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친구들과 중국집에서 외식을 했다. 허기진 상태에서 도착한 우리는 분주하게 메뉴판을 펼쳤다. 나는 볶음밥을, 나머지 세 명은 짬뽕을 골랐다. 각자의 식사를 고른 뒤 메뉴판은 요리 페이지로 넘어갔다. 고추가 듬뿍 올라간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인 탕수육을 먼저 골랐다. 지혜도 같이 먹을 거 시키자. 세 명의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요리들을 아래에서 위로 훑은 뒤 크림새우를 골랐다. 맡은 편의 친구도 평상시에 좋아하는 메뉴였다.
함께 하는 식사는 나에게 즐거움과 동시에 피로감을 준다. 미리 알아보지 않은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는 손가락이 분주해진다. 음식점의 평점을 살피는 척하며 국물이 채수인지 확인하고, 고기 없는 메뉴가 있는지 살핀다. 회식을 할 때면 미리 식당에 전화해서 일행 중에 스님이 있는데 먹을 만한 메뉴가 있는지를 확인해두곤 했다.
나는 햇수로 3년째 채식 지향을 하고 있다. 닭다리를 보다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반려견의 뒷다리를 떠올린 후로는 치킨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도살당하는 돼지의 영상을 찾아본 뒤로 붉은 육류 앞에서 거북한 피비린내가 났다. 그러다 점차 적극적으로 육류를 지양하는 식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혼자 먹는 끼니에서는 완전 채식을 하려고 노력하고, 함께 하는 식사에서는 어류까지는 먹고 있다. (계란, 유제품, 어류까지 섭취하는 내가 실천하는 단계를 ‘페스코 베지테리언’이라고 부른다. 모든 동물성 음식을 일절 섭취하지 않는 완전 채식은 ‘비건’이라고 한다.)
“물고기는 안 불쌍해? 그것도 일종의 차별 아니야?”
가장 좋아했던 회사 선배가 식탁 맞은편에 앉아 물었다. 회식 장소는 한정식집이었고 나는 고등어구이 정식을 시킨 뒤였다 나는 이 물음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길게 떠올랐지만 대신에 ‘에이, 저도 사회생활은 해야죠.’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 질문을 받았을 당시에 채식 커뮤니티에 비슷한 이슈가 있었다. 유명한 비건 유튜버 A의 SNS 게시물이 화두가 되었다. 그 글은 위기에 처한 바다 생태계 관련 다큐를 홍보하는 목적의 짧은 만화였다. ‘동물을 먹는 게 채식이라는 것은 이상하다, 어류를 먹는 것이 괜찮지 않은 이유를 다큐멘터리에서 확인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페스코 베지테리언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댓글을 남겼다. 채식을 위해 각자의 선에서 노력하는 사람들을 좌절시키지 말라, 엄격한 잣대를 세워 채식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것 같아 염려된다는 내용의 댓글이 많았다. 반대로 유튜버 A의 게시글을 지지하는 글도 다수였다. 동물을 먹는 것은 채식이 아니다, 완전한 채식을 이어가는 사람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는 대댓글이 달리면서 뜨거운 논쟁이 이어졌다.
유튜버 A를 오랫동안 지켜본 구독자 중 한 명으로서 그 글이 페스코 베지테리언을 비난하려는 의도로는 읽히지 않았다. 인플루언서로서 채식에 도움이 될만한 콘텐츠를 추천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류는 먹는 식생활을 페스코 ‘베지테리언’, 즉 채식이라는 용어로 지칭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는 의견을 함께 제시한 것이었다. 나도 이 의견에 동의했다. 고등어가 올라간 밥상을 채식이라 부를 순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비건이라고 대신 소개할 때면 아니라고 정정했다. 채식을 지향하긴 하지만 비건은 아니라고. 계란도, 우유도, 어류도 먹는다고.
하지만 유튜버 A의 게시글에 상처를 받은 반응에 자꾸 마음이 쏠렸다. 마음 한편에 내가 늘 가지고 있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엄격한 채식주의에 대한 동경과 거리감. 완벽하지 않은 실천은 종종 자기혐오나 합리화로 이어졌다. 나는 비건 라면과 참치김밥을 함께 먹곤 했다. 식당에서 곤드레밥과 낙지볶음이 선택지로 놓일 때 매콤한 냄새에 군침이 돌아 후자를 고르기도 했다. 육류와 어류를 대하는 마음이 왜 같지 않을까. 내 반려견과 닮지 않아서? 인간과 비슷한 얼굴을 갖고 있지 않아서? 육류는 먹지 않고 어류를 먹는 종차별적인 모순은 내 식단의 도처에 깔려있었다. 때로는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종종 먹고 싶은 마음에 해산물을 여전히 선택하고 있었다. 채식이라는 이름 앞에서 나는 자주 실패한 사람이 되곤 했다.
그런 끼니의 잔반을 치우고 포만감과 함께 부끄러운 마음과 들면 나와 같이 페스코 식단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곤 했다. 완벽하지 않지만 비슷한 사람들은 보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어디엔가 속해있다는 안정감이 부끄러운 마음을 건져 올려주었다. 유튜버 A에 부정적인 댓글들에는 채식 집단에서도 내 모습이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일까에 대한 불안이 담겨있었다. 언어로 그어진 선 밖으로 밀려나는 데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그 댓글과 나의 마음은 결국 같았다. 나는 그저 ‘채식이 아니긴 하지’ 하고 한발 물러서서 자세를 움츠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그 중국집에 크림새우가 아니라 버섯탕수가 선택지로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버섯 메뉴가 있었더라도 나는 내 신념, 친구들과 함께 먹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짧은 시간 동안 분주해졌을 것이다. 얼마 전 생일날 동거인이 끓여 준 황태 미역국을 맛있게 먹었다. 고향에 내려가면 엄마 경화의 국숫집에 간다. 소고기 고명은 뺀 멸치국수를 먹으며 여전히 맛있네 하며 엄지를 척 올린다. 그 끼니는 분명 채식이 아니다.
페스코 베지테리언의 식단은 채식이라 부를 수 없지만, 동물 착취에 반대하고 육식을 지양하는 마음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용어에 어폐가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식생활 역시 채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어떤 철저한 채식주의자들은 적절하지 않다고 볼 것이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적절한 용어가 등장하면 가장 좋겠다. 하지만 기존의 용어가 그 노력을 안아준다면 나는 그것을 사용하는 마음을 이해하고 싶다.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싶다. 타인과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들 역시 나처럼 소신을 지키거나 때로는 타협하고, 가끔은 실패하기도 하면서 식사를 이어나간다. 이 모든 식사가 실패한 채식일까? 페스코 베지테리언의 식사를 반절의 실패가 아닌 반절의 성공으로 응원하고 싶다. 어설프게 걷는 사람도, 이미 균형을 잡은 사람도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