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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똥 May 26. 2024

5월을 볶다

수박을 사러 마트엘 갔다. 건너편에 차를 세우고 길을 건너려는데 갑자기 차들이 몰려온다. 한 대, 두 대, 세 대…. 네 번째 승용차가 오기 전에 후다닥 달려 길을 건넜다. 내 인내의 한계는 세 대의 차가 지나가는 시간. 토요일 정오의 해는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머리 위에서 타오르고 있다. 덥다. 수박을 썰어 냉장고에 넣어두면 남편이랑 둘이 오래도록 먹겠다. 그래도 큰 걸로 한 통 사서 오직 붉은 살점만 깍둑썰어 넣어 놓으리라. 푸르고 흰 껍질들을 조금도 용납하지 아니하고 마지막 한 조각까지 수박 본연의 맛만 만끽하리라.


지난 목요일, 중산지에서 버스킹을 했다. 물론 우리는 관객이었고 함께하기로 한 모임에서 나는 수박을 준비하기로 했다. 누구는 김밥, 누구는 음료와 커피를, 그리고 누구는 치킨을 준비했다. 31도를 오르내렸던 5월의 저녁 바람은 해가 져도 후덥지근했다. 울리던 음악이 끝나고 중산지를 환하게 비추던 불빛도 꺼지고 나니 그제야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좋았던 시간, 좋았던 사람과 함께 먹었던 음식은 영화 <라따뚜이>처럼 행복한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어둠과 바람이 빚어낸 그날의 수박 맛이 게으른 나를 일으켜 마트로 향하게 한 것만 봐도 그렇다. 게다가 약속도 없고 모임도 없는 휴일, 내게 정오의 장보기는 기적과 같다. 밀린 잠과 한껏 늦장을 부릴 수 있는 유일한 날을 아무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탓이다. 해가 침실 너머에 선을 그을 때쯤 미적거리며 거실로 나와 커피를 한 잔 내리고 달콤한 빵 한 조각을 뜯어먹는다.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몇 번 돌리다 보면 이내 저녁이 된다. 나의 휴일은 주로 '게을러질 대로 게을러져라' 의 날인 것이다.


갱년기로 갑자기 등에서 열이 후끈 달아올랐다가 문득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한다. 더 게을러지고 싶어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날이 잦다. 서둘러 얼음을 동동 띄운 냉수를 벌컥 들이켜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부채를 만들어 더위를 식힌다. 거실에는 벌써 선풍기가 나와 있고 음식을 만들 때는 에어컨을 켜고 요리를 한다. 나의 5월은 진작에 여름이다. 때 맞춰 마트 입구에서부터 나를 이끄는 검은 줄무늬옷을 입은 초록이들의 둥근 자태는 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간다.  


냉장고에서 수박을 꺼내 몇 조각을 먹으면 답답한 속이 이내 식는다. 갱년기를 위한 약이랍시고 사서 쟁여두고 먹으면 될 텐데 알레르기로 수박을 먹지 못하는 큰아들과 함께 살 때는 덥석 손이 가지 않았다. 엄마인 내게 괜한 죄책감을 심어주는 과일이 되어버린 탓이다. 지난 달 아들은 취업으로 서울로 갔고 나는 갈증과 더위가 한번에 가시는 수박을 이제 고민 없이 산다. 올해는 마음 놓고 수박을 먹을 작정이다. 마트 진열장에는 꼭지가 신선한 수박들이 그득하다. 검고 선명한 줄무늬, 똥구멍이 점처럼 작은 수박을 하나 골라 담는다. 잘 익은 수박 고르는 법이다.


우유를 찾아 나오는 통로에 '햇감자'라는 팻말이 보인다. '햇감자'라는 말에 군침이 돈다. 햇감자를 듬뿍 볶아서 배부르게 먹은 다음 수박을 먹으면 더욱 맛나겠다. 감자의 껍질이 얇고 투명하다. 있는 듯 없는 듯 5월의 흙은 연 누런 감자를 더욱 빛나게 한다. 부드러운 껍질조차 먹어버리고 싶은 큰 감자 네 알을 주섬주섬 담는다. 흐르는 물에 설렁설렁 씻고 채칼로 껍질을 벗긴다. 도마 위에서 감자를 썬다. 물기를 머금은 감자는 연하다. 칼이 지나가는 소리가 사각사각 사과를 깎는 것처럼 가볍다. 양파와 당근, 고추를 채 썰어 함께 볶는다. 식용유에 몸을 뒤집으며 지글지글 노래하는 감자, 조금씩 숨죽이며 익어가는 감자볶음에 소금으로 간을 한다.


감자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남미에서 감자를 파는 노인이 되고 싶다는 그녀의 꿈을 소박하다고 해야 할지 거창하다고 해야 할지. 감자만 보면 자신도 모르게 ‘허겁지겁’이 된다는 그녀, 스스로 '감자킬러'라 명하고 감자를 향한 식탐에 토를 달지 말라는 그녀가 조금씩 이해가 되는 요즘, 나의 소화 기능에 장애가 생기면서 툭하면 체하는 일이 잦다. 스트레스가 쌓일 때는 더욱 조심해서 음식을 먹게 된다. 그 와중에도 경계나 조심 없이 언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다. 짭조름한 된장찌개와 감자볶음이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익숙한 음식을 향한 내 DNA의 아우성일 수도 있겠다. 분명한 것은 농사일과 집안일에 쉴 틈이 없었던 내 엄마의 냄새가 이 음식에 배어 있다는 것이다. 배가 부른데 허기질 때가 있다. 먹어도 먹어도 헛배만 부를 뿐 여전히 허기질 때가 있다. 그때 나는 짭조름한 된장찌개 생각이 난다. 그리고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익힌 감자볶음도 생각난다. 대접에 듬뿍 퍼서 밥과 함께 쓱쓱 비벼 먹으면 그 오랜 허기가 채워진다. 뼛속까지 촌티 나는 나의 DNA는 비로소 접힌 허리와 휜 등뼈를 세운다. 세상의 어떤 비싼 음식도, 유명한 요리도 대체할 수 없는 지극히 시골스러운 '라따뚜이'의 맛. 허기란 육신과 마음을 모두 채워야 비로소 든든해진다. 조리대 위에는 이미 된장찌개 한 냄비가 끓고 있고 궁중 팬엔 잘 익은 감자가 무럭무럭 김을 내뿜고 있다.


다 익었다. 대접을 꺼내 가득 담는다. 쓱쓱 비벼 내 입 크기와 비슷한 나무 주걱으로 한 입 먹는다. 양파와 당근, 고추 맛이 밴 감자는 몇 번 씹을 새도 없이 목구멍으로 내려간다. 씹고 싶은 욕망보다 다시 한 입을 지시하는 뇌의 강한 유혹을 이길 수가 없다. 온몸을 기름으로 두른 미끈한 몸은 어금니 사이에서 뭉개지기도 전에 혀끝에서 스르르 녹는다. 아삭한 식감보다 흐느적거리거나 물컹한 맛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 맞춰 기꺼이 맛을 내어주는 감자들의 헌신 앞에 5월의 봄이 맛있게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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