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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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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징카 Aug 06. 2023

응원과 위로, 호암미술관 김환기 작품으로부터

내가 호암미술관에서 김환기의 작품을 보게 된 건 일을 그만 두고 혼자 무언갈 만들어보겠다며 결심한 지 어언 6개월 조금 더 지났을 때였다.


지난 겨울부터 나는 어떤 외부활동 없이 집에 틀어박혀 디지털 노마드의 꿈을 이룬답시고 방안의 모니터에 앉아 하루를 보내왔다.


나는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일하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중이었다. 어떤 날은 배움도 결과도 모두 만족스럽기도, 또 어떤 날은 크게 한 일도 없는데 온몸이 고장난 듯 여기저기가 아프고 일도 제대로 할 수 없기도 했다.


그리고 호암미술관에 가던 날은, 마침 오랜 시간을 들여 거의 완성 단계에 있는 나의 포트폴리오와 기대했던 갖은 할 일과 도전들을 앞두고, 이것들을 모두 중단하고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매우 기운이 없었던 차였다. 그런 나를 보고 기분 전환을 시켜주겠다며 남자친구와 차를 빌려 떠난 곳이 김환기의 작품이 있는 호암 미술관이었다.



새로운 곳에 방문한 설렘만을 가지고 들어간 전시장에는 김환기의 작품들이 가득했다. 공간을 압도하는 색감, 묘한 안정감을 주는 점의 추상을 보면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려낼까, 놀라움 뿐이었다.


전시장에서 조명을 받아 차분히 전시 된 그림들을 보면서 그의 재능이 천부적이라고 생각했다. 독보적이고 비범했다.


그런데 이번에 호암미술관에서 여러 점의 작품들을 보며 나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초기 김환기의 작품과 우리가 잘 아는 작품들을 비교해보면 그 스타일이 매우 달랐다. 정물화에서 인물화까지 다양했다. 그의 시간과 노력들이 작품을 통해 연대기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작품들 옆에는 김환기가 쓴 짧은 문장들이 있었는데 일기 같았다. 고되다, 모든 힘을 다해, 와 같은 수식어들이 있었다. 더불어 예술에 대한 정의와 생각들이 적혀 있었다.



충격이었다. 김환기의 점화는 하루 아침 뚝딱 그려진 것이 아니었을텐데도 나는 그를 천재로 여긴 뒤 캔버스 뒤에 두텁게 발라졌을 수많은 붓질에 대해선 상상하지 못했다.


그의 첫 작품부터 오늘의 한국 추상의 대표작들이 있기까지 그의 시간은 정직했던 것이다. 여기서 나는 묘한 응원과 위로를 받은 것 같다.


모든 일에 요행은 없을지도, 꾸준한 시간과 노력은 선명한 방향을 제시할 거라는 응원, 그러니 힘들어도 계속 이어가라는 위로를 받은 시간이었다.


넓은 캔버스에 찍힌 무수한 점의 방향성들


가끔 내가 하는 일들이 무용하게 느껴질 때, 나는 다시 김환기 작품으로 돌아와 캔버스 위에 무수히 찍힌 점들이 나타내는 방향성을 보고 싶다. 나도 아직 점 한 개를 찍었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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