퇴직금 지급을 위한 재원을 확보하는 데 무려 24년이나 되는 세월을 소비했다. 그동안 자주 제 주머니를 털었고, 그 사실을 널리 알렸으니, 문자 그대로 심모원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그리파
기원전 12년, 지난해에 착공한 ‘평화의 제단’을 장식하는 군상 돋을새김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때,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최고의 작품이 될 ‘팍스 로마나’가 이제 막 최종 단계에 들어가려 할 무렵, 51세의 아우구스투스는 평생의 친구이자 최고의 협력자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를 잃었다.
기원전 63년에 태어나 기원전 12년에 사망. 로마 제국의 확립을 지향하는 아우구스투스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믿을 만한 협력자였다. 17세 때 카이사르에게 발탁되어,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점찍은 옥타비아누스(나중의 아우구스투스)와 협력했다. 특히 군사면에서의 협력이 두드러졌다.
이탈리아 시골의 이름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군단에 지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그리파는 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열등감을 품지 않는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로서, 그 건전한 정신은 실로 로마인답게 실용적인 재능으로 발휘되었다.
전선의 보조부대 기지와 주력인 군단기지와 가도로 이루어지는 로마의 방어망은 아그리파의 전략적 안목과 그가 지휘하는 군단병이 없었다면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 독일의 대도시인 쾰른의 옛 이름은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인데, 로마의 군단기지로 출발한 이 도시를 건설한 사람이 바로 아그리파였다.
아그리파의 일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우구스투스의 생각이 실현되도록 도와주는 데 바쳐졌다. 군사만이 아니라 건설에서도 두 사람의 협력관계는 완벽하게 기능을 발휘했다. 로마의 도심 중의 도심인 포로 로마노 일대는 아우구스투스가 기획자인 카이사르의 생각을 이어받아 정비한 반면, 아그리파가 맡은 곳은 그 북쪽에 펼쳐져 있는 ‘마르스 광장’이었다.
아그리파가 맡은 것은 중앙 부분이었다. 아그리파는 우선 카이사르의 죽음으로 중단된 ‘사이프타 율리아’를 완성한다. 완성된 뒤에는 기획자인 카이사르의 뜻에 따라 공직자 선거 때는 투표소로, 평상시에는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제공되었다. 아그리파는 그 서쪽에 신전을 세운다. 모든 신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판테온’(만신전)이라고 불렀고,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개축하긴 했지만 오늘날까지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유일한 로마 시대 건축물이다.
아그리파는 판테온 남쪽에 로마 최초의 공중목욕탕인 ‘아그리파 목욕탕’(테르마이 아그리파이)도 건설했다. 목욕탕 내부는 그리스인 예술가들을 동원하여 벽화와 조각으로 장식했다. 이 목욕탕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일부러 ‘비르고 수도’를 놓았다.
‘목욕탕’ 서쪽에는 ‘아그리파 호수’(스타그눔 아그리파이)까지 만들었다. 호수 주위에는 나무가 늘어서 있어서, 석조 건물이 많은 이 일대를 푸른빛으로 부드럽게 감싸주었을 것이다. 판테온 북동부에는 ‘빕사니우스 회랑’도 세웠다. 이 회랑의 벽화에는 그가 만든 ‘세계 지도’가 아로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아그리파는 스토아 철학이 이야기하는 공공봉사 정신을 평생 동안 몸소 구현했다. 개인 재산도 공공을 위해 계속 써주기를 바란 것처럼 아우구스투스에게 모두 남기고 죽었다. 아그리파는 사적인 면에서도 아우구스투스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핏줄에 집착하는 아우구스투스는 조카이자 사위인 마르켈루스가 자식도 남기지 않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미망인이 된 외동딸 율리아의 재혼 상대로 아그리파를 택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의 우정과 충성심은 물론, 그의 건강도 의심하지 않았다. 굳게 믿고 있던 사람의 죽음은 갑자기 찾아왔다(*판노니아에서의 야전 생활 속에서 건강을 심하게 해쳐 그 여파로 죽게 되었다고 한다). 말타기를 좋아하지 않는 아우구스투스는 그때 아그리파가 머물고 있던 나폴리까지 말을 타고 달려갔지만, 이미 고인이 된 아그리파를 대면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마이케나스
아그리파가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이라면, 마이케나스는 ‘왼팔’이었다. 오늘날의 토스카나 지방에 해당하는 고대 에트루리아 지방의 유서깊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사회적으로는 ‘원로원 계급’에 다음가는 지위인 ‘기사 계급’에 속해 있었다. 나이는 아우구스투스보다 한두 살 위였던 것 같다.
