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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Jun 13.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21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21 고통의 길

 

어제 오후 숙소 앞 공원에서 한나를 마주쳤었다. 수퍼에 들러 내일 먹을 음식을 사가지고 지나가던 한나에게,


‘한나야, 난 마리아 알베르게 있는데 너는 어디서 묵어?’

‘응 나는 마을 입구에 있는 알베르게.’

‘그렇구나. 몸은 괜찮아? 어제 새끼 발가락에 군살 박혀서 많이 아프다며…’

‘그런대로 견딜만해. 안그래도 약국에 들러 크림 샀어. 군살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약이라는데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어. 그나저나 내일 코스가 가장 어려운 코스래.’

‘그래? 일정표 보니까 그냥 평지던데, 왜 어려워?’

‘육체적인게 아니고 정신적으로 말이야. 내가 가진 순례자길 안내 책자에 나와. 마을 하나 안 나오는, 똑같은 평지길을 따라 뜨거운 태양 아래 18킬로를 걸어야 하고, 거기서 6-7킬로는 더 걸어야 숙소가 나오니까.’


몸이 힘든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든 길이라…많은 산을 넘었고, 힘든 코스도 많이 거쳤다. 발도 발목도 이미 아플만큼 아파봤고. 정신적인 고통이 차라리 나을까. 몸이 힘들땐 맘고생이 낫지 싶다가도, 막상 마음이 고통스러울땐 몸이 아픈게 차라리 낫겠다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니. 

한나가 말한 독일어로 씌어진 산티아고 안내 책자는 매우 자세하면서도 정확한 정보가 가득하다. 그래서 한나는 만날 때마다 내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다. 나처럼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 순례자 안내 사무소에서 받은 종이 두장만 달랑 들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유럽 사람들에게는 워낙 널리 알려진 길이기도 하고, 많이 찾아오기에 각국에서 출판되는 안내 책자들도 다양하고 내용도 풍부하다. 


아무튼 정신적 고통이 크다는,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길 중에서 가장 힘든 코스 중에 하나라니 새벽부터 맘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출발한다. 18킬로 구간 사이에 마을이 없다는 말은, 음식도 물도 구할 수 없고, 화장실도 갈 수 없다는 말이다. 18킬로면 6-7 시간을 걸어야 하는 길이다. 그리고 날씨가 뜨거워지기 시작하면 가뜩이나 그늘이 없는 이 고원지대에서는 더위를 먹거나 탈수증상이 생길 수 있다. 정말 끝도 없이 펼쳐지는 평지. 어제의 비옥한 밀밭과는 달리, 오늘 걷는 길은 척박한 땅이다. 돌밭이 양쪽으로 펼쳐지고 중간중간 나무들이 듬성듬성 심겨져 있다. 가도 가도 같은 풍경이다. 내가 걷는건지 땅이 뒤로 밀려나는건지, 같은 배경의 반복, 일정한 걸음, 점점 내 발 소리가 잦아들고 아득해진다. 

 

일직선의 평지 길이라 앞뒤에 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어제도 그제도 비슷한 수의 사람들과 걸었을 텐데 오늘따라 그 수가 훨씬 많아 보인다. 행군하듯 걷게 되는 이런 길 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더 경쟁하듯 걷는다.  한시간쯤 걸으면 발이 묵직하게 아파온다. 짐없이 걸으면 안쉬고 걸어도 괜찮겠지만 십킬로의 배낭 때문에 그정도 걸으면 발과 발목, 무릎에 무리가 온다. 그래서 중간중간 쉬어 주어야 한다. 신발을 벗어 발을 잠시나마 쉬게 해주면 걷는게 훨씬 수월하다. 두세시간 쉬지 않고 걸으면 금방 회복되지 않을만큼 발에 무리가 간다. 나만 그런걸 아닐텐데, 중간중간 앉아서 쉬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마을도 카페도 없으니 길가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쉬는게 전부지만, 나처럼 그렇게 중간중간 쉬어가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걷다보면 아무리 안그러려고 해도 마음이 조급해지곤 한다. 이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마을, 같은 숙소를 향해간다고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지고, 오늘 밤에 어디서 자게 될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서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좀더 일찍 출발할 걸 하는 마음도 들고, 내가 뒤쳐져 걷는 것만 같아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나를 추월할 사람들은 이미 다 해버린 것만 같다. 

