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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시 Oct 14. 2018

탈코르셋을 위한 반코르셋

최선을 향하기 위한 차선의 페미니즘

구시대적 사고에서 소위 말하는 '여성성'이라는 것을 지금은 코르셋으로 규정짓는다. 긴 머리와 하늘하늘한 치마로 상징되는 그것들은 여성이 정말 자신의 특성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조신하고 어여쁜' 것으로 규정되고 덧입혀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코르셋을 벗어던지고자 하는 탈코르셋 활동이 최근 활발히 진행되었다. '여성적이다'라는 수식어로 대변되던 옷과 머리, 화장 등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탈코르셋 운동과 '반코르셋a'의 차이 사이에서 나는 잠시간 혼란을 겪었다. 가치관의 일종인 '코르셋'에 대한 반대는 가시적으로는 그 코르셋의 대상인 화장, 옷, 머리에 대한 반대로 나타난다. 이러한 코르셋의 대상을 '코르셋a'라고 칭하자. 그렇다면 여기서 코르셋에서 자유로워지는 '탈코르셋'과 코르셋a를 반대하는 '반코르셋a'는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


예를 들어보자. 여성 B는 신체에 완전히 달라붙는 미니스커트를 입었는데, 그것은 타인에게 보여주거나 인정받기 위함도, 사회의 시선 때문도 아닌 B 본인의 내적으로 우러나온 미적 기준에 부합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니스커트는 코르셋a에 해당하고, 탈코르셋 운동을 진행하는 이에게 비판받거나 스스로 껄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B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택한 건데 탈코르셋에 위배된다면, 이것은 맹목적인 반코르셋a가 아니냐고.


코르셋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유로워지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 자유는 코르셋a를 선택할 자유 또한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 코르셋a를 거부하는 '반코르셋a'를 과연 '탈코르셋'의 동의어로 볼 수 있는가?


내가 내린 답은 '볼 수 없다'였다.

그렇다면 '반코르셋a'는 탈코르셋의 동의어가 아니므로, 이를 거부해야 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다'다.


'반코르셋a'의 의의를 계속 고민한 결과, 이는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으로서는 기능한다는 결과를 얻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궁극의 지향점은 '탈코르셋'이다. 누구도 성별에 의한 옷차림, 머리, 치장, 행동거지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탈코르셋으로 나아가는 과정에는 두 가지 관문이 존재한다.


첫째, 내가 선호하는 차림새는 정말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맞는가? 혹시 미디어에서 이것이 다량 노출되어서, 많은 여성들이 이러한 치장을 하고 있어서, 이것이 권장되어서 은연 중에 영향을 받아 나도 이러한 차림새를 선호하게 된 것은 아닌가? 진정한 자유의지의 구별을 위해서는 코르셋, 즉 고정관념이 없는 세상이 먼저 구현되어야 한다. 그런 후에야 어떤 차림새를 선택하든, 그것이 내가 정말 좋아서 선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완전한 탈코르셋의 세상은 반코르셋a을 거치지 않고도 실현될 수 있는가? 원론상 가능이야 하겠지만, 그러한 확률은 다소 낮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여성과 남성 간 평등의 실현이 온건하고 평화로운 방법으로도 실현될 가능성은 있으나, 미러링 등 래디컬한 방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실현되기 힘든 것과도 비슷하다. 평등을 향한 지극히 평화로운 목소리들은 차별이 공고화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결국 묻혀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래디컬 페미니즘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평등한 사회를 향한 목소리는 끊임없이 있어왔지만 묻혀왔었고, 이렇듯 몇 십 년 동안 해결되지 않던 수많은 차별의 잣대를 래디컬 페미니즘은 한 순간에 바꿔놓았다. 물론 목적을 잃은 무조건적 비난과 혐오가 '좋다'는 건 아니다. 다만, 혐오를 낳을지언정 마이너스 요소와 플러스의 요소 중 플러스가 더 크다면, 그것의 의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반코르셋a'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탈코르셋'이 궁극의 지향점이고, 코르셋a를 거부·반대하는 것은 어쩌면 또 하나의 코르셋(코르셋a를 거부해야 한다는 코르셋)을 낳을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반코르셋a'를 거치지 않고 탈코르셋에 도달하려면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반코르셋a는 일종의 과정적 퍼포먼스다. 여성들이 스스로 코르셋을 거부할 수 있다는 어떤 퍼포먼스를 꾸준히 보여주지 않으면, 미디어 등에 의해 코르셋이 공고화되는 속도를 관념적 탈코르셋이 퍼지는 속도가 따라잡기란 정말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탈코르셋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적 수단으로 '반코르셋a'이 존재하는 것이다.


탈코르셋을 위한 반코르셋a를 포함하여, 수많은 페미니즘의 구현 수단은 이와 같이 최선을 위한 '차선'인 경우가 많다. 당장의 차별 앞에서, 평화적이지만 너무나 느린 최선은, 부작용이 있지만 효과를 보여주는 차선보다 못한 존재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차선을 택하거나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탈코르셋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반코르셋a가 일어나는 것은 어느정도 필요한 수순이라고 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반코르셋a의 의의가 전도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탈코르셋으로 나아가기 위한 단계라는 의의를 기억해야 한다. 치마에 대한 무조건적 비난, 긴 머리나 화장에 대한 무조건적 비난으로 이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본래의 의미를 기억하지 못하는 비난은 그저 비난을 위한 비난에 그치기 때문이다.


핵심은 '화장을 하면 안된다, 다이어트를 하면 안된다'가 아니라, '나의 자유의지로 화장을 해도 되고 다이어트를 해도 된다. 하지만 나의 선택과 의지에 의해 한 일이라도 그것이 사회에 영향력을 가짐을 기억해야 하고, 그를 행하는 수많은 개인이 예쁘고 말라야 한다는 문화(코르셋)를 공고화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며, 자유의지라고 판단하기 전에 반대급부의 것을 선택할 권리 또한 내게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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