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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lee Jan 18. 2017

너무 다른 횡단보도

비교체험 극과 극

1. LA Zoo 앞 횡단보도


LA 생활을 시작한 지 며칠이 안되었을 때, LA Zoo를 홀로 간 적이 있다. 동물원 방문은 몇 살 때 마지막으로 했었는지 기억도 안 날정도였다. 그러나 타국 땅에선 모든 것들이 특별해 보이는 법. 왠지 꼭 한번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오랜만에 찾은 동물원은 만족감보다는 실망감을 주었다. 좀처럼 등을 돌리지 않던 곰과 낮잠에서 도무지 깨어날 기미가 없던 사자, 숲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호랑이 등등, 힘없고 야성을 잃은 듯한 육식 동물들의 모습은 '얘들도 날씨 때문에 이런가?'라는 의문만 갖게 했다. 다이나믹한 모습을 보려면 결국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을 트는 수밖에 없었다.

그만 좀 자렴

몇 시간인가를 걸으며 동물원을 다 구경한 후, 우리 안의 동물들처럼 힘이 빠졌을 때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나가 우버(Uber)를 불렀다. 주차장이 넓은 편이라 우버가 어느 곳으로 픽업을 하러 올 지 몰랐다. 그래서 횡단보도가 있는 도로까지 나가 기웃거리며 우버를 기다리고 있을 무렵, 한 대의 차가 내 앞에 멈춰 섰다. 그 차의 운전자는 내가 횡단보도를 건널 것으로 여겼는지 나에게 건너라는 손짓을 했다. 순간 당황한 나는 손으로 엑스 표시를 하며 그 차의 운전자에게 지나가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우버 어플을 살펴보며 날 태울 차가 어디쯤 왔는지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 있던 중, 또 한 대의 차가 내 앞에 멈춰 섰다. 그 운전자 또한 나를 보며 지나가란 수신호를 보냈다. 난 또다시 운전자에게 그냥 지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곤 횡단보도와 조금 거리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우버를 기다렸다.


내가 서 있던 횡단보도는 신호등이 없는 곳이었지만, 그 앞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 차들이 먼저 정차를 했던 모습은 매우 이색적이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고개 푹 숙이고 휴대폰만 쳐다보는 사람을 먼저 생각해주다니, 느긋함의 끝을 보여주는 운전자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던 미국 생활의 장점이란 이런 것이었다.

LA Zoo 앞. 이런 평온함이라면 보행자를 자연스레 보행자를 우선으로 하게 되는건가?


2. 맨해튼의 횡단보도


펜실베니아 주립대에서 연구원으로 있는 친구를 만나러 필라델피아에 갔을 때, 친구는 그 동네의 한 가지 특징을 이야기해 주었다.


"여긴 거의 신호등 없다시피 행동해. 무단횡단 장난 아니야."


이 얘길 듣고 필라델피아의 거리를 다시 관찰해보니 무단횡단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그렇게 위험해 보이지도 않았다. 런던에서 본 풍경과 비슷했다. 차가 달려오는 방향은 달랐지만.


미국의 동부를 필라델피아로 살짝 경험한 후, 동부의 상징과도 같은 뉴욕으로 이동했다. 메가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내렸던 맨해튼의 27번가는, 구경하기에 고개가 아플 정도로 높은 빌딩들이 가득했고, 뭔가 빼곡한 느낌이었다. 인도의 보행자들, 차도의 자동차들, 블록마다 마다의 빌딩들, 빌딩들을 뒤덮은 광고판들... 허전한 모습이라곤 절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이든 간에 꽉꽉 채워진 느낌이었다.


뭔가 다 가득찬 느낌이다.

하지만 빼곡한 만큼이나 복잡했다. 신호등의 파란불은 뉴욕의 많은 차들과 사람들을 감당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 동안만 점등되었다. 그래서인지 필라델피아보다 훨씬 큰 규모의 무단횡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횡단보도를 지나는 차량이 없으면 신호등 색깔에 상관없이 횡단을 해댔다. 자동차들은 횡단보도가 사람들에게 점령되는 걸 저지라도 하듯이 달려들었다. 맨해튼의 횡단보도는 그렇게 수시로 사람들과 차들로 뒤엉켰다. 보행자와 운전자 모두 양보할 기세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무단횡단은 그들의 일상이다.

하지만 운전자, 보행자 모두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조화로울 정도였다. 무단 횡단이란 게 이곳에선 일탈이 아니고 일상이었다. 무단 횡단을 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평온했고 운전자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진 않았다(베트남에 비하면 고요한 수준?).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늦으면 손해 볼 것 같은 이 거대한 도시는, 내가 생각하던 미국 생활의 장점은 없어 보이는 곳이었다. 관광지로서의 매력은 넘쳐나 꼭 한번 다시 가고 싶은 곳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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