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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시 Dec 10. 2019

그녀는 왜 그 엽서를 주었을까

짧은 소설 #1

붉은 엽서였다. 배경은 진한 버건디색으로 칠해져 있고, 가운데에는 단발의 여자가 있었다. 웃는 것인지 무표정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여자는 비스듬하게 서서 꽃을 보고 있었다. 배경보다 더 진한 붉은 동백꽃이 여자의 앞에 가득 피어나 있었다.


주경은 엽서를 돌려 뒤에 쓰인 편지를 읽었다. 검은 펜으로 세진의 근황이 쓰여 있었다.


요즘은 아이유의 시간의 바깥을 즐겨 들어. 책을 안 읽은지 오래 되어서 어제는 서점에 다녀왔어.


마지막에는 세진 자신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작은 손그림도 있었다.


세진은 항상 편지에 자신이 즐겨듣고 있는 음악이나 보고 있는 TV 프로그램, 읽은 책 같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곤 했다. 주경은 그걸 읽으며 세진이 어떤 사람인지 업데이트 해 나갔다. 주경이 줄곧 업데이트한 세진의 인상은 '한결같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 그게 뭐예요?

- 친구가 준 엽서예요.

- 여행 다녀왔나봐요? 예쁘다.


세진이 여행을 다녀와서 준 건 아니었지만, 주경은 부인하지 않았다. 주경은 세진과 벌써 일 년 째 편지를 주고 받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미 익숙해진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면 돌아오는 반응에 대해 항상 해명 아닌 해명이 필요했다. 주경이 아주 낭만적이고 문학적인 성격이라거나, 주경에게 아주 애틋한 사람이 있다거나.


편지를 보낸다는 발상 자체가 어쩌면 낭만적이고 문학적이었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경은 그런 수식어가 마치 꿈같고 아름다운 것에 취해 있다는 말로 들려 어딘가 불편했다. 주경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엽서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주경의 회사는 합정 근처의 골목에 있었다. 식품 관련 앱을 만드는 작은 스타트업이었고, 주경은 거기에서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식품공학과를 졸업한 주경으로서는 전공을 살린 것도, 안 살린 것도 아닌 셈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주경은 엽서를 다시 꺼내들었다. 붉은 엽서의 그림을 보며 왜 세진이 이 엽서를 자신에게 주었을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진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화려한 느낌의 엽서를 보낸 적이 없었다. 세진의 편지는 모두 무늬 없는 종이나, 은은하고 아기자기한 편지지에 쓰였다. 그런데 강한 인상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그것도 강렬한 붉은색의 엽서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엽서는 주경과도 어울리지 않았고, 세진과는 더 어울리지 않았다.


주경이 기억하는 세진의 모습 속에는 웃고 있는 얼굴이 많았다. 편지로 근황을 전하고는 있지만 세진을 실제로 마지막으로 본 것은 4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처음 것은 6년 전이었다. 두 사람은 영미문학 학회에서 만났다. 재수를 한 주경은 1학년, 세진은 2학년이었다. 세진은 1년 간 학회 활동을 하고 나서 학회 집행부로 2년째 활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입학 초 주경은 대학에 왔으니 뭐라도 하자는 생각에 급하게 아무 학회나 기웃거렸는데, 그 중 하나가 영미문학회였다. 처음에는 영미문학회 말고도 식품공학회, 영화동아리, 사회과학학회까지 여러 동아리나 학회를 기웃거렸었다. 그러다 결국 오픈세미나에 갔다가 선배들에게 설득당해서 최종적으로 가입하게 된 게 영미문학회였다.


가입하긴 했지만 주경은 타고나길 말을 잘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최소한 있었으니 학회에도 든 것이긴 하지만, 이야기 속에 자신의 말을 얹기란 쉽지 않았다. 주경은 그렇게 꼬박 두 달을 아무 말도 못하고 매주 세미나에 앉아만 있다가 왔다.


그러다 주경이 처음 입을 연 것은 세진이 발제를 한 날이었다. 세진과 소준이 공동 발제자였는데, 소준은 주경의 같은 과 동기이기도 했다. 노트북이 고장난 소준은 도서관 컴퓨터로 발제문을 썼고, 주경은 그 옆 컴퓨터에서 과제를 했다.


소준은 피씨에 메신저를 깔아두고 세진과 메시지를 주고 받고 있었는데, 대화 양상을 보니 세진이 발제 방향에 대해 아주 긴 메신저를 보내면, 소준은 그에 좋다, 대박이다 등의 말로 추임새만 넣고 있었다.


- 세진 선배가 너 안 싫어해?

- 세진 선배가 누구를 싫어한다는 건 생각도 못해봤는데. 싫어한다면 그 사람이 무조건 나쁜 사람이겠지.

- 그럼 네가 나쁜 사람이네.

- 내가 왜?

- 너 지금 세진 선배한테 얹혀서 프리라이딩하고 있는 거지? 이 발제문 다 세진 선배가 보낸 톡 복붙하는 거지?

- 뭐? 아냐.


소준이 발제문을 쓰는 걸 옆에서 보면서 미리 읽어보고 생각도 한 터라, 세미나에서도 하고 싶은 말이 꽤 있었다. 그런데 좀처럼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뭔가 대단한 말이나 특별한 말이 아니면 입 밖으로 낼 자신이 없었다. 입을 조금씩 달싹여 보긴 했지만, 더 자신감 있는 회원들이 먼저 목소리를 내서 주경의 말은 다시 입 안으로 사라지곤 했다.


