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지이이잉~~ 지이이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휴대폰이 울었다. 한 손으로 현관문을 열면서 전화를 받았다.
"예, 이모, 어쩐 일이세요?"
"너희들은 으째 그러냐?"
다짜고짜 노기 띤 음성이 되받는다.
"예?"
"느 어머니 감기몸살 나서 누웠는데 전화 한 통화가 없구, 으째 그러냐고."
"예? 아까 통화했었는데요. 오늘 병원에 가신다고......"
말을 흐리는 영수에게 이모는,
"너 말고 니 처 말이다. 시에미 아픈 거 모르냐?"
"네에, 아마 아직......, 요즘 며칠 많이 바빠요."
"또? 걔는 도대체 안 바쁠 때가 언제라냐? 그런 애는 내 첨 본다."
"진짜로 많이 바빠서 그래요. 죄송해요. 요즘 잠도 거의 못 자는 걸요."
"뭐라구? 내 참, 말하는 내가 바보 같구나."
전화가 확 끊긴다.
집에 들어와 신발을 벗으며 영수는 짜증이 났다. 도대체 무슨 전화 매너가 이러냐고. 사정은 들어보지도 않고 화만 내는 전화를 받으니 모처럼 일찍 퇴근했다는 기쁨이 싹 가셨다. 가방을 내려놓고 전화기에 충전기를 꽂으려다가 영수는 버튼을 눌렀다.
"어머니, 저예요."
"응, 그래."
영수는 손을 씻으며 저녁 메뉴를 생각해 보았다. 실로 한 열흘 만에 같이 하는 저녁 식사였다. 맞벌이를 하는 그들 부부는 언제나 함께 있는 시간이 아쉬운 처지였다. 요즘 탁월한 신약 개발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제약회사의 연구원인 선희가 밤샘을 밥먹듯이 하고 출장도 그에 못지않게 잦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범생으로 일탈행위 없이 잘 자란 영수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공기업에 단번에 입사해서 직장생활을 해 온 지 이제 삼 년째, 막 대리를 달은 참이었다. 그들은 온라인을 통해 가입한 식도락 동호회에서 만나 같이 밥을 먹으러 다니면서 친해져 결혼을 했다. 그들에게는 식도락이라는 공통점이 있기는 했지만 요리에 있어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때 요리학원까지 다녔을 정도로 요리에 관심이 있는 영수에 반해서 선희는 결혼하기 전에는 식칼 한번 잡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슈퍼에서 장을 보면서도 원산지나 성분 등을 꼼꼼하게 떠져보고 살 정도로 식생활에 관심이 많은 영수는, 결혼 초, 된장찌개를 끓이면서 소금으로 간을 할지 간장으로 간을 할지를 물어보는 선희에게 어지간히 놀란적이 있었다.
그 뒤로도 영수가 식사 당번일 경우, 쇠고기를 다져 넣고 자작하게 끓인 강된장에 쌈을 싸서 먹거나 조개와 마늘을 듬뿍 넣은 파스타를 먹는 반면에 선희는 설탕을 너무 많이 넣어 들큼한 김치찌개나 그도 아니면 생식을 내놓기 일쑤였다. 그나마 너무 바쁜 선희의 일정 때문에 함께 밥을 먹는 날이 한 달이면 손에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모처럼 일찍 퇴근해 마주 않은 밥상은 선희에게 조금 의외였다. 이렇게 오랜만에 함께하는 식사에는 항상 특별한 메뉴를 차려내곤 했던 영수였는데 오늘은 콩나물국에 김치뿐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콩나물국은 오늘 아침, 시간에 쫓겨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싱크대 앞에 선 채로 밥 한술 말아 후루룩 마시고 갔던 그 국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며 잠자코 밥을 먹었다. 선희의 머릿속은 곧 내일 있을 신약 발표로 가득 찼다.
영수는 잠자코 밥만 먹는 선희를 보며 짜증이 났다. 무슨 여자가 과묵하기가 마치 소 잡아먹은 귀신같았다. 평소와 다른 자신의 행동에 무슨 일 있냐고 한번 물어보지도 않는 그녀에게 잔뜩 서운했다. 늘 조용하고 평온한 그녀를 사랑한 그였지만 오늘은 어째 곱게 보이지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물을 마시면서 다시 건너다보니, 눈 밑이 거뭇한 것이 무척 피곤해 보였다.
하긴 근 열흘째 강행군이었다. '새벽에 퇴근한 날도 닷새나 있었으니......"
"어머니 아프신 거 알아? 몰라? 전화 좀 해 드려. 너 며느리 맞니?"
안쓰러운 마음과는 다르게 밑도 끝도 없이 퉁명스레 말이 나왔다.
"입원하셨다는데, 가보지는 못해도 전화는 해야 할 거 아니야."
"?"
