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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혜 Dec 17. 2022

진짜 아깝다

  이 글을 쓰기에 앞서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어떤 시간을 초기화할 수 있다면 당장이고 Y를 만났던 그 두 계절을 짚을 것이다. 왜 이렇게 미리 이야기를 하냐면, 세상은 좁고 언젠가 그가 내 글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언급하는 이 글에, 어쨌든 그의 일부분을 잊지 못하는 나를 향해 우쭐할 Y의 면상을 걷어차 주고 싶다는 말로 이 글을 시작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친구 H, 이미 많이 사과했지만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친구라도 만나줘서 고맙다.


  Y와는 직장동료의 결혼식에서 만났다. 만났다가 보다는 일방적으로 보였다고 하는 게 맞겠다. 신부 측에서 웃고 이야기하는 나를 Y는 한참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내 번호를 알아냈고 적극적으로 연락했다. 그는 나랑 점심을 먹기 위해 서울에서 5시간 거리를 굳이 차를 타고 내려왔다. 덩치가 산만한 Y와 함께한 토요일은 마치 단독 팬미팅을 개최하는 기분이었다. 눈동자가 아름답다, 햇볕 아래의 머리카락이 빛난다, 파스타를 먹는 입 모양이 귀엽다. 나는 그렇게 대놓고 면전에서 칭찬을 받은 적이 없었다. 웃음이 터져서 음식과 커피를 몇 번이나 뿜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칭찬들은 내가 가장 가물었던 부분을 제대로 공략했다.

  그때 나는 오랜 연인과 헤어진 상처를 겨우 회복하고 누구라도 만나고 싶은 마음에 휩싸여 있었다. 몇 번의 소개팅과 만남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실망했다. 첫 만남에 결혼 얘기를 하는 사람, 양다리를 시도하려던 사람, 과한 스킨십을 요구하는 사람. 무례하고 시답잖은 사람들만 몰려들었다. 좋은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본다던데. 이 정도면 내가 별로인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자신에게 휘두르는 채찍질이 가장 쉬운 법이었다. 점점 나를 재단하고 저평가하기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바짝 말라 건조했던 시절에 눈만 마주치면 사랑을 고백하기 일보 직전의 표정을 짓던 Y를 만나며, 나는 엉뚱한 곳에서 우쭐해져버리고 만 것이다.

  홍대 입구에서 그와의 세 번째 데이트를 했다. 따뜻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도처에 포근히 안겨 걷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그를 기다리는데 마음이 들떴다. 단정히 꾸민 나를 보고 호들갑을 떨 리액션이 기다려졌다. 좋아하는 드라마의 대사가 떠올랐다.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 지난한 일상에서 새로운 연애는 주말을 설레게 만들어 줄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치킨집의 애매한 조명 아래에서 저녁을 먹으며 그는 내 속눈썹과 피부결에 감탄했다. 그리고 다시 여자 친구가 되어달라고 했다. 그날은 나도 대답했다. 잘 지내봐요, 본격적으로. 그때 자주 듣던 노래가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본격적인 마음’이었다. 그 노래는 ‘나는 나밖에 몰라 ‘라는 가사가 반복되는 곡이었다. 나는 노랫말처럼 연말의 외로움과 텅 빈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를 위한 연애를 시작했다.      

  연애의 시작에 친구 H가 등장한 건 정말 우연이었다. 그와 대화를 하다가 H와 같은 과 선후배 사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친구의 이름을 꺼내자 그의 입술이 묘하게 떨렸는데 세상이 이렇게 좁구나 하고 놀라는 리액션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나는 H에게 당장 전화했다. 내가 그동안 말해오던 썸남이 ‘그 선배’라는 것을 알고 친구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 선배라면 나도 예전에 들어본 적 있었다. 말끝마다 ‘오빠가’를 붙이던 선배, 치아 교정 이후에 자신의 외모에 취해있는 선배, 신입생의 외모를 자주 품평하던 선배, 친구의 다리 굵기를 평가하며 뒤에서 다 들리게 수군대던 선배, 사례를 나열할 필요도 없이 그냥 최악 그 자체였던.... 바로 그 선배가 Y였다. 그때 내 머릿속에서 지금이라도 주워 담고 싶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한테는 안 그러는데......’

  친구는 그와 시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이래저래 변명을 늘어놓았는데, 아마 좀 자만했던 것 같다. 나는 진지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이라고. 그와의 연애를 내 자존감을 채우는 데에 적당히 쓰고 털어낼 것이라고. 그는 멀리 살았고, 나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숏츠나 틱톡처럼 짧게 소비되는 흥밋거리 정도라고 생각했다. 돌이키지 못한 강을 건넌 듯 보이는 소중한 친구를 향해 H는 경고를 덧붙였다.  

