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서니 햇살이 방안 가득 와락 쏟아졌다. 마치 밀물처럼 밀려오는 햇빛은 잠깐 실내에 머물렀다 먼 길을 떠났다. 잠깐 비춘 햇살이 내 왼쪽 뺨과 귓가를 향하자 숨을 쉬는 이 순간이 때론 기적과도 같단 생각이들었다.
문득 오늘 오후 한강에서 본 새와 풍경들을 떠올려본다.
성산대교와 올림픽대교 사이 강물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 공원에서 유유자적 걸어다니는 비둘기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 곁을 스친 새들의 이름을 전부 알지 못하지만 먼 길을 날아 따스한 곳으로 내려와 강가, 나무, 풀섶 어귀에서 먹이를 먹고 쉬다가는 새들이 괜스레 반갑다. 관심 갖지 않던 존재들에 관심을 기울임에 눈으로 안부인사를 건네게 하고 한 번 더 바라보게 한다. 그러면 이 땅에서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강물 안으로 고개를 빼꼼히 들었다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는 물새, 뭍 위로 낮게 날아 강물 위에 살포시 발을 딛고 헤엄치는 오리도 보다가 강 맞은편 당인리 화력발전소가 보였다. 연휴에도 쉬지않고 연기를 내뿜고 있다. 길을 걷다 다리 위 아무렇게나 버려둔 플라스틱과 음료수캔이 널브러진 채로 있었다.
최근에 본 글이 떠올랐다. 군산 새만금에서 미군은 땅을 갈아엎고 공항부지를 넓히기 바라고 평창에는 송전탑이 들어서자 기관이 보상금으로 마을을 갈라지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무기력감이 솟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심지어 제주도에는 공항이 부족해서 제2공항을 지으려한다. 인간의 욕심은 첨탑처럼 높고, 연기처럼 마구 피어오르는데 정작 책무를 지지 않은 채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에 가한 파괴는 고스란히 인간에게 돌아올 게 뻔하다. 살아남는 건 막대한 자본을 쌓은 자들이나 최소한의 보호조차 받지 못한 존재들은 소외되거나 절멸에 이르기도 한다. 그 격차는 갈수록 공고해지고 사람들의 마음 빗장은 견고하게 걸어잠그고 오로지 내 목소리만 높이기 급급해질까 무섭다.
관심이 줄어들수록 소중한 가치 역시 잃어버리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관심 갖는 이들이 소수일 지라도 작은 불씨가 모이면 큰 산을 태운다는 말을 믿는다. 은근한 관심은 대상을 살리고 삶을 견디게 한다.
신형철 평론가의 <사랑의 이해> 에서 갓 태어난 아이를 위해 그가 다짐한 문장이 있다. “내가 내 삶을 지켜야 하고 나로부터 내 삶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결국 아이의 삶을 보호하는 일이다.” (…) ”아침저녁으로 각오할 것이다. 빗방울조차도 두려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죽지 않을게. ”(26쪽) 나 역시도 죽지않고 사랑하는 대상들을 향해 관심을 그치지 않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