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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혜 Dec 17. 2022

무명의 여행

  오후 8시쯤 숙소에 복귀하자 1층의 공용 거실이 북적북적했다. 성별과 나이가 다양하게 섞인 사람들이 중앙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시끄러운 목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나는 사람들을 등지고 2층으로 곧장 올라왔다. 방문에는 ‘숙소 내 취식금지(물 외 주류섭취금지)’ 라고 적혀있었다. 거실 중간에 냉장고가 있었다. 가방 안에 어렵게 구한 로컬 맥주 2캔이 식어가고 있었다. 분명히 블로그에는 ‘혼자 조용하게 여행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소개 된 게스트하우스였는데. 꽤 오랜 시간 고민을 하다가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다행이 거실이 비어있었다. 빈 의자에 앉아 책을 펴고 캔맥주를 땄다. 맥주를 가득 들이키고 ‘캬’를 내뱉으려는 순간, 옅은 담배냄새와 함께 몇 사람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화장실에서도 사람들이 나왔다. 오 반가워요. 다정하게 환영하는 목소리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거짓말처럼 나는 일순간 사방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이 탁자에 둘러앉았다. 본의 아니게 그들의 쉬는 시간에 맞춰 초대받은 손님처럼 자리에 앉게 된 것이었다.

  맞은편 두 명은 게스트하우스의 스태프라고 먼저 인사하자 자연스럽게 돌아가며 소개를 이어갔다. 나는 오늘 서울에서 도착해 혼자 여행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도 모두 초면이고 적당히 어색했다. 제주도의 맛집과 볼거리를 공유하고 드문드문 정적이 흐르면 각자의 맥주를 비우는 식으로 대화는 평화롭게 이어졌다. 내려와서 다행이네 라고 생각하는 찰나 2층에서 노란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발소리를 내며 내려왔다. 옷 갈아입고 오니 뉴 페이스가 생겼네. 발소리만큼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한 그는 탁자의 상석에 앉았다. 빌런의 등장은 언제나 요란한 법이었다. 나는 숙소로 돌아왔을 때 들었던 시끄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라는 것을 단박에 알았다.

  - 이름이 뭐에요, 몇 살이에요?  

  노란 티셔츠는 궁금한 게 많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 93년생? 아니면 92? 옆에 앉은 스태프들을 쿡쿡 찌르며 말했고 그들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가 여기서 가장 나이가 많은 듯 했다. 머리숱이 없어서 그렇지 얼굴은 나랑 비슷하거나 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압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재빠르게 나이를 답했다. 누나, 동안이네 하고 그가 덧붙이며 웃었다. 그는 나보다 세 살이 많았다. 나이는 서열, 거주지는 부의 척도, 출신학교는 승진의 기준으로 가치 판단을 하는 회사를 그만두고 겨우 떠나온 여행이었다. 나 역시도 그런 치우침에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여행지에서만큼은 타인과 내가 무명의 상태를 유지하며 그런 판단 하에 놓이지 않기를 원했다. 그 바람은 노란티셔츠에 의해 조금씩 깨지고 있었다. 나이 궁금증이 해소되자 이번엔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다.

  - 지금은 퇴사하고 일 쉬고 있어요.

  그는 M사에서 방송일을 하고 있다며 바쁜 업무 강도와 회사에 대한 넋두리겸 자랑을 이어갔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다. 이내 내가 무슨 일을 했었는지 자세히 물었다. 나는 공간 관련 일을 했다고 답했다. 그는 내가 건넨 애매한 정보 때문에 궁금증이 증폭했는지 자꾸만 추측을 이어갔다. 이게 또 전(前)직업 맞추기 퀴즈쇼 같은 것으로 바뀌어 버리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자꾸 정답을 맞춰보라고 요구했다. 이 퀴즈쇼를 빨리 끝내기 위해 나는 하던 일, 관련된 공간, 그만둔 회사의 이름까지 다 대답하게 되었다. 퀴즈쇼의 진행자에게 지고 싶지 않은 마음도 신상정보를 털리는데 한몫했다. 그의 서열세우기를 내가 가졌던 명패의 네임밸류로 꺾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퀴즈쇼가 끝난 뒤에 대기업을 때려 치고 혼자 여행 온 동안 ‘쿨한 백수 왕누나’가 되어있었다.

