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선 수필
빗방울이 떨어진다.
지난 몇 주 동안 선선했다, 더웠다, 하길 반복하더니 6월 대낮에 비가 오고 날씨도 쌀쌀하다. 하긴 다음 주엔 또 불볕더위가 예고되어 있긴 하다. 이곳 캘리포니아의 기후는 큰 기온차 없이 늘 따뜻한 편이다. 우기인 겨울에는 주로 밤사이에 비가 내려도 아침에는 그치는 경우가 많아 깨끗하고 싱그런 날로 채워지고, 기온이 적잖이 올라가는 여름에도 건조한 탓에 후덥지근함이 없어 햇볕만 잘 피하면 그럭저럭 견딜만하게 따끈따끈하다. 기후로만 따진다면 세계에서 최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손가락 안에 꼽는 곳이라 자랑할 만한 곳이다.
이곳 기후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Indian Summer'라고 부르는 늦더위를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3월의 늦추위인 '꽃샘추위'가 있는 것처럼, 'Indian Summer'라 부르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9월을 달구는 늦더위가 있다. '꽃샘추위'가 한겨울의 추위 못지않게 혹독한 것처럼, 실제로 이곳은 여름이라 부르는 6,7,8월 보다 9월의 이 늦더위 때의 기온이 더 높고, 한참 여름일 때도 꽤 큰 일교차 덕에 모르고 지내는 열대야를 'Indian Summer' 기간 동안 겪는다.
그랬었다.
날씨가 이상해졌다.
내가 캘리포니아로 건너온 후 지난 몇 년 간, 이곳에는 겨울에 비가 오지 않았었다. 이상 기온이라고 했다. 겨울에 내린 비가 있어야 건조한 여름을 보낼 수 있는 이곳은 바로 심각한 가뭄을 겪게 되었다. 그렇게 두어 해를 지내고 난 뒤 시에서 발송한 상수도 관련 안내문에는 그동안 사용한 수돗물의 양과 그 증감 상태가 그래프로 보기 좋게 나타나 있었다. 정원의 스프링클러 작동은 일주일에 두 번만, 집에서 수돗물로 하는 세차를 금지한다는 등, 여러 가지 실천 조항과 그로 인해 절약할 수 있는 물 사용량의 수치가 기재되어 있었고, 어길 시에는 벌금을 부과하겠다는 글이 함께 쓰여 있었다. 사람이 먹을 물도 부족하다는데, 마당에 귀한 물을 뿌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여름 내 집집마다 바싹 마른 누런 잔디가 드러누워 있게 되었고, 먼지가 뽀얗게 쌓인 지저분한 차를 핑계 김에 타고 다녔었다.
그러다가 지난겨울, 비가 왔다. 아니, 늘 오던 것보다 훨씬 많은, 엄청난 양의 비가 내렸다. 우리나라의 여름 장마철처럼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이 겨울 내내 이어졌고, 기온도 많이 내려가 이곳에서는 생소한 겨울 추위라는 것을 겪게 하더니, 급기야 콩알만 한 우박이 떨어지는 어두컴컴하고 차가운 날도 두어 번 겪었다. 곳곳에 홍수가 나서 도로와 저지대의 집들이 침수되고, 해안가의 절벽이 침식되어 멋진 경관을 자랑했던 집들이 바다로 떨어지기 일보직전까지 갔었다. 강수량이 충분하니 보통 3월쯤이면 다시 누렇게 변하는 산들은 6월이 될 때까지 초록이었고 산마다 들마다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었다. 캘리포니아 남부의 'Anza Borego'는 -'Super Bloom'이라 불리는- 사막이 꽃밭으로 변하는 신묘한 일도 벌어졌다. 갑자기 꽃천지가 되니 알레르기가 창궐해 사람들은 예쁜 경관을 두고도 가급적 집안에 머물면서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칩거하고 있으니, 정말 세상에 다 좋은 일은 없는가 싶다.
골목 맞은편 집에 살고 계신 할아버지가 "내가 이 동네에서 49년을 살았는데, 그동안 이런 날씨는 없었다."라고 하시는 걸 보면 날씨가 이상하긴 이상한가 보다. 또 그 옆집에 아저씨가 "내가 캘리포니아에서 40년을 살았는데 6월에 비가 오는 꼴은 첨 본다."라고 하는 걸 보니 진짜 그런 모양이다.