- 주경 학우는 탕수육 찍먹이에요, 부먹이에요?


그러다 주경이 처음 발언이란 걸 한 것은, 세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명분을 통해서였다. 세진은 아주 쉽고 대답하기 편한 질문을 던졌다. 주경은 어떤 수식어와 함께 할지, 어떤 끝맺음으로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는, '찍먹이에요' 하는 대답을 했다.


- 저는... 찍먹이에요.

- 저도 찍먹이거든요. 그런데 가끔씩 이런 질문도 전에 이미 소스가 부어져서 나오는 경우도 있죠. 그런 것도 사회의 흐름에 대한 속도 차이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어요. 사실 어렸을 때를 떠올려보면 거의 부어져 나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찍먹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사람들 사이에 공유가 되면서 소스와 탕수육이 분리되어 나오는 곳이 많아진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예전에는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지금은 아닌 것을 받아들이는 속도 차이. 그런 속도 차이를 실감해 본 다른 경험 혹시 있나요?


주경은 세진의 두 번째 질문에 대답한다는 명목으로 얼결에 다시 입을 열었는데, 생각보다 말이 술술 나왔다. 정돈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발언이라는 것을 시작하고, 점점 누가 자신을 지목해서 묻지 않아도 입을 열게 되었다. 그러자 활동에도 점점 재미가 붙었다.


그 날의 일이 아니더라도 세진은 항상 아주 친절했다. 주경이 발제를 맡게 되었을 때 참고하면 좋을 책이나 호평 받았던 발제문 샘플을 보내주기도 했고, 활동이 마무리될 때 주경을 포함한 학회원 전원에게 손편지를 주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학회 뒷풀이 때 먼저 말을 편하게 하라며 다가와준 것도 세진이었다.


세진은 참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런 것들이 다시 생각난 건 학회 활동이 끝나고 나서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앞으로의 일과 지금의 일을 생각하다 대학 생활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문득 세진이 생각났다. 분명 대학생활 중에 마주친 사람도 스쳐간 사람도 많았는데, 세진은 유독 더 강하게 생각이 났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세진 같은 사람은 흔하지 않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진의 번호가 지워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번호는 남아 있었다. 프로필을 눌러 세진의 카카오스토리에 들어가보니 사흘 뒤가 생일이라고 했다.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건지, 추억 속 감상에 취했던 건지 주경은 세진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오랜만이라고, 선물을 보내고 싶은데 주소 좀 알려달라고. 며칠이 지나고 나니 그때의 자신이 다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때는 그렇게 세진한테 무언가를 주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주경은 세진에게 책 한 권을 보냈다. 책 사이에 편지를 써서 함께 끼워 보냈다. 며칠이 지나 세진에게 답장이 왔다. 편지에 대한 답을 메신저로 하기가 어쩐지 민망해서 주경은 다시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두 사람의 편지 송수신이 일 년 째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주경은 집에 와서 책상 앞에 엽서를 세워 두었다. 처음에는 편지 내용이 보이게 세웠다가, 다시 뒤집어서 그림이 보이게 두었다. 붉은 엽서. 세진은 왜 이 엽서를 나에게 주었을까? 이 단발 머리 여자가 나랑 닮았나? 하지만 나는 단발도 아니고, 설사 단발이었더라도 이런 이지적인 이미지는 전혀 아닌데. 아니면 나와 붉은 색이 잘 어울리는 걸까. 나에게 나 자신은 맹숭한 이미지지만, 세진에게 나는 이런 붉은 강렬한 색인 걸까?


주경은 서랍을 열고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하늘 그림이 뒤에 옅게 그려진 종이였다.


안녕, 세진아. 얼마 전에 스탠드를 하나 샀어. 유튜브에서 은은한 노래 플레이리스트 댓글을 보는데, 누가 은은한 조명을 켜고 이 노래를 들으면서 창밖을 보면 기분이 정말 좋아진대. 나는 지금 은은한 조명을 켜고, 그 노래를 들으면서, 창밖을 보는 대신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그 뒤로 자신의 근황과 최근에 본 영화, 사람 사이에서 느낀 것들에 대한 것을 두서 없이 적었다. 편지를 마치면서 주경은 추신을 남겼다.


P.S. 엽서도 잘 받았어. 그림이 매력적이더라. 그런데 나한테 줄 편지지로 왜 이 엽서를 고른 거야?


세진에게서 답장이 온 것은 이 주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세진 역시 자주 듣는 음악과 하루의 일과, 고민 같은 것을 쓴 뒤 추신을 남겼다.


P.S. 엽서 여러 장을 샀는데, 그 중 그 엽서만 할인을 안하던 거였어. 그래서 그 엽서를 너한테 보낸 거야. 그림은 내가 좋아하는 일러스트의 그림인데, 다른 곳에서 못 보던 거라 골랐어. 매력적이라니 다행이다.




<우리에겐 아직 공간이 있어>는 짧은소설 쓰기 프로젝트입니다. 일상을 짧은 소설, 콩트, 손바닥 소설로 기록해 모아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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