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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시 Nov 20. 2018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볼테르,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속 책갈피[책리뷰]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캉디드(Candide)는 프랑스어로 '천진하다'는 뜻이다. 스승 팡글로스에게서 배운 낙관주의를 그대로 신봉한 채, 이 세상은 존재할 수 있는 '최선의 세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청년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름이다.


하지만 늘 행복 속에서 지내던 이 청년은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퀴네공드를 사랑한 죄로 남작의 성에서 쫓겨나고 만다. 캉디드는 세상의 온갖 역경이란 역경은 다 겪으면서도, '이것이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는 팡글로스의 낙관주의적 말을 끊임없이 되뇌인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지금이 최선이라고 하기엔 불행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캉디드 개인적으로도, 전쟁과 싸움으로 얼룩진 세계에도 말이다. 불행한 일마저 행복을 위한 그림자라고 하기엔, 행복이 그 그림자에 잡아먹힐 판이다.

그래서 캉디드는 말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면 다른 세계는 도대체 어떤 곳이란 말인가?"

 

공주 신분에서 노예로 전락했던 노파, 비관론자 마르틴을 만난 이후로는 더욱 그렇다. 노파는 캉디드에게 말한다.


"만일 자기 인생을 이따금씩 저주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또 자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를 바다에 거꾸로 처넣으세요."


하지만 천진한 캉디드로서는 낙관주의를 손바닥 뒤집듯 바로 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아무리 불행한 사건을 겪다가도 조금만 상황이 나아지면 다 잘되어 가고 있다, 모든 게 최선이다, 하고 말하고 만다. 그러나 끝끝내 (작품 외적으로) 설계된 우연에 맞춰 유랑하던 이 천진한 청년도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된다. 탁상 앞에서 나온 깨달음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나온 깨달음이다. 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이 말과 동시에, 캉디드가 갑자기 어른이 되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대학 신입생 시절에 읽은 적이 있으나, 그때는 모호하게만 다가왔다. 이 캉디드란 친구는 그래서 무슨 입장을 취하고 있는 건지, 갑자기 밭은 또 왜 간다는 건지, 물론 지금도 어렵지만 좀 더 딱딱하게, 경직되어 의미와 구도를 도출해 내기에 바빴던 그때는 더 그랬다.


지금은 그래도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캉디드의 낙관주의적 스승 팡글로스는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명제를 신봉했지만, 때로는 원인 없는 결과라는 것도 일어난다. 또한 그 원인은 단 하나의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결과 또한 마찬가지다. 원인에 자동으로 딸려 오는 단 하나의 결과는 없다는 뜻이다.


하나의 원인에는 무수한 가능성이 수반되고, 그 중에서 어떤 결과를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의지다.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이것보다 더 나은 상황은 없을 거라며 가만히 있지 말고 자신의 생은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기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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