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자랑할 일이 아니라고들 한다. 나이가 들어 좀 더 성숙해지고 현명해짐에도 불구하고 그런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존중하고 존중받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보여지는 것, 피부와 몸매를 젊게 유지하고 가꾸는데 여념이 없다.
가장 중요한 건 경험의 나이다. 경험이 많을수록 덜 늙는다. 나이듦과 경험은 반비례한다. 경험이 많을수록 삶에 대한 의욕과 열정은 커진다. 세상의 담이 낮아지고 내가 할 수 있는, 하고 싶은 것들이 늘어남에 따라 자신감도 커진다. 나이를 먹더라도 다양한 경험과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열린 태도만 있다면, 나이듦은 더 많은 경험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커져가는 과정일 뿐이다.
가을로 접어드나 했는데, 날씨가 여전히 무덥다. 스페인 북부 내륙을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는 순례길. 아침에 걷기 시작하면 해는 등 뒤에서 내리쪼이고, 정오가 넘어가면서는 앞쪽에서 비춘다. 하루종일 온몸을 앞뒤로 태운다. 그래서 나무가 있는 길에서도 그늘의 혜택을 보지 못한다.
오늘 코스는15킬로 넘게 마을 하나 없는 길이다. 지루하리만치 같은 길의 반복이다. 도로 옆에 난 좁은 황톳길을 따라 걷는다. 옆으로 차가 싱싱 달린다. 오늘따라 이 변합없는, 끝도 보이지 않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길이 힘겹다. 몸도 몸이지만, 왜 내가 이 길을 걷고 있는건지, 남들이 말하는 대단한 깨달음이 매일 용솟음 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걷는지…날은 덥고 지치고, 탁한 차소리에 마음이 점점 답답해져 온다. 지난 일이년간 느꼈던 감정이, 순례길 한복판에서 다시 되살아난다. 내가 살아온 시간의 응축같은 이 시간과 공간.
차가 지나갈 때마다 뽀얗게 솟아오르는 먼지에 눈과 목이 메케해진다.
아이팟을 꺼내 음악을 듣는다. 게리 카(Gary Karr)의 콘트라베이스 연주, 바하의 곡이다. 낮고 짙게 깔리는 음악. 아델(Adele)의 노래와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교향곡. 볼륨을 가장 크게 하고 한시간쯤 걸었을까.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슬프지도 우울하지도 않고, 눈물을 흘릴만큼 몸이 힘들거나 아픈 것도 아닌데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힘겹게 참아넘긴 순간들, 극복했다고 여겼던 아픔과 고통.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거라 스스로 다독이며 꾸역꾸역 지내온 시간.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으려 애써온 시간. 일렁이는 바람과 뽀얗게 솟아오르는 모래바람 사이로 낮게 깔리는 음악이 내 등을 쓰다듬는다. 목에 걸렸던 사탕처럼, 눈물이 툭하고 솟아 올랐다.
눈물의 이유 같은 건 모르겠다. 이 길 위에서 무언가를 해소하고 무언가를 깨달아야 하는 당위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눈물이 그렇게 흐른 뒤, 지나가는 차소리가 더이상 거슬리지 않았다.
Distance: Sahagun – Reliegos (32km)
Time for walking: 7:00 am – 5:00 pm
Stay: 사립 알베르게
A thing to throw away: 반팔 티셔츠 (반팔 티셔츠 한 개를 더 버렸다. 남은 두 개로 번갈아 입으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