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생각이 다르기에 사회생활에서 겪는 갈등은 필연적이다.
갈등의 정도가 문제지
갈등의 유무가 문제가 아닌 이유이다.
“자존심 좀 버리고 갈등을 피할 것이냐,,, 내 고귀한 자존심 살리고 갈등에 맞설것이냐,,”
햄릿의 선택보다 어렵다.
실용주의적 삶을 추구한 나는 여태껏 자존심따위는 버리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자존심을 버리면서 ‘나’도 버리고 있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각자 업무영역이 정해져있고, 서로 침범하기 어려운 구조다.
어디나 그렇듯이 잡무처리를 맡는 행정담당이 필요한데, 새로이 사람을 고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가 보다.
이런 문제는 순번을 정해서 돌아가거나,,, 각자가 알아서 처리하는 방법이 있을텐데,,
우리 부서는 순번을 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업무범위가 모호하다보니 저마다 업무처리의 기대정도와 수준도 달랐다.
잘보이고 싶은 사람은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라도 다 처리해줄테고,
시간을 뺏기기 싫은 사람은 최소한만 할애해서 다음 턴에게 넘겨주려고 할것이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시간을 뺏기기 싫어하는 유형이었다.
육아와 학업, 본업을 소화하려다보니 행정업무는 최소한만 하고자 했다.
여기서 잠깐 변명을 좀 하자면,,,
최소한만 한다고 기본도 안한 건 아니다. 나라고 잘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잘해서 내 희생과 헌신을 맘껏 뽐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
이런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직장상사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는 점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현했고
심지어는 모두가 있는 단체방에 은근히 비하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직장상사이다 보니 뭐라 대꾸할 수도 없고, 혼자 끙끙 앓기만 있었다.
침묵하고 내 턴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자니 그 시간이 너무 지옥같고,,
상사 기분맞추자고 이일 저일을 다 하고 있자니 내 가족이 아른거렸다.
이 갈등을 끊어야 했다.
“그 까짓 자존심 좀 버리고,, 야근하고 상사 기분맞추는 일 좀 해주면 문제는 해결돼~”
“무슨소리야. 왜 너 일도 아닌데 다른사람 기분맞춰주려고 그런 일을 해? 안되지~”
악마와 천사가 내 양쪽에서 속삭인다.
자존심 좀 버리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을때쯤 왜 점점 비참하게 느껴질까.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피하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든다. 내 자존심 좀 챙겨줘야겠다.
나는 눈이 뒤집힌 사람처럼 내 상사에게 찾아갔다.
크게 쉼호흡 한번하고 들어가서 내 오랜 고민들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다.
점점 표정이 일그러져가는 상사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1. 우리 부서의 행정업무를 분명히 구분하고, 그 이상에 대해서는 요구하지 말 것.
2. 잡무처리는 “명령”의 문제가 아니며 “협조”의 문제임을 분명히 인지해 줄 것.
3. 내가 나이가 어리고, 직급이 낮다는 이유로 하대하지 말 것.
위 세가지 사항이 지켜지지 않으면 더이상 참을 수 없고 감찰부로 갈 수 밖에 없다는 마지막 말과 함께
“공손히” 인사하고 나왔다.
방을 나오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문제가 해결되었거나 개선되었느냐는 더이상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나를 위해 싸워준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나’를 너무 혹사시켰구나...
슬픔과 미안함으로 쏟아진 눈물이었다.
자존심 버리고 실익을 택한줄 알았는데,,,
사실은 자존심 버리면서 ‘나’도 버리고 있었던 것을 뒤늦게 깨달은 후회의 눈물이었다.
그리곤 속으로 다짐했다.
“찬욱아. 지난 37년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그동안 미안했어. 앞으로는 내가 널 잘 지켜줄께”
우리는 자존심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때로는 자존심은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그 자존심을 버리면서 진짜 나를 잃어가는 것은 아닐까?
자존심 없는 자존감이 가능할까?
부모가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서
자식에게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고 말하면 그 말이 얼마나 통할까.
이제부터라도 나 자신을 소중히 소중히 대우해야겠다.
참. 내 폭탄선언 이후 업무영역은 구체화되었고, 그 직장상사는 더이상 아랫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 마법도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