다만 아그리파와 다른 점은 아우구스투스와의 만남에 카이사르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필리피 회전 때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 무렵 아직 옥타비아누스라고 불린 아우구스투스는 21세가 될까 말까 한 나이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에게는 전쟁터를 맡기고, 마이케나스에게는 외교를 맡겼다.
기원전 42년에 브루투스를 쳐부순 뒤, 기원전 31년에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쳐부술 때까지 10년 동안, 아우구스투스의 한 팔로 일관한 마이케나스의 활약상은 눈부실 정도였다. 우선 안토니우스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애쓰는 한편, 그 안토니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폼페이우스의 아들과 타협을 연출한다.
권력자의 뜻을 받들어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려면, 공직을 갖고 있는 게 오히려 불편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마이케나스는 공직 경력을 모두 희생했다. 기원전 30년 아우구스투스가 최고 권력자가 된 이후에도 마이케나스는 여전히 공식 직함도 실적도 갖고 있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건강이 좋지 않을 때면 에스퀼리노 언덕에 있는 마이케나스의 저택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비밀 교섭 역할을 폐업한 마이케나스에게 문화와 홍보를 맡겼다. 이것 또한 마이케나스에게는 딱 알맞는 역할이었다. 후세에 문화 예술을 옹호하는 것을 ‘마이케나스’, 프랑스어로 ‘메세나’라는 말로 표현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원래 부유한 집안 출신인데다 아우구스투스의 요청으로 이집트에 토지를 사서 큰 부자가 된 마이케나스는 그 재산을 문화 육성에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시인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라틴 시문학의 거장으로 불리게 된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가 잘 알려져 있다.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를 비롯하여 마이케나스의 살롱에 드나드는 문인들이 아우구스투스가 수행하고 있는 ‘팍스 로마나’의 ‘홍보’를 맡았다. 그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가고 있는 신생 로마를 기쁨과 긍지를 담아서 노래했다.
마이케나스가 죽자, 호라티우스는 자기가 죽으면 마이케나스의 무덤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했고, 이 유언은 그대로 실행되었다. 또한 전 재산을 아우구스투스에게 남긴 마이케나스를 본받아, 마이케나스한테 받은 산장도 황제에게 유증했다.
게르만
이 무렵부터 아우구스투스는 처음으로 카이사르가 남긴 표지를 어기는 정책에 착수했다. 그것은 로마 제국의 북쪽 방어선을 라인강에서 엘베강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이것은 그 사이에 낀 광대한 게르마니아 지방(오늘날 독일의 대부분 지역)과 거기에 사는 게르만족을 제압하여 로마 제국에 편입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엘베 강과 도나우강을 잇는 방어선을 확립하는 데 성공하면,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잇는 방어선에 비해 500킬로미터나 방어선을 단축할 수 있다. 로마군의 게르마니아 원정은 기원전 12년에 시작되었다. 도중에 자주 중단되긴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서기 9년, 최종적으로는 서기 16년까지 계속되었다. 서기 9년까지라 해도 무려 20년 동안 게르만족과 대결하는 상태에 있었던 셈이다.
게르마니아 원정이 시작된 기원전 12년에 아그리파가 죽은 뒤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을 맡게 된 것은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아들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였다. 의붓아버지와 의붓아들들의 관계는 아주 좋았다. 하지만 핏줄에 집착하는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의 자식이라 해도, 의붓아들들을 ‘양자’로 삼지는 않았다.
맏아들 티베리우스는 키케로의 친구이자 편지를 주고받은 상대로도 유명한 아티쿠스의 손녀 빕사니아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면서, 기원전 12년에는 한 살 된 아들을 두고 있었다. 아티쿠스의 딸은 아그리파의 첫 아내였으니까,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의 딸과 결혼한 셈이다.
둘째 아들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태어난 안토니아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결혼에서는 2남 1녀가 태어났다. 안토니아는 옥타비아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도 흐르고 있었다. 이것이 혈통에 대한 아우구스투스의 견해이기도 했다.
이런 견해에 따라,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의 죽음으로 다시 과부가 된 외동딸 율리아의 세 번째 배필로 드루수스가 아니라 티베리우스를 골랐다. 드루수스는 질녀인 안토니아와 결혼했지만, 티베리우스는 아무리 아그리파의 딸이라 해도 자기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여자를 아내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소원은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사내아이를 되도록 많이 얻는 것이었다. 최고 권력자 아우구스투스의 강요와 어머니 리비아의 권유에 티베리우스는 저항하지 못했다. 결국 사랑하는 아내 빕사니아와 이혼하고 율리아와 재혼했다.