'2015년,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뜨거웠던 해'라는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다음 해 바로 그 기록을 경신해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뜨거웠던 해, 2016'이라는 기사가 똑같이 났다. 아무래도 똑같은 기사를 올해 또 보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온 지구 전체가 이렇게 해마다 더워지고 우리가 여태까지 알던 기후의 전형을 뛰어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제 '삼한사온'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처럼, 이곳도 지난 몇 년간의 날씨를 보면 'Indian Summer'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걸 느낀다. 여느 해 같으면 선선했을 6월의 기온이 벌써 화씨 100도를 넘긴 날이 많은 걸 보면 올해도 'Indian Summer'는 9월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벌써 여러 번 왔다 간듯하다.
이렇게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 것을 체감하고 있는 와중에, 트럼프 대통령의 '파리 기후 협정' 탈퇴 선언 때문에 온 세계가 시끄럽다. 미국은 이미 '교토 의정서' 때부터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국제 협약에서 탈퇴를 하는 등, 경제적인 논리를 앞세워 비협조적으로 처신했던 경력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도 안 되는 '파리 기후 협정' 탈퇴 핑계와 더불어 전 세계 온실가스의 25%를 배출하는 나라의 입장에서 할만한 행동은 아니다.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온실가스 배출은 지구 온난화를 촉진하는 주요한 원인이다. 미국은 알래스카의 석유 시추와 해빙으로 인해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 땅속으로 꺼지고, 엘리뇨 (El Niño)와 라니냐 (La Niña) 같은 극단적인 기후가 점점 자주 발생하며, 중부 내륙지방은 해마다 강력해지는 토네이도의 피해를 입는 등, 실제로 지구 온난화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고 있는 나라이다.
하지만 지구 온난화로 인해 정말 심각한, 생존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피해를 입고 있는 대상은 산업화되지 않은, 온실가스 배출에 기여하지 않은 나라들이다. 알려진 대로 '투발루'는 이미 영토의 일부가 바다에 잠겼으며 아름다운 휴양지로 이름 난 '몰디브'도 같은 위험에 처해 있다. 산업화된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가 별생각 없이 소비하는 화석연료가 저 멀리 대양 한가운데 아름다운 나라들을 침몰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구 온난화는 거짓말이다'라는 말이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다.
인간이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안, 처음에는 그저 우리 앞에 당장 놓인 생존의 문제들을 해결하려 자연 속에서 치열했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발전과 편리함이라는 이름 아래 자연을 거스르고 오염시켜왔다. 그리고 지구의 오랜 변화 단계를 지칭하는 지구의 지질학적인 연대기에 '인간세'라는 이름을 올리기까지 했다. 이제 지구는 자연에 의해 조절되고 진화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에 의해 변화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46억 년이라는 지구의 나이는 구체적으로 인식하기엔 너무나 긴 시간의 개념이고, 그 긴 시간 동안 지구는 자연 생태와 더불어 여러 번의 기후의 변화를 겪어왔다고. 지금 우리가 사는 시기가 빙하기 사이의 간빙기이고, 어차피 지구가 더워지고 온난화되는 바로 그 시기에 하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중세시대만 해도 지금의 기후보다 훨씬 추워서 빙하가 유렵 대륙의 절반을 덮을 정도로 내려와 있었고 산업화 이전부터 이미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고, 지구의 역사상 한 과정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간빙기에는 기온이 올라가는 것이 맞다고 할지라도 그 온난화를 지금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가 비정상적으로, 아니 지구 역사상 유례가 없는 속도로 부쩍 앞당기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요점이다.
