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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Jun 14.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22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22 사하군

 

어제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의 하룻밤이었다. 개인방에서 푹 잘 자고 일어나서인지 몸이 훨씬 가볍고 컨디션도 좋다. 일찌감치 짐을 챙겨 길을 나선다. 아침부터 햇살이 떠오른 걸 보니 오늘도 제법 더운 날이 될 것 같다.

오늘은 사하군(Sahagun)까지 걸을 예정이다. 17-8킬로만 가면 된다. 사하군은 제법 큰 도시다. 무슬림과 기독교 문화가 공존하는 곳으로서 두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다양한 건축물들을 찾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오늘은 점심 즈음까지 걸어 숙소를 구한 후, 도시 구경에 나설 생각이다. 


어제처럼 마을 입구에서 몇 가구가 사는지 다 보이는 작은 마을을 만나기도 하고 사하군처럼 큰 도시를 거치기도 한다. 작은 마을에 묵으면 오후와 저녁 시간에 딱히 할 일이 없다. 동네 구경도 한시간이면 충분하고, 저녁 식사를 위해 레스토랑을 고를 필요도 없다. 낮잠을 자거나 짐을 챙기거나 일기를 쓰거나 책을 보거나, 내일의 일정을 살펴보는 일이 전부다. 큰 도시에 도착하면 분주해진다. lupa같은 큰 수퍼마켓이 있으면 이것저것 장도 보고, 서늘해진 날씨에 필요한 옷가지도 마련하고, 마을 구경을 하거나 역사적인 건축물을 둘러보기도 한다. 여러 레스토랑 중 어디서 저녁을 먹을지 고민하고, 우체국이나 은행 볼일도 한꺼번에 본다. 편리하지만 그만큼 더 분주해진다. 

어제 묵은 숙소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필립을 오늘도 마주쳤다. 양손에 스틱을 쥐고 경쾌하게 걷는 그의 자세는 아주 안정되어 보였다.


‘어제 덕분에 편한 숙소에서 잘 쉬었어요.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

‘얼마나 걸으셨어요?’

‘전 벌써 두달 정도 걸었답니다.’

‘어디서 시작하셨는데요?’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시작했어요. 그 길도 순례길이지요. 그런데 이곳과는 달라요. 순레자들을 위한 숙소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서 시골마을의 민박집이나 민박조차 없는 마을에서는 수백년 전의 순례자들처럼 시골집들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하룻밤을 재워달라고 부탁해야 하지요.’

‘그렇게 오래 걸어와서 그런지 기계가 움직이는 듯, 걷는게 전혀 힘들어 보이지가 않네요.’

‘두달 넘게 걷다보니, 제 몸이 알아서 걸어지는 것 같긴 해요. 필요한 만큼 충분히 쉬기도 하구요. 욕심 내거나 급하게 서두르면 탈나기 쉽상이지요. 이 더운 날씨라면 더더욱 그렇죠.’

‘어떻게 그렇게 먼 거리를 걸을 생각을 하셨어요?’

‘6-7년 쉼없이 일만 했어요. 엔지니어라서 시간을 조금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직업이긴 하지만 일 욕심에 수없이 많은 프로젝트를 맡아서 미친듯이 일만했죠. 그래서 삼개월,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걷고 싶었어요. 앉아서 일만하느라 퉁퉁 부은 몸도 좀 날씬하게 만들고 싶었죠.하하’


그의 피부는 두어달 햇볕에 달궈져 벌겋고, 이미 1600킬로를 걸어낸 그의 두 다리는 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앞으로 남은 거리 400킬로를 더 걸으면, 그가 걸어낼 최종 거리는 2050킬로. 석달에 걸쳐 그는 매일매일 걷고 있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씩 웃어 보인다.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발병 난 적 없냐는 말에, 물집 한번 잡힌 적이 없단다. 비결이 뭐냐고 물으니,


천천히 쉬엄쉬엄 규칙적으로 걸으면 되요.

  

이제 앞으로 가야할 길은 걸어온 길보다 짧다. 종종 나타나는 각양각색의 이정표들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남은 거리를 알려준다. 이제 300킬로 정도만 더 걸어 가면 산티아고 도착이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하루하루 무거운 짐을 지고 느릿느릿 걸었는데 어느새 중반을 넘어섰다. 얼마 남지 않았음에 안도하면서도, 곧 끝난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맘이 싸해진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밀려든다. 이 길의 끝에서 난 어디로 향할지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니 ‘정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돌아갈 곳도, 돌아가야하는 곳도 없다. 그래서일까. 조금씩 줄어가는 거리가 아쉽다. 그렇다고 하루에 5킬로씩만 걸을 수도 없는 길이다. 내 속도에 맞춰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걸어가야 한다. 이 길의 끝이 두렵다고 피해갈 수도 없는 길이다. 이 끝엔 내가 겪지 못한 또다른 무언가가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또다른 시작이든, 아니면 순례길의 연속이든. 가던 길을 열심히 가보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Distance: Ledgios – Sahagun (17km) 
Time for walking:  8:00 am – 1:00 pm
Stay:사립 알베르게 
A thing to throw away: 바디로션 (몇번 바르지 않은 바디로션이 꽤 무겁다. 진작에 버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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