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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징카 Oct 06. 2023

12살 대담하고 충만한

그리운 건 시절이라기 보다 힘

네이버 블로그 스킨을 유료로 판매하던 시절, 나는 12살의 나이로 한 네이버 카페 스텝이 되었다. 포토샵으로 다양한 디지털 소스를(그 시절의 소스들이란 퍼스나콘, 블로그 배너, 프로필 이미지, 움짤 등등 당대 유행하던 커뮤니티에 쓰일 여러 이미지 자료들을 말한다) 무료로 디자인해주는 일이었는데 당연히 내 나이는 아무도 몰랐다.


유명한 디자인 카페 스탭으로서 당당히 하나의 게시판을 가지게 된 12살의 나는 그 어떤 대가도 받지 않았고 뿌듯함과 재미만을 추구하며 그 일을 했다. 그러다 어느날, 한 회원이 나에게 블로그 배너를 만들어 달라고 신청했는데 관능적 느낌의 캐릭터들과 함께 섹시한 분위기가 나게 디자인을 해달라고 했다. 12살이 이해하는 섹시는 무엇이었을까 싶지만 요청글에 적힌 요구사항과 레퍼런스 이미지들을 가지고 신나게 작업을 했다.


그때의 내 마음은, 요청 사항에 맞게 멋지게 디자인해서 이 사람을 기쁘게 만들어야지, 였던 것 같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에 몰두하던 기분.


이후 열심히 만든 작업물을 전달했는데, 갑자기 내게 한 쪽지가 왔다. 섹시 블로그 배너 디자인을 요청한 회원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디자인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며, 고등학생 쯤 되었을 텐데 이런 멋진 디자인을 해주니 고맙다며 원하는 블로그 음악을 사주겠다고 했다.


당시 블로그 음악은 유료로 엄마 몰래 캐시 충전 해야만 살 수 있는 초등학생 최대의 사치였다. 나는 매우 가슴이 뛰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이거랑요 저거랑요 해버리고 싶었는데 K 유교키즈는 속마음을 숨기며 한국에서 n번의 거절은 매너라는 듯 아니에요, 제가 재미있어서 한거였어요, 마음에 드셔서 다행이에요, 했다.


그러나 정말 다행이게도 그녀는 찜하기에 음악을 담아두면 선물하겠다고 한 번 더 이야기했고, 나는 그 날 밤 조용히 원하던 음악 두 개를 위시리스트에 담았다.


나의 재능으로 무언 갈 버는 최초의 경험이었다.


-


초등학생 신분을 숨겨가며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으로 타인에게 좋은 가치를 건네던 대담함


돈이나 명예 등의 결과를 생각하기 보다 그 과정에 대한 즐거움 하나로 일을 즐기던 충만함


그런게 어릴 때 있었다.


사실은 뭐가 되어야 하고 얼마를 벌어야 하는게 전부가 아닌데도 성인이 된 나는 과정의 즐거움 보다 결과를 좇았다. 그건 때로 의식적인 것이 아닌 그렇게 해야 살아남는다고 코드화 된 생활 양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12살에 선물 받은 유료음악> 에피소드를 좋아한다. 어떻게 하면 다시 나를 의심하지 않고 충분히 몰입할 수 있을까.


그리운 건 시절이라기 보다 경험치가 낮아 덜 무서워했고 덜 소극적이던 그때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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