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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Jun 21.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24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24 레온

 

메세타 고원지대는 레온(Leon)까지 이어진다. 200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메세타 고원지대는 이제 오늘 하루만 더 걸으면 끝이 난다. 건조하고 더운 날씨,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 큰 변화 없는 풍경, 뜨거운 태양아래 그늘도 없는 이 구간이 걷기 싫어서 건너뛰는 순례자들도 많다. 걸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다른 행성을 걷는 듯한 이 오묘함을. 가도가도 나오지 않는 마을, 지루하리만치 같은 풍경의 반복같지만 매일매일 달라지는 그 미묘한 차이를 발견해가는 과정을. 변화무쌍했던 북쭉길이나, 그 어디에도 비길 때 없는 장관을 선보인 피레네 산맥과는 또다른 감흥이 있는 곳. 오늘이 마자막이다. 25킬로 남짓만 가면 레온에 도착한다.

대도시인 레온까지의 길은 큰 대로변을 따라 걷는 길이 대부분이다. 처음 보는 편도 4차선 도로. 수많은 차들이 달리고 있고, 순례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과 마주친다. 갑자기 내 땀에 젖은 허름한 옷과 큰 배낭이 멋적다. 큰 도로 옆을 조금 벗어나 작은 마을을 지나칠 때였다. 갑자기 양 울음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깊은 산골짜기 시골도 아니고, 저 멀리 도시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인데 양떼라니…

눈을 돌려보니 오른편 숲 속에서 백여마리의 양들이 무리지어 달려오고 있다. 양들을 이리저리 모는 두 마리의 개. 그리고 맨 뒤에서 뒷짐을 지고 걷는 20대로 보이는 목동. 그리고 그 목동 옆을 지키고 있는 목동만한 큰 개. 나도 마침 길 한 켠에 마련되어 있는 식수대와 몇 개의 테이블이 놓인 곳에 앉아서 쉴 참이었다. 그런데 그때 목동 옆을 지키고 있던 사람 몸체만한 개가 식수대쪽을 향해 다가온다. 눈앞이 하얘진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바로 개다. 송아지만한 개는 느릿느릿 걸어 내 옆 개수대에 받아져 있는 물을 꿀꺽꿀꺽 마신다. 목이 많이 말랐나보다. 내가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목동은 괜찮다는 눈짓을 보낸다.

양떼들이 풀을 뜯어먹는 동안 세 마리의 개와 목동은 휴식을 취한다. 더운 날씨에 개들도 힘들어 보인다. 깡마른 몸에 까맣게 탄 피부. 첩첩산중 시골마을에서나 존재할 것 같이 생긴 목동과 양떼. 선한 눈매가 그의 순박한 삶을 보여준다.

먹고 있던 오레오 과자 한 봉지를 목동에게 건냈다. 말도 통하지 않지만, 그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다. 출출했는지 그 자리에서 뜯어서 한봉지를 다 먹는다. 그리고 잠시 후, ‘씌휙, 쓰르륵’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양들을 이끌고 왔던 길로 되돌아 간다. 그의 하루와 나의 하루. 다른 곳, 다른 일을 하며 살지만, 잠시 앉았던 자리에서의 짧은 마주침. 그에게 난 어떤 인상을 남겼을까.

  

노란 화살표를 따라 매일매일 걷지만, 때로는 그 화살표가 사라져서 당황하고, 길을 헤매기도 한다. 화살표는 대부분 잘 보이는 곳에 그려져 있거나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수많은 순례자들을 이끄는 화살표이기에, 길을 잃을세라 세심하게 신경써서 설치해놓은 각양각색의 사인들을 만나볼 수 있다. 길바닥에도, 건물 위에도…

 길을 잃으면 당황스럽고 불안해진다. 왜 제대로 사인이 안되어 있는지, 슬그머니 화가 나기도 한다. 수만명의 순례자들을 위해 제대로 좀 해놓지라는 생각이 불쑥 들곤 했다. 대체로 잘 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길을 걷는 방향이 정해져 있는 것만으르도 훨씬 덜 헤맬 수 있다. 화살표를 한두개 놓치면, 그림자의 위치나 나침반으로 방향을 다시 점검해볼 수 있다. 그리고도 찾지 못하면,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으면 말이 통하지 않아도 대부분 친절히 몸짓발짓으로 설명해준다.


삶에 있어서 노란 화살표가 명확히 보이면 좋겠지만, 대체로 그렇지 않다. 그래서 어디를 향해 갈지 갈팡지팡하기도 하고, 가던 길 위에서도 이 길이 맞나 혼란스러워하기도 하며, 길을 잃어 헤매고 헤매다 또다른 낯선 길을 만나기도 한다. 이정표가 안 나온다고 조급해하는 내 모습. 정해진 방향으로 걷기만 하면 되는 이 길 위에서도 이런데 내 인생에서 헤맬 때 난 얼마나 당황하고 조급해 할 것인가. 조급해 한다고 화살표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잠시 길을 잃는다고 순례자길을 찾지 못할 일은 거의 없다. 조금 늦게 도착하게 될 뿐. 설사 헤매더라고 그곳에서 또다른 아름다운 경관을 마주칠 수도 있다. 그러니 길을 잃는다고 너무 당황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되뇌인다. 그게 어떤 길 위에서든. 