게르마니아 원정에서 형은 도나우강 방어선을 확립하는 일을 맡았고, 동생은 라인강에서 엘베 강으로 방어선을 옮기는 임무를 맡았다. 양쪽 다 미개한 민족을 제패하는 어려운 원정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시작하기 전부터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수수하지만 착실하게 도나우강 이남을 제압해가는 티베리우스와는 달리, 드루수스의 게르마니아 전선은 작전부터 화려했다. 북해에서 남쪽으로 쳐들어가는 전법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고대의 트라이에크툼(오늘날의 위트레흐트) 근처에 운하를 파서 라인강과 에이셀만을 연결하고, 선단에 병사들을 태워 우선 바다로 빠진 다음 라인강보다 더 동쪽에서 북해로 흘러드는 엠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게르마니아의 심장부에 상륙한다는 작전이었다.
그래도 기원전 12년의 이 진격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엠스강 중류에 상륙한 드루수스 군대는 엠스강 동쪽을 흐르는 베저강에 도달했다. 게르만 부족들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베저강까지 진격한 것이다. 게르만족도 남방 민족인 로마인이 이런 전술로 나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게 분명하다.
이듬해인 기원전 11년, 젊은 장군 드루수스는 진격로를 바꾸었다. 라인강 연안의 기지 장텐에서 라인강을 건너 동쪽으로 진격하는 루트를 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해에도 로마군은 게르마니아의 심장부에 도달했다. 베저강 중류에서 겨울철 숙영지인 라인강 서쪽 기지로 돌아올 때는 다시 루트를 바꾸어, 북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10년, 드루수스는 드디어 최종 목표인 엘베 강까지 2년 만에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겨울에도 라인강까지 돌아오지 않고, 게르마니아의 심장부에서 겨울을 나는 작전이었다. 기원전 10년, 드루수스는 28세의 나이로 처음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만큼 아우구스투스와 로마인들은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행정개혁
한편 수도 로마에서는 53세의 아우구스투스가 32세의 티베리우스와 28세인 드루수스 형제의 진격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본국 이탈리아의 행정조직 개편을 끝내려 하고 있었다. 재편성을 단행할 때, 아우구스투스의 기본방침은 전체를 동시에 향상시키려 하기보다는 몇 개의 ‘핵’을 확립하여 그 ‘핵’만 중앙 정부가 통제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요즘말로 하면 ‘민간 활동’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북쪽의 알프스에서 남쪽의 메시나해협에 이르는 이탈리아반도, 즉 로마 제국의 본국을 11개 ‘주’(州)로 분할했다. 자를 대고 줄을 긋는 식의 분할이 아니라, 부족과 전통 및 풍습의 차이도 배려하여 이루어진 자연스럽고 무리가 없는 분할이었다. 오늘날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다. 단지 인구가 늘어 18개주가 되었을 뿐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주’ 분할은 중앙집권의 효율적 기능을 지향하는 동시에 지방분권을 확립하려는 의도도 지니고 있었다. 균형을 중시하는 로마인의 방식을 보여주는 예이고,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을 공존시킨 것은 효율성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수도 로마를 14개의 ‘구’(區)로 분할했다. 공화정 시대에는 4개 선거구밖에 없었던 수도 로마의 선거구가 14개로 늘어난 것은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민의 거주지역이 도심부에서 주변 지역으로 넓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각 구의 면적이 다르게 획정된 것도 거기에 사는 유권자 수를 고려하여 구분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의 수도’(카푸트 문디)가 된 로마는 이제 인구 100만 명의 도시다. 치안 문제를 방치해두면, 각자가 자위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 많은 임시직을 상설화한 아우구스투스는 경찰도 상설기관으로 만들었다. ‘경찰청장’(프라이펙투스 우르비)에는 원로원 의원 중에서도 집정관 경험자를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중요한 관직으로 여겨졌다는 증거다.
아우구스투스는 ‘소방청’(프라이펙투라 비길룸)을 설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방관은 7개 대대로 조직되었고, 1개 대대의 구성인원은 1천 명이었다. 수도 로마의 14개 구를 7개 대대가 맡았으니까, 1개 대대가 2개 구의 소방을 맡은 셈이다. 소방관으로는 해방노예가 많이 채용되었고, 소방대장에는 로마 군단에서 백인대장을 지낸 사람이 만기 제대한 뒤에 취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방청장에는 원로원 의원이 취임하는 예도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드루수스의 죽음
기원전 9년으로 해가 바뀌자마자, 4년 전에 착공한 ‘평화의 제단’이 완성되었다. ‘평화의 제단’ 남쪽 벽면은 황제와 그 가족을 묘사한 돋을새김으로 가득 메워져 있다. 거기에 새겨진 황제 가족 가운데, 그날의 제전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은 둘이었다. 한 사람은 3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그리파다. 그에게 ‘평화의 제단’은 묘비가 되었다. 또 한 사람은 머나먼 게르마니아 땅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드루수스였다.
