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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ysbook Jan 28. 2023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입으로 말할 것

흉폭한 채식주의자 E43을 들으면서 느낀 것

어젯밤. 홍대 근처에서 K님과 맥주를 마시다가 흉폭한 채식주의자(이하 흉채) 팟캐스트 이야기가 나왔다. 설 연휴 본가 내려가는 기차에서 들었지만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K님에게 내일 다시 정독해서 듣겠노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아쉬움으로 남았다.

간단히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먹으면서 흉채를 진행한 팟캐스터 두 분(배추, 말자)이 한국에서의 삶과 외국에서 지냈을 때 언어와 계급에 얽힌 이야기를 듣다가 언어의 의미를 나름 정립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국 사람이 외국에 살면서 겪는 장벽이 언어 장벽이라고 하는데, 이는 의사소통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로구나.‘



언어는 한 국가에서 나고자란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뿌리 아래에서 양분을 받은 입과 귀는 말을 하고 듣는 ‘소통’ 을 시작 한다. 소통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사회적 행위인데 소통을 하면서 의견이 서로 달라 갈라서기도, 의견이 달라도 설득하기도 한다. 즉, 언어는 정체성에서 시작해서 타자와의 관계를 맺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배추와 말자 두 사람이 한국에서 비건으로 지냈어도 외국에 나서는 순간 그저 수많은 아시아인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되었는데 ‘언어화’ 의 어려움을 이번 팟캐스트에서 고백한다.


이를테면 아시아인을 향한 인종차별과 혐오를 외국에서 맞딱뜨렸을 때, 그 나라의 언어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 때론 숨쉬는 것조차 힘겹게할 만큼 사지로 밀어넣기도, 모든 것을 포기하게끔 만들기도 한다. 눈 앞에 닥친 상황이 어려우니 한국에서 가졌던 비거니즘의 삶은 아마득히 멀어지게 한다. 즉, 계급의 차이가 발생한다. 언어에 능숙한 자와 그러지 못한 자. 그러나 제 아무리 외국인이 그 나라의 언어가 능숙하더라도 외국인이라는 신분에 의해 겪게되는 고충은 자신이 공고히 믿어왔던 정체성마저 흔들어놓기도 한다. 첩첩산중이다.


현재 배추와 말자는 각각 스페인 레온과 독일 베를린에서 지내고 있다. 두 사람의 말을 듣다 문득 우리나라에 체류한 이주 노동자가 떠올랐다. 이들도 자국에서는 어엿한 직장과 주거지가 있었을테고 비거니즘처럼 자신이 쌓아올린 가치도 간직하고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발을 딛자마자 자국에 갖고 있던 것들은 후차로 밀려버린다. 가장 먼저 맞딱뜨리는 순간은 불합리한 상황일 테다. 임금체불, 인종차별 등의 눈 앞의 현실이 나를 향할 때 신념대신 생존 본능이 발동할 수 밖에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장 눈 앞에 놓인 문제를 처리하느라 모국 언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공유할 수 있는 언어의 비중조차 서서히 줄어들다 못해 소멸되기도 한다. 엄밀히 말하면 무관심 속에서 잊혀질 수도 있다. 돈을 벌러 멀리까지왔지만 시간이 흘러 살아있을 이유조차 희미해져만 가는 그들의 현실을 기사를 통해 접하다보니 한(韓)국은 한(悢)국이 되어만 가는 것만 같아 마음이 못내 무거울 때가 있다.

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들의 상황을 공감하기보다 변했다는 결과값만을 보고 판단해버린 건 아닌지 생각했다. 말자가 베를린에 있는 식당에서 고기를 다루는 상황이며 고기를 먹을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거니즘이란 가치관이 이렇게 쉽사리 흔들리는 가치란 말인가 자칫 오해로 번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언어로 정립되지 않고 행동으로만 놓고보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언어로 풀어내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한번 더 생각하게 됨을 알 수 있었다.


오늘 아침. 김혜리 기자의 팟캐스트 <조용한 생활>에서 문학평론가 신형철 교수가 했던 이야기를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그가 강의를 하면서 읽기의 함정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가 말하는 읽기에서 갖는 함정이란 어떤 글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것인지 아니면 이해하고 있는지를 분간하기 어려울 때라고 한다. 그럴 때 택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나는 모르는 게 없다만 전달을 제대로 못했다며 ‘두루뭉술’ 넘기거나 혹은 ’잘 모르니까 다음에 설명해줄게‘ 하고 인정하거나. 전자는 시간이 지나면 고학년 학생들로 하여금 간파당한다면 후자는 장기적으로 사제간 신뢰를 형성하기 수월하다는 것이다.


모름을 모른다고 인정하면 편해질 뿐더러 배워서 알려주면 서로에게 신뢰감과 더불어 사제간 ‘대화’ 를 했음을 인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니까.


사실 모름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게 쉽지 않은 것 같다. 나 역시도 비건에 관심을 가진 후로 책, 기사, 유튜브, 뉴스레터 등 콘텐츠를 어떻게든 찾았고 접했다. 그들이 쓰는 언어, 필요로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니 앎은 온전히 삶으로 녹여내지 못하고 있다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비건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말로 풀어쓰는 것도 글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도 어려운 이유가 실은 그간 접한 콘텐츠로부터 비롯한 언어에 익숙하기만 했던 것이다. 독해를 충분히 하지 못하고 넘어간 부분이많았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다.


독해가 힘든 이유는 뭘까. 여유가 없었다. 한 사람의 삶이 메시지로 전달되었을 때 나는 메시지 그대로를 기억하기에만 급급했던 것 같다. 맥락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여유가 부족했던 탓에 다음의 언어가 들어와도 비집고 들어가기 힘겨웠던 것이다. 즉, 맥락을 캐치하고 공감하는 빈도를 늘릴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19쪽 ’당신은 잃었습니다‘ 라는 말을 생각한다. 여전히 빠져 있는 목적어, 그 빈자리를.


-Womankind Vol.17 실패의 의미를 나누다

신유진, <잃어본 적 있는 사람의 언어> 중


타국으로 건너가면서 목적의식은 현생에 치여 밀려나버린형국에서도 할 수 있는 걸 하되 어떤 삶을 그려나갈 추진력조차 잃어버렸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언어화가 아닐까.


디아스포라처럼 고향을 잃고 방황하는 실향민이자 페미니스트, 아시아인,여성, 비건 등 자신을 드러내는 가치관들이 한데 얽힌 상황에서도 우리 몸에 깊숙이 새겨진 언어는 세상을 떠돌아 세상에 남는다.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시차를 뚫으면 언어를 나눌 존재는 분명 있다. 그럴 때일수록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내가 바라는 삶의 지향점을 정립할 수 있다면 좋겠다. 무엇보다 ’하나가 될 수 없으니 모두가 모여 언어를 모으는‘ 힘을 잊어선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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