선희는 처음 듣는 말에 깜짝 놀랐다. 정신을 차리고 가만히 생각을 해 보았다. 시어머님 편찮으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금시초문이었다. 한편, 너무 바빠서 듣고도 잊어버렸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영수의 저런 말투야말로 처음이었다. 아마도 시이모님께서 전화를 하신 모양이었다. 다혈질이고 나서기 좋아하는 영수의 이모는 남편 없이 혼자 사는 동생을 과잉보호하려 들었다. 게다가 결혼 한지 이제 구 개월밖에 안된 질부에게 태기가 없다며 늘 바쁜 선희의 탓이라고 했다. 선희는 시이모의 셩격이 어떻다는 것을 알아챈 뒤로는 그저 그러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영수는 항상 이모의 날카로운 말에 기분을 상해했다.
이런저런 추리를 하며 앉아있는 선희를 보며 영수는 너무 답답했다. 아무 말도 안 하는 그녀가 꼭 자기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알았어요. 내가 잘못했어."
선희는 일어나서 식기세척기에 설거지 감들을 넣기 시작했다. 일을 마치고 거실로 나온 그녀는 그때까지 씩씩거리고 앉아있는 영수를 지나쳐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어머님, 네, 저예요. 편찮으시다고요. 이제야 전화를 드리고...... 정말 죄송해요. 네, 좀 바빴어요. 네, 이제 다 끝나가구요. 예, 예. 죄송해요. 내일 내려갈게요. 뭐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그래도...... 네, 몸조리 잘 하시구요. 어머님 아프시면 저랑 영수 씨랑 어떻게 해요. 네. 그럼 내일 뵐게요."
전화를 끊고 '이젠 됐지?'라고 얼굴에 쓰고 쳐다보는 선희를 보자 영수는 말이 곱게 안 나왔다.
"너 차암 잘났다."
"진짜 오늘 왜 그래에?"
"뭘 왜 그래? 여태 내 말은 뭘로 들은 거야?"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냐구."
"화 안 나게 생겼어?"
"뭐가? 바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어. 무슨 남자가 그렇게 쪼잔해? 그냥 좋게 말로 해도 될걸 신경질이나 내구."
"뭐? 쪼잔? 그래, 나 쪼잔하다. 너야말로 오늘 차암 길게 말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뉘 집 개가 짖냐 하고 들은 채도 안 하는 게."
"내가 언제? 그리구 나 말없는 거 모르고 결혼했어? 왜 괜히 트집이야?"
"뭐? 트집? 넌 여태 내 말이 트집으로 밖에 안 들리니? 그리구 도대체 니가 이 집에서 하는 일이 뭐야? 너야말로 맨 날 네 생각만 하고 살잖아! 그러면서 뭐? 쪼잔? 넌 이기적인 인간이야. 그거 알기나 해?"
그들은 결혼 후 처음으로 큰 싸움을 했다.
"꽈당!"
영수는 문이 부서져라 닫고 침실로 들어갔고 선희는 거실에 남아 그 문을 쳐다보았다.
'성질 하고는...... 저러다 문짝 부서져서 고치려면 다 자기 일이지.'
영수는 습관적으로 팔을 뻗다가 닿은, 축축한 기운에 잠이 깼다. 침대 옆자리에 누웠던 흔적은 있는데 선희는 벌써 나가고 없었다. 잠결에 만진 것은 선희의 베개였고, 어찌 된 일인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내가 너무 심했나? 오늘이 신약 발표회라고 했는데...... 근데 이건 왜 이렇게 젖었어?'
"아!'
베개가 이렇게나 많이 젖은걸 보니 밤새 울다가 나간 모양이었다. 평소 말도 없고 항상 평온한, 극단적인 감정을 잘 보여주지 않는 선희였다. 여태 눈물을 흘리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나 젖은 베개를 보니 영수는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이가 너무 좋아 싸울 일이 없었던 그들 부부였는데 처음 싸움을 하고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영수는 너무나 미안했다. 자기를 깨우지도 못하고 소리 죽여 눈물을 흘렸을 선희가 너무 안쓰러웠다. 눈물이 베어 축축해진 베개를 안고 영수는 마음이 많이 아팠다. 게다가 침대 옆 협탁에는 생수 한 컵과 홍삼 영양제 한알이 놓여 있었다. 영수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응, 난 괜찮아. 응...... 알았어요."
전화를 끊는 선희를 보며 입사 동기인 미라가 물었다.
"누구? 신랑?"
"응."
"맨날 바빠서 같이 놀아주지도 않는 색시, 뭐가 이쁘다고 아침부터 전화는...... 그래도 아직 신혼인데, 요즘 계속 바빠서 신랑 밥은 한 번 해줬나 몰라. 암것도 못하고 살지?"
"그렇지 뭐......"
"내 그럴 줄 알았다. 영수 씨 같은 남자 없다. 나두 그런 남잘 만나야 하는데......"
"왜 그래. 그래도 오늘은 침대 옆에 영양제도 챙겨주고 왔네. 바빠서 허둥대다 베개에 물을 쏟아서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