 레온은 지금까지 거친 도시 중에 가장 큰 도시다. 레온에 있는 순례자 숙소를 찾는데 한시간이나 걸렸다. 공립 숙소 두 군데가 안내자료에 나와 있었는데, 노란 화살표를 따라 간 곳은 이미 문을 닫은 곳이었다. 도시가 워낙 크고 사람들이 많아서 순례자들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현지 사람들에게 순례자 숙소, 또는 성당의 위치를 물어물어 찾아간다. 순례자 숙소는 주로 오래된 성당 근처에 있기 때문에 지도가 없거나 대략의 위치도 모를 경우에는 대성당을 찾아가면 대체로 근처에 숙소가 있다. 아니면 각 도시마다 있는 관광 안내소를 찾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레온은 신시가지, 구시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구시가지로 들어서니 저 멀리 높게 솟아 오른 성당의 꼭대기가 보인다. 구시가지에는 작은 골목들이 여러 갈래로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고, 관광객들도 많다보니 노란 화살표 찾기가 쉽지 않다. 큰 배낭을 메고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다.


‘혹시 순례자 숙소를 찾나요?’

‘네 그런데요.’ 

‘저 앞에 보이는 광장을 가로질러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서면 왼편으로 순례자 숙소가 있어요. 규모가 커서 찾기 어렵진 않을 거에요. 이 앞에는 사인이 없어서 저희도 오래 헤맸답니다. 저희는 지금 막 그곳에 짐을 놓고 나오는 길이에요.’


친구들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다는 그는 독일인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간신히 숙소를 찾았다. 그의 말대로 대도시인 만큼 순례자 숙소의 규모도 굉장히 컷다. 그런데 이곳은 규율이 엄격한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직접 운영하는 곳이라 순례자들의 혼숙이 금지되어 있다. 남녀 숙소가 따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많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수십개의 침대에서의 남녀 혼숙보다는 이곳이 더 편하게 느껴진다. 배정받은 침대 번호를 찾아 들어가 무거운 배낭을 침대 옆에 두고 털퍼덕 주저 앉으니, 누군가가 반갑게 내 이름을 부른다. 돌아보니 리자다.


‘와우, 여기서 다시 만나네!’

‘그러게요. 안 그래도 그 사이 통 안보이셔서 궁금했는데…아프던 무릎은 좀 어떠세요?’

‘응 많이 좋아졌어. 그러니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어디 아픈데는 없구?’

‘네 저도 괜찮아요. 여자들끼리 있으니 왠지 느낌이 다르네요.’

‘그치. 옷도 막 갈아입어도 되고 하니 편하고 좋네.’

‘곧 저녁 시간인데 같이 식사하실래요?’

‘아니, 난 그냥 과일 한두개 먹고 말려고. 하루 종일 걷는데도 배는 별로 안고파. 계속 갈증만 나고. 더위를 먹은 것 같기도 하고. 과일만 땡기네.’

‘그러세요? 그러면 푹 쉬셔야죠.’

‘혹시 선크림 안 필요해?’

‘네?’

‘하나 샀는데 너무 커서 무겁기도 하고. 쓸만큼 좀 덜고 나머지는 버릴라고 하는데 좀 아깝기도 해서 혹시 필요하면 줄께.’


안 그래도 내가 사온 선크림을 거의 다 썼다. 그녀가 건네준 선크림을 가방에 챙겨넣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혼자 씩씩하게 걷고 있는 그녀와 나지만, 지금처럼 서로의 안부를 묻고 또 몇마디의 말이라도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음에 감사한다. 서로 그 마음이 진심임을 안다. 그녀의 무릎이 빨리 다 나아서 끝까지 건강하게 걷길 바란다. 그리고 그녀가 버리고픈 헛된 욕망과 욕심, 삶의 집착에서 조금은 홀가분해지길. 그래서 미국에 돌아가서도 지금처럼 편안한 얼굴일 수 있길 바란다. 그녀는 내게 이메일 주소를 물었고 그녀의 수첩에 적어준다. 나 또한 그녀의 이메일 주소를 받았다. 안부가 궁금하지만, 돌아온 뒤로 그녀에게 연락을 해본 적은 없다. 인연이 된다면 또 어디선가 마주치겠지.

 

Distance: Reliegos – Leon (26km) 
Time for walking:  6:00 am – 3:00 pm 
Stay: 공립 알베르게 
A thing to throw away: 등산반바지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져서 여지껏 잘 입고 걸었던 얇은 등산 반바지를 더 입을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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