  “연애고 뭐고 알아서 하겠지만 만약에 네가 그 새끼랑 결혼하면 나는 안 간다.”

  그 말이 얼마나 무거운 경고인지 알면서도 모른척할 정도로 그때 나는 좀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최악의 연애를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날려먹었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생각보다 오래갔다. 계절이 겨울을 지나 여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제법 일상을 나누고, 서로의 지인과 사소한 습관을 알게 되었다.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은 시간의 중력을 받아 무거워졌다. 반면에 그의 칭찬은 부쩍 줄었고, 어느 날 나에게 살이 좀 찐 것 같다고 말했다. 길을 걷다가 종종 그는 뚱뚱하고 날씬한 여자들을 품평했다. 나는 주제를 알라고 등을 때렸지만 그 손과 말에는 무게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럴 때면 문득 H에게 미안해졌다. 근데 그냥 미안하기만 하고 말았다. 그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다이어트 시리얼 같은 것을 주문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날 그는 친한 형이 곤란을 겪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형은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하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자주 잔뜩 취한 상태로 원나잇을 했고 상대의 동의하에 신체를 촬영하곤 했다고. 그 사진 폴더를 예비 신부가 발견했다고. 그래서 사달이 났지만 결국 용서해주었다고. 나는 껄껄 웃는 그를 보며 도대체 어디가 웃기는지 알 수 없었다. 예비 신부는 그와 친한 누나였고, 그는 둘의 주선자였다. 결혼을 당장 말려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는 화해해서 다행이지 않냐고 했다. 전혀 다행이지 않았기에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가지런한 치아를 둘러싼 그의 튀어나온 턱을 보며 생각했다. 교정을 해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구나 하고. 비틀린 건 그의 턱뿐만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감춰오던 생각이 시각화되어 눈앞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여러모로 비뚤고 해로운 사람이었다. 이 관계를 끝낼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최악을 갱신하는 몇 번의 사례가 더 있었고 나는 그와 헤어졌다. 이별을 하고 돌아선 후에 나는 몇 번 뒤를 돌아봤다. 주걱턱은 한 번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의 등에 손을 올리고 미소를 지었던 좋았던 순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만했지만 그 연애에도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 계절들이, 끝없이 품평당했을 내 미소가, 퍼다 주고 만 감정이 너무 아까웠다.

  나는 이제 예쁘다는 칭찬을 좋아하지 않는다. 길에서 번호를 물어보는 사람을 드물게 만날 때 굉장히 불쾌하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타인의 시선이 몸을 훑는다는 것은 우쭐함 보다는 역시 소름 끼침 쪽이다. 외모에 대한 언급을 스스로 자제하려고 노력한다. 칭찬이나 비난 모두 일종의 평가이며 획일적인 미의 기준에 동조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안다. 가끔 아름다운 여자들을 만날 때면 칭찬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릴 때도 있다. 참지 못하고 내뱉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의 모습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교양을 갖추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Y는 자신의 큰 키와 가지런한 치아에 취해 있음과 동시에 여자를 대상으로 줄곧 외모 품평대회를 개최했다. 나는 그 대회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했을 뿐이었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그야말로 ‘지가 뭔데 나를’인 것이다. 그 와중에 그의 권력은 불법 촬영물일지도 모를 끔찍한 사진들을 보고 다행이라고 말하는 데에 까지 이른다. 나는 그것을 그저 유희의 흔적 정도로 기억하는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진짜 네가 마시는 공기가 아깝다고.

  이별 소식을 들은 H는 나에게 괜찮냐고 먼저 물었다. 생각보다 오래 만나서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결혼 이야기 나오면 보따리를 들고 말릴 참이었다고 제정신을 차린 걸 축하한다고 덧붙였다. H는 지금도 가끔 내가 잘못된 길을 향할 때면 옆에서 묵직하게 경고를 던져주는 친구다. H가 나랑 연 끊지 않고 계속 친구 해줘서 진심으로 고맙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나에게도 사과하고 싶다. 진짜 아름다운 시절에 너를 끝없이 의심하고 품평하다가 결국 그런 사람과 마음을 섞게 해서. 아깝다 정말. 그 시간 아껴서 친구들 한 번이라도 더 만나고, 책이라도 한 권 더 읽을 걸.      

<본격적인 마음>이 수록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정규 2집 ‘우정모텔’ 앨범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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