46억 년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시간 개념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지구의 역사를 단 1년이라고 압축한다면, 인간의 달착륙은 지금부터 약 0.1초 전이며,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간 것은 약 4초 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인류가 이 지구 상에 출현한 것은 겨우 4시간 전에 불과하다니, 오랜 지구의 역사 중 인간은 얼마나 짧고 미미한 순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일 년 중 겨우 4시간 전에 출현했을 뿐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요즘처럼 이렇게 눈에 보이게 변하는 자연 생태계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온난화가 결코 지구 진화의 당연한 한 부분인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비가 지나치게 왔던 어떻던, 지난겨울의 강수로 인해 캘리포니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간절히 기다렸던 해갈이 되었다. 내가 사는 이곳이 한시름 돌리니 한국에 가뭄이 심각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맘때쯤, 봄이 되면 늘 가뭄에 대한 우려가 빈번했던 것을 알지만, 올해는 많이 심각한 모양이다. 이러다가도 장마철이 되면 또 집중호우로 인해 홍수가 나고 강물이 범람할 것이라는 것을, 수십 년 살았던 경험으로 알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이런 가뭄과 호우의 정도가 점점 극심해지고 극단적으로 되는 것이 우려할 점이다. 특히 여름이 아열대의 기후처럼 견디기 힘든 더위가 되었다는 말이 들리더니, 대구의 아파트 베란다에 심어둔 바나나 나무 화분에서 바나나 열매가 열렸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이제 대구는 사과가 아닌 바나나가 특산물이 될 날이 머지않은지도 모르겠다.
해마다 오뉴월이 되면 상자에 넣어두었던 모시발을 꺼내 창에 걸고는 했었다. 아지랑이가 수그러들고 해가 강해지는 계절이 오면, 깨끼 바느질한 투명한 발이나 쌈솔 바느질한 모시발을 곱게 다림질 해, 창을 가리고 서늘함을 즐겼었다. 사시사철 날씨가 좋은 이곳 캘리포니아에서도 나름 계절이 있어서 이맘때쯤이면 더욱더 빛이 눈에 들어오고, 매듭을 묶어 창에 걸면서 마음이 선선해지는 건 변함이 없다.
건조한 기후 덕에 높은 기온에도 불구하고 서늘한 그늘을 가진 이곳에서, 한 장의 조각 발이 걸린 그늘에 앉아, 올해도 또 하나의 여름을 바느질을 하며 보낼 참이다. 그러다가 이곳의 대단한 햇살로 인해 그 그늘로도 해결이 안 되는 더위가 집안에 가득 차면, 방학을 맞은 아들과 차라리 그 뜨거움을 즐기러 나가기도 할 것이다.
산후조리와 갓난아기를 안고 지내느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보냈던 내 생애 가장 더웠던 여름이 생각난다. 여름이 가장 깊어졌던 8월, 백일이 갓 지난 아들을 안고 첫 여행을 갔었다. 매미 울음소리로 빈틈없이 가득 찼던 충남 서산의 어느 산속, 수백 개의 울퉁불퉁한 돌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내 어깨에 작은 머리를 얹고 안겨있던 따뜻한 몸뚱이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 계단 꼭대기에 있는 '개심사'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부엌을 가진 절이다. 절집의 그 흔한 꾸밈인 단청 하나 칠하지 않은 수수한 건물 '심건당'에 마치 사람 몸뚱이 만한 큰 붓으로 한 번에 휘갈겨 그은 듯한 모양의 통나무들을 통째로 사용해 지은 부엌이 있었다. 벽체를 받치고 있는 세로 기둥들과 부엌문 위를 가로지른 기둥, 그리고 수없이 넘나들었을 문지방 턱까지, 모두 다 그랬다. 가지런하게 깎아내거나 다듬지 않고 생긴 그대로 사용한, 구부러지고 휘어진 모양의 나무기둥들이 그 백골 집을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자연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자연 그대로의 것을 사용하면서 자연 속에서 어울려 살던 시대를 생각해 본다. 세상이 변하고 사람들은 이제 비록 자연에서 많이 멀어져 살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산이나 바다를 찾아 흙을 묻히고 물에 발을 담그고 싶어 하고, '심건당'의 오래된 부엌 같은 것을 보러 울퉁불퉁한 돌계단을 오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우리도 그 나무들처럼 자연의 한 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만든 기술과 발전이 세상 모든 것을 빠른 속도로 변하게 할지라도, 해마다 돌아오는 사계절과 어릴 적부터 먹어왔던 먹거리들이, 어르신들이 들려주시던 이야기 속의 동물들이 너무 빨리 변하는 기후 속에서 없어지고 멸종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남태평양 한가운데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천국 같은 나라들을 나의 아들과 손자 혹은 손녀도 가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올 해는 늦여름에 때 맞춰 'Indian Summer'가 왔으면 좋겠다.
*지구의 역사가 1년이라면, 데이비드 J 스미스, 푸른 숲 주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