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선 수필
먼저, 물건을 넣어 보관하던 가구로, 물건을 넣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가방으로, 최상의 예의를 갖추어 보내지는 선물의 포장으로 쓰이던 오래 전의 그 세월을 지나, 세상이 풍요로워지고 그 일상 용품들이 흔해지는 바람에 뒷전으로 밀리고 잊혀 유물 취급을 받던 또 다른 시절을 지나, 이제 온전히 너의 미적 가치와 예술적인 의미로 주목받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해.
반듯하게 다림질된 너의 말끔한 모습을 보면, 비단의 은근한 광택과 소박하고 단순한 패턴, 바늘땀의 두드러지는 색상, 그런 것들이 이루어내는 감각적인 조화와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와.
너는 물건을 만들고 남은 천조각들을 버리지 않고 모아 만들었던 재료의 재활용이라는 의도에서 탄생되어, 평범한 여인들의 야문 손끝과 아마추어적인 순수한 발상에서 비롯된 독창적이고 신선한 감각과 폐물의 미학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켜 왔어.
자투리 천이 가지고 있는 색상과 모양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연스러우면서도 조화로운, 직관적인 구성으로 놀라움을 주더니, 오늘날 재료가 넘쳐나는 시대에 이르러서는 남은 원단의 활용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그 배색과 패턴 구성에서 이제는 작가의 정신과 감정을 의식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지.
작가의 정신과 감정의 의식적인 표출, 이것이 바로 현대적인 예술 표현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어. 그렇게 너는 예부터 사용해오다가 현대에 와서 기능성과 경제성을 잃고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진 무수한 물건들과는 달리, 오브제의 미학이 구현된 직물 회화로서 현대 조형예술의 의미 있는 한 부분이 된 거지.
너를 만들기 위해 천 조각을 자르고 다림질을 하고 손바느질로 바느질 해 이어 붙이는 과정은 시간이 보통 많이 걸리는 일이 아니야. 그중에서도 마름질을 한 뒤 손으로 바느질을 하는 부분은 놀랄 만큼 단순한 동작의 끝없는 반복들로 채워져 있어.
무릇, 단순한 행동의 끝없는 반복은 머리를 비우거나 생각을 집중하는데 아주 좋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고 수많은 촘촘한 바늘땀들은 몰입의 결과물 일수도 비움의 결과물 일수도 있어. 머릿속에 가득 찬 잡생각들을 다 밀어내고 의식을 비움으로써 비로소 집중과 몰입을 할 수 있는 거니까. 보자기 한 장을 가득 채운 그 바늘과 실의 궤적들은, 단순히 원단 조각들을 이어 붙이기 위한 기술을 넘어서 오랜 시간 동안 바늘과 실로, 쓴 작가의 삶의 이야기라는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마치 손글씨로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 일기처럼 말이야.
너는 너를 만든 사람의 마음과 정신, 비단 조각들을 손에 들고 지냈던 그 많은 시간들로 완성되는 거야. 옷을 만들고 남은 비단을 차곡차곡 모으는 마음, 구겨진 조각들을 반듯하게 다림질하는 정성, 조화롭게 구성하려 했던 고민, 손으로 바느질해 이어 붙인 그 인내와 몰입의 시간, 이 의식과 무의식이 합쳐진 모든 과정 말이야.
그러는 동안 너에게는 너를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깃들게 된 거지.
누가 그러더라고,
'오랫동안 만지다 보면 물성(物性)이 심성(心性)이 되는가 보다.' 라고......*
그래, 바로 그래. 모든 것들이 눈 깜짝할 새에 쉽게 만들어지는 세상이야. 순식간에 퍼져 나가 유행하고, 소비되고, 또 그만큼 빨리 사라져 버려. 물(物)이 심(心)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거지. 버튼 하나로, 클릭 한 번으로 수없이 복사되고 번호가 매겨지는 이런 편리한 세상을 누리느라 잊고 있던, 심성(心性)이 된 물성(物性), 이젠 그런 것들을 그리워해야 할 때야. 아무리 빨리, 많이 변한다 해도 결국은 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고, 아무리 많은 아름다운 물(物)이 넘쳐난다 해도 사람들은 물(物)에 깃든 심성(心性)에 진정으로 끌리는 거니까.
넌 이미 물(物)이면서 심(心)이지. 너를 보는 것은 아름답게 표현된 비단 조각들과 촘촘한 바늘땀만을 보는 것이 아니야. 고민과 정성으로 이루어진 긴 시간과 당시의 과정을 견디는 마음, 기억들, 미래에 대한 꿈, 이런 것들을 만나는 거야. 그런 것들이 삶이지. 그런 삶이, 물(物)로 넘쳐나는 이 세상에 조각보라는 진정한 물(物)로 온 거야.
추신 : 이런 시를 읽었어.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중략)....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전현종, <방문객> **
반가워.
* Eric Jeon, 2016. 4. 20. 페이스북 답글에서.
** 방문객, 전 현종 (1939~) , 시집 <광휘의 속삭임> 문학과 지성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