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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똥 Apr 29. 2024

청계사 가는 길

벚꽃이 난분분할 날, 청계사 가는 길을 걷기로 했다. 4월이 보름달처럼 커져가던 날이었다. 급작스런 그녀의 입원 소식이 먼저 들려왔다. 봄이었으나 일교차가 컸고, 간간이 부는 낮바람에 속살이 시리기도 했다. 그녀의 휑한 목이 언제나 염려스러워 스카프를 두르라는 잔소리도 열 번쯤 했을 때였다. 괜찮다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아직도 목숨줄처럼 가방 한 켠에 넣어 다니는 스카프 생각에 살짝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고향 선후배이며 수필 동호회 회원이고 얼마 전부터는 한쪽 가슴에 동일한 흔적을 가진  동지이기도 하다. 어쩌다 보니 공통점이 많아졌다. 매우 시골스러운 풍경을 좋아하는 것과 굳이 쉬는 날이면 걷는 것을 좋아하는 것까지. 그래서 율지라는 작은 연못을 끼고 자리 잡은 그녀의 전원주택은 나의 최애 힐링 장소 중의 하나다.


봄이면 복사꽃이 만발한 풍경 속에서 도원결의라도 맺는 듯 우리는 남은 인생을 함께하자고 손가락을 걸었다. 그녀의 마당 한 켠에 자리한 라일락 꽃그늘 아래서 된장찌개와 보리밥으로 촌스러운 행복도 누렸다. 마당에 수영장을 만들어 비키니를 입고 8월 앞에 당당해 보기도 다. 코스모스 꽃길 따라 몸빼바지를 입고 가을을 걸어도 보았다. 계절의 모든 시간 속으로 나를 초대하였던 그녀, 새로 세탁해야 하는 번거로움보다 빨랫줄에 걸린 빨래마다 내려앉은 갈대의 하얀 꽃눈에 환호성을 먼저 지를 줄 아는 그녀는 낭만을 아는 시골여자였다. 그리고 그 시골여자의 삶을 부러워하는 나도 뼛속 깊이 시골여자가 되고 싶은 천상 시골여자였다.


4월은 순식간에 우리의 곁을 스쳤다. 목단이 피고 지는 일주일을 놓쳐버리고 마음이 허허로울 때였다. 통화할 때마다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반가웠지만 선뜻 함께 나서보자고 하기엔 날씨가 너무 변덕스러웠다.


여름처럼 날은 자꾸 더워졌다. 4월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드디어 청계사를 오른다. 산은 초록으로 이제 단장을 시작했다. 유록색과 연두와 초록과 청록, 스무 가지도 넘을 청춘의 색이 온 산에 가득하다. 몽글몽글 피어나는 잎들과 어우러진 산이 가까이에서 혹은 멀리에서 반짝인다. 저수지에 부는 바람에도 윤슬이 가득하다. 눈이 부시게 빛나는 물결을 한 겹씩 떠서 옷이라도 지어 입고 싶다는 우리 목소리가 너무 컸을까? 눈에, 마음에 담아 가는 법을 배우라는 듯 혹은 우리의 욕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빛나는 저수지의 다이아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잠시 망중한. 오이 한 입이 진수성찬을 거뜬히 이기는 곳. 자연은 인간을 순식간에 부끄럽게도 또 금방 만족스럽게도 한다. 토요일 한낮의 숲은 세상의 필요조건이 인간의 행복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한다. 맑은 물에 발 담그고 찰방거리는 순간과 오이 한 조각 아삭아삭 씹으며 나누는 몇 마디의 문장들은 힘이 있다. 그래서인가. 햇살의 숨구멍으로 세상의 욕망들이 필터처럼 걸러지고 우리는 자꾸 투명해지는 중이다.


청계는 淸溪다. 맑은 시내가 출발지부터 목적지까지 이어진다. 바닥의 돌멩이와 이끼들도 훤하게 속내를 드러낸다. 모두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용기다. 잘난 것, 자랑할 만한 것뿐만 아니라  못난 것과 부끄러운 것도 포함한다. 맑은 시내는  자신 뿐 아니라 상대도 여실히 투영한다. 투영은 반사가 아니라 흡수다. 품음이다. 청계는 돌과 이끼들, 하물며 땅의 나무와 그 위의 하늘까지도 품는다.


그녀에게도 청계와 같은 울림이 있다. 사람을 품는다. 왜곡되지 않는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본다. 가식이 아닌 본질을 사랑한다. 그래서 가끔 어떤 이는 투명한 그녀를 가벼이 여긴다. 아는 만큼 보이고, 가진 것을 준다는 명제를, 나는 그녀에게서 본다. 마치 청계처럼 혹은 동독을 향한 서독의 마음처럼.


통일이 되기 전, 동독은 쓰레기를 가득 싣고 와서 서독에 버렸다. 그러나 서독은 동독에 필요한 음식을 가득 싣고 와서 동독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 이런 팻말을 세웠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줍니다>.


자연은 지금 봄을 열어 초록을 준다. 새소리와 물소리, 울퉁불퉁 바위의 돌이끼와 굽이굽이 오솔길도. 초록의 시간은 온통 기쁨이다. 기쁨에 젖어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이곳에  내려놓고 가는 것들이 많다. 몸부림쳐도 떨어지지 않는 세상의 무게와 불편한 진실들이 민들레 홀씨처럼 훨훨 날아가 버린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이 나를 품음이다. 나의 날숨이 숲의 들숨이 되는 시간, 자연은 말없이 나를 받아들이고, 나를 위로하고 나를 치유한다. 숲이 자꾸 울창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나 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시간까지 말한다. 땅 속의 침묵과 껍질의 깨어짐이 있어야 싹이 트고 꽃은 핀다. 생명이 씨방에 있음을 알기에 기꺼이 껍질을 벗고 어둠을 뚫는다. 그렇게 피었던 한 시절의 화려함을 지나 이제 다시 열매를 맺기 위한 중년의 시간 앞에서 우리는 닮아간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푸시킨의 詩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자리. 열매는 그런 자리에 맺힌다. 그런 삶에 응원과 위로를 더하는 청계사 가는 길, 함께 걷는 길. 오늘따라 물소리는 더욱 맑고 경쾌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시간이 그녀와 내 앞에서 반짝반짝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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