  내가 아니고 누구든 되고 싶어 떠나간 여행에서 나는 왜 스스로를 그렇게 다 까놓고 말았을까. 그 노란티셔츠가 탁월한 진행자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달려있던 명패들을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다 떨쳐버리고 싶었으면서도 어김없이 나를 증명하는 자리에서 꺼내놓게 되는 ‘증’들. 졸업장과 명함 같은 것들. 나는 어렸을때부터 이 명패들을 꾸역꾸역 모아 방패로 썼다. 나 공부 잘하니까 큰소리 칠 수 있어. 나 번지르르한 회사에 다니니까 우리 가족을 무시 하지 마. 방패는 어느새 내 일부가 아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창을 휘두를 수 없으니 가지고 있던 방패. 이미 내가 던져버린 고철덩어리들. 왜 그곳에서 원래 가지고 있던 것 마냥 이미 내 것이 아닌 명패를 꺼내놓았는지. 제주에서의 내가 ‘왕년에’를 외치며 과거의 영광을 현재의 나로 착각하는 사람들과 닮아있었던 것은 아닐지 문득 겁이 났다.


  사촌과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시험이 끝나면 어김없이 고모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 경화는 네 형님하고 전화를 넘겨받고는 나에게 눈을 찡긋했다. 또 시작이네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유가 있었다. 언제나 내 성적이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경화는 고모가 궁금해 하는 전교 석차를 알려주고는 스스로 좋은 성적을 내는 딸에게 감사하다고 침착하게 덧붙였다. 수화기 넘어 축하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씁쓸한 표정의 고모가 선명히 떠올랐다. 나는 그럴때마다 할머니와 고모에게 손톱만큼은 복수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들의 잘못 때문에 이혼했지만 그저 며느리를 탓하는 진부한 드라마 속 인물 같은 사람들. 두사람이 젊은 경화를 괴롭힌 것을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시험 성적은 졸업 후에는 대학이름, 회사 간판, 연봉으로 바뀌어있었고 경화는 이따금 고모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경화의 기를 세워주는 내 명패가 자랑스러워했지만 동시에 아주 무겁다고 생각했다. 첫 직장은 근사한 외관을 자랑하며 해외출장을 자주 가는 곳이었지만 특수한 고용형태로 전직원의 소속이 늘 불안정했다. 두 번째 직장은 더 삐까뻔쩍하고 높이 솟아오른 곳이었지만 나는 그곳에서 심한 가스라이팅과 부당한 업무에 시달렸다. 마지막에는 그곳에서 떨어지거나 폭파시키고 싶을 정도로 회사를 미워하게 되었다. 나는 상대편에서만 튼튼해보이는 무겁기만한 방패를 그만 놓아버렸다.

  지금 나는 직업란에 무직에 체크를 한다. 나는 때로는 자유롭지만 대부분 혼란스럽다. 어쩌면 가장 두꺼운 방패를 가질 기회를 영영 잃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람이 가진 명패들은 그저 일부분이고 존재의 가치판단은 그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떨쳐내기는 어렵다. 특히 내 자신을 누군가에게 꺼내 놓을 때 말이다. 나는 스스로를 들여다보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명패가 없더라도, 다음 소속이 어디라도 그것이 내 전부가 아님을 알아 가는데 시간을 쏟을 작정이다.  

  백수는 시간이 많지만 마음이 분주하다. 분주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여행만한 것이 없다. 다음 여행지가 어디가 되었던 철저히 무명으로 다녀오고 싶다. 나이도 조금 다르게. 이름을 굳이 공개해야하면 가명으로. 이기기 위해 혹은 자랑스럽지 않은 나를 감추기 위해 낡은 명패를 들이미는 일은 없는 그런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


그래도 제주도는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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