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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독일기 Feb 10. 2023

우린 어쨌든 만나게 되어있다

책 |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은정을 둘러싼 세상은 빛을 잃었다」 이 문장 하나로도 읽기 잘했다고 여긴다. 빛을 잃은 인물과 달리 내 주위는 빛으로 감싼 듯 따뜻했다. 온갖 이미지와 현란한 프레임 전환으로 때려 넣는 영상과 달리 소설가는 글이라는 단 하나의 매개로 독자랑 소통해야 한다. 제한된 단어와 페이지로 사람의 마음을 홀린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책을 고르고 펼치고 수백 페이지를 읽는다는 것. 그중 소설의 인물을 따라간다는 건 내겐 어색한 일이다.


 작가는 코로나 시대에 펜을 들었다고 한다. 사람들 간 오가는 대화가 비대면으로 바뀌자 저자는 사라진 대화를 논하려고 아니, 정확히는 인간성을 파고드는 이야기들을 많이 쓰려고 노력했다.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고통, 아버지를 보낸 딸의 이해. 몽골과 한국. 과거와 미래. 독백과 대화. 소설과 연극. 넘나드는 시선에 따라가다 보면 거울처럼 반사되어 어느새 빛이 나는 무언가를 만나게 되어있다. 인간이란 참으로 평범하다는 걸.


 저자는 이렇게 속삭인다.


"우린 많은 것을 이룩했지만 정작 우리는 스스로 완성되지 못했다. 우리의 세계관은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 해야만 비로소 커져만 간다."


 자신을 이해하기보다 타인의 세계를 거울처럼 비춰야만 우리는 우리의 객관성을 발견해 간다. 사람은 평범하기에 다른 무언가에 기대어 살아간다. 여기서 말하는 언어와 이야기도 마찬가지. 우리는 가닿을 수 없는 의미를 찾으려고 끊임없이 콘텐츠를 섭취한다. 하지만 묻고 싶다. 의미와 이해가 있어야만 우리는 실존하는 걸까?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누군가에게 이해받길 위한 일종의 구애의 몸짓인가?


 사실 현대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있어빌리티 한 멜랑꼴리 한 문체들 속에 무언가 있는 척하지만 정작 들여다보면 그들도 영상매체와의 경쟁을 의식한 나머지 심오한 세계관을 그리려고 하니깐. 그런 이야기는 자연스레 어색하게 읽힐 수밖에 없어 인물의 감정을 헤아리기보다 서사 그 자체가 중요시되어 읽는 사람을 곤혹스럽게 한다. 인물에 집중하지 못하고 표류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도 바로 이런 결을 따라갔기 때문이리라.


 읽기가 불편했고 기억에도 잘 남지 않지만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당신에게 이 소설은 어떤 세계로 연결시켜 주었나요? 어떻게 읽으셨어요?" 연초라 빛나는 자리에 이다지도 흐릿한 질문을 던져본다. 금요일 오후 1시, 나는 우연의 충돌을 기대한다. 객기라 할지라도 서로의 우연은 함께 하는 한 사연이 생길 거라 믿으니깐. 평범한 미래를 그리고 싶은 우린 어쨌든 만나게 되어있다.


한줄평 : SF 소설이 유행이긴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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