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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ysbook Jan 31. 2023

살림의 음식

비건 채식모임을 하면서

비건 채식 모임에 참여한 지 두번 째. 작년 12월, 카리님의 소개로 알게되었다.

이 모임은 한살림 조합원 모임이기도 한데, 한살림에서 장을 보고 조합원들이 모여 요리를 함께 만들어 먹는 모임이었다. (한살림에 대한 정보는 홈페이지 링크를 걸어두겠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http://www.hansalim.or.kr/



오늘은 한살림 가공품위원회장님이시자 28년차 한살림 조합원이신 성희님이 요리를 하신다고 하셨다. 메뉴는 떡국이었다.


요리를 하기 전 재료 손질을 시작했다. 통나무처럼 단단한 겨울무 한 통을 식칼로 반토막 낸다음 성희님께서 무 한 조각을 한입 베어 먹어보라고 하셨다.

무 한 조각을 베어물자 아삭 소리와 함께 단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생으로 무를 베어먹으면 맵다고 생각했지만 여름철 무에서 그 맛이 난다고 성희님이 말씀하셨다. 계절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 건 풍경 뿐만은 아니었다.


자연에서 나고 자란 재료들은 맛으로 계절을 떠올리게 했다. 여름은 매운 맛으로, 겨울은 단 맛으로 같은 무라도 계절을 타고 성질이 다르다는 걸. 채썬 채소들의 크기는 제각각이었다. 굵직하거나 얇거나 일정한 크기로 채 썬 채소는 눈으로 담아도 먹기도 전에 배가 부른다만 칼질부터 서툰 나는 최대한 잘 썰어보려고 했던 것 같다.  요리를 담당하신 성희님께서 음식의 기운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 서양 사람들 생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라지만 우리는 안다. 기운과 정성은 손끝에서 나온다고. 음식은 레시피에 적힌 조리 시간대로, 계량대로 딱딱 맞춘다고 하여 음식 맛까지 비례하진 않는다고.


비록 어설픈 칼질로 뭉덩뭉덩 썬 두께가 불규칙한 무가 냄비에 담겼지만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라는 가치가 나에게 안온한 마음을 심어주었다. 혼자서 음식을 만들었을 때는 미처 떠올리지 못한 생각이었다. 내가 만들고 내가 먹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함께’ 에 방점을 맞추자 손 끝에 서로를 향한 마음이 모였다. 재료가 냄비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온기로 가득했다. 한살림 재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 손에 쥐어지는지 성희님의 설명에서 재료 하나하나를 톺아보는 재미를 느끼던 찰나 자본주의의 한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때는 계절이 변하는 속도가 3개월 간격으로 변했다지만 언제부턴가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2월에 벌써 봄꽃이 피고, 9월 중순에 한여름 더위를 맞이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기후위기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증거로구나.


‘편리함’ 에 초점을 맞춘 채 개발만을 일삼는 자본주의 논리가 지구촌에 퍼지면서 다수 만족 최소 비용 이윤 추구를 진리삼아 여기저기서 자원을 캐고 생산하기 바빴다. 땅을 갈고 건물을 세우고, 삼림을 벌목하고, 유행따라 빠르게 물건을 만들었다 철 지나면 버리기를 반복하다가 자원은 빠르게 고갈되고 지구 온난화는 가속화되었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다른 말은 ‘편리 사회’ 가 아닐까 싶다. 편리는 이윤 추구와 맞닿아있어 과정의 소중함을 앗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쉽고 빠른 것에 길들여지니 어떤 물건이 내 손에 쥐어지기까지 과정을 천천히 들여다볼 수 없게 만든다.


과정을 톺아보지 않고 우리 손을 거친 물건에게서 행복감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관심에서 멀어질수록 만족도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또다른 소비로 만족을 누리려고 한다.유행이 지나 버려지는 물건도 늘어만 간다. 소비 중독과 만족감 중독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을 보며 기후위기와 자본주의가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고서 현대인들을 가둬버린 건 아닐까란 생각도 했다. 쉽게 소비되고 간편하게 대체되어버리는 것들에게서 기쁨은 찰나이고 불안은평생인 듯 싶다.


냄비 안에서 손질한 채소들과 포도씨유를 넣고 볶았다. 잠시 후 무와 애호박 등에서 머금었던 채수가 흘러나왔다. 채수와 기름 그리고 불이 만나 구수한 냄새가 퍼졌다. 재료를 손질하고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들여다보니 명상을 하는 것처럼 깊은 평온함이 찾아왔다.


자본주의 논리는 식탁에서도 자유롭지 않았다. 원료보다 첨가물 가득한 재료로 음식을 만들고 허기를 채우다보니 신체엔 건강보다 어딘가 허전함이 깃드는 것 같다. 먹어도 헛헛한 느낌이 드는 건 위장 뿐만 아니라 심적으로도 영향을 미치곤 했다.


살면서 낯선 사람들끼리 함께 요리하고 식사를 하던 순간이 언제였나 싶다.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기 힘들어지는 마당에 느슨한 관계조차 위태롭게 느껴지고 근본적인 외로움을 떨칠 수 없는 현실에 음식은 곧 관계의 영역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재료와 사람 그리고 음식의 관계에서 맛이 우러나오듯 내가 어디에 관심을 갖고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오곤 하기에.


아직도 관계에 대해 깊이 알진 못하지만 짧게나마 살면서 느낀 건, 좋은 관계를 맺고 지내면 좋은 순간들에 다다를 가능성이 높고 반대의 경우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었다. 좋은 것들만 취하고 나쁜 것들은 버리고 싶어도 세상은 날 때부터 동전의 양면처럼 좋고 나쁨을 품고 지낼 수 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그럼에도 좋은 것들이 쌓이면 좋은 결과들을 일궈갈 기회는 늘어난다는 믿음이 경험을 통해 갖고 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왜 이런 물건을 만들었나 싶지만, 생산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어떤 물품이 나온건 생산지에서 어려움이 있거나 소비자의 요구가 많다.” 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하셨다. 생산자의 입장에서도 이해하고 소비자 입장을 이해할 때 한살림이 시작한 근본으로 돌아간다. 농부의 관점을 이해하게 된다.


28년 간 한살림 조합원으로 활동한 성희님의 이야기에서  입장이 서로 다른 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교집합을 내기보다 마찰만 빚다 튕겨져버리는 양극단의 시대에서 근본을 들여다볼 겨를조차 없는 건 아닐까, 혹은 권력자들이 피권력자들의 목소리를 묵살하고는 근본을 왜곡하고 있는 것만 같아 무기력함이 느껴지던 순간을 떠올렸다. 관계의 본질은 결국 무엇일까 결국 어떻게 나은 삶을 그려나갈까 고민하면서 접점을 맞춰가는 것이 아닐까.


저녁을 든든히 먹고 대화로 식탁을 채운 뒤 바나나 브라우니로 입가심을 하면서 송은님의 책 출간을 축하했다. 별 것 아닌 음식이라 생각했는데 맛있게 먹는 사람들이 자아낸 미소와 누군가를 축하하는 자리까지 더해지니 별 것 아닌 위안을 한 스푼 떠먹는 듯했다.


살림이란 단어의 의미를 떠올려본다. ‘한 사람을 살리는 것’ 과 ‘살아가는 상태’ . 오늘 먹은 떡국 한 그릇을 나눠 먹으면서도 사람을 살리며 살아가는 의미도 나누었다. 덕분에 배와 마음이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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