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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독일기 Dec 12. 2022

겨울철 나는 물고기를 뜯어

에세이| 한파 몰아치기 전 먹는 음식에 대하여

 

인사도 없이 그 계절이 찾아왔다. 옷을 두껍게 껴입어도 옆구리를 쑤셔대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움츠린다. 이런 혹한기를 견디려고 나만의 홀리한 월동의식을 치르는데 11월과 12월 사이 매년 스키장 오픈 타이밍에 맞춰 과메기를 주문한다. 싱싱한 미역으로 기름기 좔좔 흐르는 살결을 돌돌 말아 초장에 찍어 먹을 생각에 벌써부터 입안에 화개장터가 열리고 영혼이 충만해진다. 야호. 노란 배춧잎 위에 쫀득한 고기와 입을 알싸하게 하는 마늘, 그리고 아삭아삭 씹히는 파의 콜라보는 그야말로 미.쳤.다. 어릴 적 입이 짧아 냄새나는 음식을 피한 터라 부모님이 시장에서 통과메기를 사 와 집에서 오순도순 모여 껍질 까며 서로 입에 먹여다 주는 풍경이 이해가 안 됐다. 비린내 풍긴 손에 욱여넣어진 과메기를 내뱉어 등짝이나 맞던 내가 이 혐오 음식을 매년 그리워할 줄이야.



 "용하다는 분이 그러는데 넌 물 근처에 살아야 한데." 엄마가 어디서 듣고 온 점쟁이의 말에 비웃었지만 집을 나와 기숙사 생활을 하고 고향과 400km 떨어진 군부대 초소에서 얼어붙은 서해바다를 보며 젊음을 허망하게 보내니 입맛이 달라졌다. 휴가 나와 허겁지겁 먹은 신선한 해산물은 철조망 길을 도느라 건조해진 피부를 촉촉하게 해 주었고, 육회나 회 같은 날 것의 음식은 반복된 관등성명과 경직된 구조의 부조리에 썩어버린 뇌를 정화시켜 새 피를 돌게 했다. 그리하야 金 속성 불효자는 심신이 허기진 2년을 견뎌내니 진짜 사나이가 되긴커녕 해산물 집착남으로 다시 태어나버렸다. 회를 먹으러 가면 한 번에 두세 점 집거나 남은 회를 초장에 야무지게 비벼 마무리하는 안주킬러 본능으로 술자리에서 이선균의 맥주 거품과 더불어 인성 논란을 몰고 다닌다. 물 근처에 살진 않아도 바다생물을 포식해대는 걸 보면 어쩌면 사주나 토정비결은 조상님들이 차곡차곡 쌓아둔 빅데이터가 아닐까 싶다. 아님 말고. 헤헤.



 겨울철 과메기에 술이 빠질 수 없어 깔끔한 준마이나 달콤한 청하와 잠깐 외도했지만 역시 쓰면서도 달달한 소주가 최고 존엄이다. 특히 유리병에 안개 내린 소주는 안주계의 BTS라 술자리를 콘서트장으로 바꿔준다. K-초록봉을 이모에게 열심히 흔들다 보면 꽁꽁 언 몸과 마음은 어느새 녹다 못해 뜨거워진다. 보드카가 세상을 재밌게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러시아 형님들이 불곰과 친하게 어깨동무하는 짤을 보거나 얼어붙은 호수에서 맨몸 수영하는 영상을 보면 그들은 불 속성이 패시브고 보드카를 마시면 파워업 한다는 게 빈말이 아니란걸 새삼 느낀다. (참고로 러시아는 여성 평균 수명보다 남성 평균 수명이 10살 적다. 이유는 보드카! 크으.. 화끈한 성님들!) 여하튼 한국에서만큼 과메기와 소주 페어링이 국룰이고 따뜻한 사람들과 옹기종기 모여 담소 나누는 게 겨울철에 누리는 행복이라 정의했다. 서울로 올라와선 딱히 맛있게 하는 가게를 찾지 못한 터라 당당히 과메기 먹으러 가자고 말 못 하는 나 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 굳게 믿고 있다. 소외된 샤이 과메기파여, 모두 왼발을 한 보 앞으로!



 지역 특산 음식을 자랑하는 입맛라이팅은 정치관이나 선입견을 끼고 볼까 봐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라고 말하기 껄끄럽다. 주위 사람에게 맛보기 영업을 하는 것만이 반건조 생선을 먹는 유일한 희망이다. 스치면 파상풍 걸릴 것 같은 간판을 매단 가게에서 술 먹는 분위기를 좋아해 그녀의 데이트 옷차림과 어울리지도 않는 곳을 잘도 이리저리 끌고 다녔었다. 희미해진 기억 속 한때 가장 친했던 그녀는 처음에 냄새나는 과메기를 집는 것조차 주저주저하다가 시간이 흘러 어느새 소주가 채워진 잔을 한입에 털고 입술 옆에 초장을 살짝 묻힌 채 포장 맛집이 있다며 좌표를 찍었다. 그녀가 새로운 맛에 눈을 뜬 건지, 내게 맞춰 배려했는지 애써 물어볼 순 없지만 서로의 입맛 세계관이 합쳐져 함께 음식을 덕질하는 테이블은 한겨울에 다정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사진출처 : 영덕 봉화뉴스




 청어는 모진 찬바람에 얼어붙고 따뜻한 햇살에 녹아가길 반복하면서 점점 과메기로 숙성되어 속살까지 풍미를 머금는다. 인연이란 과메기 같은 게 아닐까? 맛을 내려면 기꺼이 위험천만한 세월을 보내야 한다. 얄팍한 모방범들은 나서서 다치기는 싫고 뒤에서 달콤한 이득을 취하려고 뭐든 갖다 대 포장해보지만 공허한 껍데기뿐인 3류작과 보기 민망한 아류작만 남긴다. 그래서 입맛을 맞춘다는 건 서로 입술을 맞추려는 짜릿함보다 훨씬 큰 의미로 다가온다. 뒤틀린 사이라도 오늘 뭐 먹고 싶냐는 말을 먼저 듣는다면 소중하게 생각하자. 아무리 싸워도 갑자기 같은 음식을 먹는 기적은 전생에 거북선에 못 한 번쯤 쳐야 나오니깐. 그게 아니라면 분에 넘치는 마음을 받고 있거나. 과메기 도그마에 빠져 방심하다 인사도 없이 감성이 불쑥 찾아왔네. 대화가 마르지 않을 것 같았던 계절이 오긴 왔구나. 자자자. 배고픈 사람은 어여 젓가락을 들자. 올해도 고생한 나를 위해 촉촉한 과메기를 씹으며 겨울바다를 음미해야지. 반짝이는 미역 위에 고기 한 점을 올려 입에 밀어 넣자 문득 책 제목이 요상한 베스트셀러가 생각난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뇨. 뇸뇸. 에이~ 그럴 리가요? 물고기는 분명 존재합니다. 이토록 훌륭한 영양소 공급원인걸요. 냠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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