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일간 Aug 22. 2024

당신 언어의 무게는 어떤가요? 피터 비에리에 대한 헌사

붙잡아둔 순간의 생각들

좋아하고 연로하신 작가분들의 신작을 보면 많이 반갑다. 좋아하는 생각과 문장을 더 볼 수 있어 행복하다. 특히 해외 작가의 경우 근황이 전해질 일이 거의 없기에 생존신고처럼 들린다. 그것도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의 생존신고.




파스칼 메르시어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로 유명하다. 30대의 나를 지켜준 책. 기억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 여러 번을 읽었어도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에 남는 것은 주인공이 내면의 소리를 따라 일을 그만두고 오래전 혁명가의 ‘글’을 찾아 읽어가면서 점차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 ‘글’들은 인간 존재에 대한 똑똑하고 용기 있는 자 스스로의 질의응답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던 시절, 허술하지만 그 시간을 버텨낼 나름의 생각과 마음을 갖게 도와주었다.


이후 이 작가의 본명인 피터 비에리로 발간된 책을 찾아보았다. 철학으로 분류된 빨간 ‘자기 결정’이라는 책을 찾았다. 철학책은 허영심에 가끔 사지만 잘 안 읽는다. 이 책은 100쪽도 안되고 만원도 안 하는 조그마한 책이었다. 사서 바로 읽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혁명가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들이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

이렇게 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이렇게 하라고 한다.


바깥보다 나 자신 안쪽에서의 소리에 집중하기.

그 소리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그 소리로 자아상을 만들고 계속해서 업데이트하기.


이 책은 인생의 새로운 지침서가 되었다. 작가는 글을 써보라고 권했다. 잘 모르겠는 것들을 글로 쓰면 정리가 될 거라고 했다. 두리뭉실한 마음속에만 있는 것들을 현실의 언어로 적으면 구체화될 것이라고. 이해는 하였지만 시도하지 못했다. 여유가 없다고, 글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쓰이냐며 마침표 없는 메모만 몇 개 적어두고 말았다.


‘자기 결정’을 읽고 나니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작가의 모든 생각이 들어간 완벽한 소설로 보였다. 이 책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았다. 가장 아름다운 은퇴선언이랄까. 더 할 말이 없을 것만 같았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느낌이 그랬다. 아티스트가 혼신의 힘을 넣은 마지막 역작 같은 느낌. 검색할 당시 나이가 이미 70이 다 되어갔다. 그렇게 한 작가의 영혼은 다 엿보았다고 생각했다.




수년이 흘렀다. 힘든 시기가 왔다. 알고는 있었다. 삶의 의미는 언제든 중요하고 그것을 열렬히 고민해야 한다고. 하지만 갑자기 희소해진 삶은 그 의미에 대한 고민도 사치로 만들었다. 쉽게 무너졌고 간신히 일어섰다. 몇 번이고 반복했다. 누구도 무엇도 잘못이 없었다. 그래도 이유를 찾으려 했다. 천재지변이라 교수님은 생각하라고 했다. 하지만 세상에 나만 특정하여 찾아온 천재지변이었다. 없는 이유를 찾아 헤매면서도 주변 지인들에게는 괜찮다고 했다.


입원을 기다리는 중, 책 ‘언어의 무게’ 출판 소식을 보았다. 600페이지가 넘는 소설책이었다. 70대 후반이실 것 같은데. 너무 반가웠다.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할아버지를 한번 더 보러 가는 느낌으로 그날 저녁 서점으로 향했다. 바로 열어서 읽고 싶었지만 양손으로 꼭 끌어안고 돌아왔다. 입원해서 읽기로 했다. 줄거리도 사람들의 평도 전혀 몰랐지만, 작가의 이름만으로 나는 1주일 가까이의 입원 기간을, 혹시 모를 고통을, 내 상황에 대한 걱정을 모두 줄여줄 것이라 확신했다.


치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흔들리는 육체를 잠시나마 무시하고 싶을 때, 영혼이 버틸 만큼 버텼을 때, ‘언어의 무게’를 펼쳤다.



주인공은 말기암 환자로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인생을 되돌아본다. 무엇이 중요했는지.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정리한다. 신기했다. 시한부는 아니지만 쉽지 않은 병으로 진단을 받은 나였다. 되돌아볼 인생이 주인공에 비해 짧은 것은 속상했지만,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주인공처럼 좌절하고 방황하던 나이기에 그처럼 이겨내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책을 더 읽어가니, 주인공의 시한부는 오진이었다. 나와는 다른 결말이라 속상했다. 배신감도 조금 들었다. 괜히 먼 타국의 얼굴도 잘 모르는 작가 할아버지가 조금 미웠다. 그래도 그 오진을 알아가기까지 절망 속에서도 나름대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충분한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흐르는 시간이 아닌 내 시간을 살아갈 지혜를 함께 얻었다. 시간이 적고 소중하다면, 그만큼 중요한 것을 우선해서 살면 더 가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음을 배웠다.


“인생은 아름답다. 삶이란 언제나, 매 순간 시작되니까.”

이 존경하는 할아버지 작가이자 철학자 선생님은 이 책에서도 또 글을 쓰라고 권했다. 주인공을 한 명 만들고 어디에 던져둔 다음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무엇을 시키고 싶은지. 무슨 일들이 있으면 좋겠는지. 이제는 이 선생님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아 글을 써보았다. 주인공은 나였고, 그 주인공은 항상 완성하지 못했던 글을 완성해 보려는 중이었다.  


오진을 발견한 주인공이 말하듯 나도 ‘길게 연장된 삶, 중요하지 않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평범한 걱정으로 가득한 진부한 삶’으로 좀 더 옮겨왔다. 병상에 누워 생각했던 것들은, 절대 못 잊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은 신기하게도 얼마 남아있지 않다. 무서울 정도로 없다. 그래서 그때의 절박함을 잊지 않도록, 진부한 삶 속에서도 삶의 소중함을 흘려버리지 않도록, 나 자신을 계속 이해하고 발전시키고자 글을 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작가를 검색했다. 작가는 내 병이 가장 심했을 작년 봄에 돌아가셨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이기에 오진이었으면 해서 글을 썼을까? 아니면 그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도 더 가치 있게 살고 싶어 시간의 밀도를 높이고 싶었을까? 둘 다였을지도. 괜히 주인공의 결말이 달라 속상해하던 내가 초라하고 미안해졌다. 끝까지 반항하고 말 안 듣는 제자가 된 것 같다.


그래서 말을 들어보려 한다. 언젠가는 소설을 쓸 것이다. 내 30대의 은사가 나에게 한 것 같은 유언을 지켜야 할 것 같아서.




좋은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곳은 당신의 소망처럼 모두가 스스로 행복하고 존엄하길 바랍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