게르마니아 전선은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었다. 여름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염원이었던 ‘로마군이 엘베 강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전선을 이끄는 드루수스는 이제 겨우 29세에 불과했다. 게르만족 정복은 전투에 서툴기로 유명한 아우구스투스가 전투의 달인인 카이사르의 결정에 거역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다른 어떤 전선보다도 게르마니아의 상황이 걱정이었다.
젊은 장군 드루수스의 군사적 재능은 역시 대단했던 모양이다. 우선 4년 동안 세 차례의 진격을 한 번도 똑같은 방식으로 되풀이하지 않았다. 또한 출발 지점도 세 번 다 달랐다. 마지막 원정의 출발점은 라인강 연안의 모곤티아쿰(오늘날 독일의 마인츠)이었다. 이것은 출발 지점에 대한 게르만족의 공격을 피하고, 도중에서 기다렸다가 로마군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게르만족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였던 게 분명하다.
불의의 사고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한창 행군하고 있을 때 일어났다. 개선 군단을 이끌고 있던 드루수스가 갑자기 말에서 떨어졌다. 그것도 단순한 낙마가 아니었다. 군의관이 드루수스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대담한 처치를 취했다면, 적어도 죽지는 않았을 거라고 한다. 낙마 사고로 부러진 다리는 금세 악화되었다. 결국 적에게 등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젊은 장군은 네 살 위인 형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드루수스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부하 장병들은 게르마니아 땅에 총사령관도 함께 묻기를 원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유해를 로마로 가지고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도 유해를 로마로 송환하는 데 동의했다. 장병들이 교대로 짊어지고 나아가는 관 옆을 티베리우스는 말도 타지 않고 걸어서 따라갔다. 파비아부터는 관을 마차에 싣고, 아우구스투스가 탄 마차가 그 뒤를 따라 로마로 향했다.
티베리우스는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고, 파비아에서 동생과 영결했다. 티베리우스는 곧장 라인강 방어선으로 돌아갔다. 드루수스의 죽음은 게르만족도 알았을 게 분명하다. 겨울에는 그들도 싸움을 걸어오지 않지만, 봄이 되면 공세로 나오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일단 정지 상태에 있는 도나우강 전선은 잠시 놓아두고, 라인강 방어선을 지키는 임무가 티베리우스에게 맡겨졌다. 이리하여 ‘평화의 제단’은 완성되자마자 두 공헌자의 묘비가 되었다.
티베리우스의 은퇴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자식 중에서도 형 티베리우스보다 동생 드루수스를 더 사랑했다고 한다. 폐쇄적인 성격의 아우구스투스가 개방적인 드루수스를 더 좋아했다 해도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갖는 자연스러운 경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유능하다는 점에서는 티베리우스도 마찬가지였지만, 드루수스는 핏줄을 잇는 데 집착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좋은 협력자였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을 잇는다는 점에서 티베리우스는 전혀 좋은 협력자가 아니었다. 티베리우스는 사랑하는 아내와 이혼당하고 황제의 외동딸과 재혼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결정적인 면에서 부부는 서로 맞지 않았다. 티베리우스도 훗날 그의 언행이 보여주듯이 로마 제일의 명문 귀족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어쨌든 아우구스투스는 겨울철 휴전기를 이용하여 수도로 돌아온 티베리우스를 기원전 7년의 집정관에 추천했고, 티베리우스는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봄이 되자마자 다시 게르마니아 전선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동방의 아르메니아 왕국이 다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동방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사이 좋은 동생을 잃고 고독감에 사로잡혀 있던 티베리우스는 이 명령을 받고, 난생처음 중대한 결심을 했다. 36세의 티베리우스가 57세인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거부하는 동시에, 한 개인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격분했고 공직을 버리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선고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굴하지 않았다. 어머니 리비아가 아무리 설득해도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도망치듯 수도를 떠난 티베리우스는 그 길로 로도스섬으로 건너갔다. 자발적인 은퇴였다. 혼자 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아내 율리아와는 사실상의 이혼이었다. 57세의 아우구스투스는 이제 광대한 로마 제국을 혼자서 통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