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고대했던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들과 나는 익숙한 도시에서 낯선 해변으로, 겨울에서 여름으로,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건너왔다. 그 동안 나는 마음이 바짝 말랐지만 갈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바빴었다. 겨우 삼일 얻어서온 휴가의 첫날, 긴장이 풀렸는지 오한을 동반한 목 감기와 생리통을 함께 얻었다. 몸에 찾아온 불청객들은 야외 수영 후 몸이 젖은 채로 털어 넣는 맥주의 행복을 앗아갔다.
세 친구들은 수영도 못하면서 물에 둥둥 떠다니며 아이처럼 웃었다. 물론 물장구 사이사이 비치베드에서 혼자 있는 내 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지혜야' 하고 이름을 불러주었다. 나는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그들을 오래 지켜보았다.
친구들은 끝없이 맥주를 마셨다. 동남아 여행의 수분 충전은 역시 맥주 아니겠냐며 333, 타이거, 산미구엘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캔맥주를 콸콸 부어 마셨다. 나는 감기약을 포기하고 그들의 음주에 동참했다. 저녁에는 여행의 첫날을 기념하며 샴페인을 마셨다. 그리고 면세점에서 안 사면 손해인 24달러짜리 보드카를 주스와 섞어서 비타민 보충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남김없이 마셨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취해 있었다. 서로 지난 근황과 옛 추억들을 뒤죽박죽 늘어놓았다. 요즘 좋아하는 노래를 나눠 듣다가 왈칵 눈물을 쏟기도 했다. 유행이 한참 지난 실없는 농담에 배가 당기도록 웃었다. 흥이 오른 사람은 밤 수영을 했다. 나는 수영하는 술 취한 바보들을 구경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 다음에 어떻게 침대로 와 누웠는지 기억 나지 않는다. 군데군데 끊어진 기억 속에서 H가 다정한 목소리로 '지혜야, 들어가서 자' 하고 내 어깨를 쓰다듬었고, Y는 '이 노래가 자장가네' 하면서 듣던 노래의 볼륨을 줄여주었다. S는 베개 위에 깨끗한 수건을 올려놓고 내 자세를 고쳐주었다.
지금은 일찍 일어나 그들 중 한 명이 여행 선물로 준 <다름 아닌 사랑과 자유>라는 책을 보고 있다. 반려동물과 나눈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는 지난 가을 방울이를 떠나 보낸 뒤 동물과 마주치지 못하고 관련된 주제를 모두 피해왔었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왠지 모르게 용기가 나서 책을 꺼내 읽었다. 단숨에 책의 절반을 읽으며 따뜻한 차를 세 번이나 우려 마셨더니 일어난 지 두 시간이 지나갔다. 페이지를 넘기다가도 몇 번이나 그들이 잠들어 있는 방문을 바라본다. 내가 슬픔을 피해 바쁜 일상 속으로 숨었을 때 적당한 거리를 지키며 내 이름을 불러주던 사람들. 나는 친구들의 다정한 그 목소리에 위로를 얻고 기운을 차린다. 오한이 멈췄으니 오늘부터는 수영하는 그들의 가까이에서 발을 담글 수 있을 것 같다. 네 번째 차를 다 마시기 전에 누구라도 부스스 일어나 저 문을 열고 내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