천천히 걷고 자연을 바라보고 싶어 온 이곳에서마저 경쟁을 해야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아무리 늦게 걸어도 오늘 중에 당도하는 길이다. 내 몸의 속도에 맞춰서 한시간에 한번씩 쉬어가며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한두시간 일찍 도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애써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중간중간 마른 볏짐 위에 자리 잡고 앉아서 저 멀리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똑같은 길을 따라 여섯일곱 시간을 걷는 건, 한나가 말한대로 쉽지 않았다. 변화무쌍한 자연 경관을 바라보며 걸을 때는 끊임없이 둘러보고 사진도 찍고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하지만 오늘처럼 변화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걷다보면, 몸과 마음이 분리된다. 마음은 어느새 주변 경관이 아닌 무언가에 깊이 천착한다. 내 안에 좀 더 집중하게 되는 그런 시간이다. 나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 이 길을 선택했는데, 오늘은 피할 길이 없다. 내 속을 들여다볼 수 밖에 없는 길이다. 한나가 가진 안내책자에서 말한 정신적 고통은, 변함없는 풍경을 바라봐야하는 고통을 말한 게 아닌 것 같다. 그 정신적 고통이란 나를 마주하는 고통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을까.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독특한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직접 듣기도 하고, 때론 나 혼자 짐작해보기도 한다. 부르고스 숙소에서 처음 마주친 스페인 부부가 있다. 열흘 넘도록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나와 비슷한 속도로 걷고 있는 부부다. 검은 반바지에 붉은 티셔츠를 커플룩으로 입은 그들. 영어로 대화가 불가능해서 의사소통이라고는 눈인사, 그리고 환한 웃음이 전부다. 하지만 그들의 착한 심성은 그들의 선한 눈빛과 사려깊은 행동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새벽같이 일어나 짐을 챙길 때면 옆사람을 깨울세라 조심스럽게 챙기며 작은 소리라도 날라치면 얼굴가득 미안한 표정이다. 저 멀리서 내가 보이면 기다렸다가 환한 웃음을 건네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오늘 그들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본다. 남편은 몸체만한 가방을 메었고, 아내 등에는 도시락 가방만한 작은 배낭 하나가 전부다. 아내의 짐까지 남편이 지고 간다. 아내의 깡마른 몸, 느릿한 걸음걸이, 까무잡잡한 피부. 어딘가 조금 아파보인다. 큰 병을 이겨낸 직후, 몸과 마음의 단련을 위해 이 길을 걷고 있는 게 아닐까.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걷는 길이다. 여름 방학을 맞아 친구들과 온 대학생들, 잠시 휴가를 내고 찾아온 커플들. 그런데 나이가 많은 사람들 중에는 여럿이 아닌, 혼자 걷는 이들이 더 많다. 십대 이십대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성장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각자의 자리를 찾아 하나 둘 흩어지고 가정을 이루고, 어느새 우리는 멀어진 물리적 거리만큼 서로에게서 멀어져 간다. 물론 오랫만에 만나도 언제나 옛날 모습 그대로의 정겨운 친구들도 있지만, 옆에서 서로를 자주 볼 기회는 현저히 줄어든다. 각자의 삶을 잘 살아내길 멀리서 응원하는 것 외엔 직접적으로 해 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십대엔 심리적으로 부모와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내 자리를 찾아가고, 이십대를 거치며 또래 집단으로부터 멀어지며 사회속의 내 자리를 찾아간다. 그렇게 찾은 사회 속에서의 인간관계란 지극히 ‘사회’적일뿐.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혼자임을 자각하고 홀연히 남겨진 자신을 마주한다. 


혼자 이곳을 찾는 사람들. 젊은 시절 우루루 친구들과 몰려다니던 즐거움보다, 내 안을 찬찬히 살펴보는 즐거움과 기쁨이 더 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거나 깨달아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타인을 향한 말은 줄었지만, 내 자신에게 향하는 말수는 점점 늘어가는 나이. 그 변화를 온종일 바라볼 수 있는 곳.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다른 여행보다 수월한 면이 있다. 그저 정해진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태어났으니 사는 것처럼, 아침에 눈을 뜨면 걷기만 하면 된다. 죽음을 향해 하루를 살아내듯, 동에서 서로 해가 기울듯, 그렇게 스페인의 서쪽을 향해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아무리 정해진 길이라고 해도, 낯선 곳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간다는 것은 때론 용기도 필요하고, 체력도 필요하고, 정보도 필요하다. 손끝 하나로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시대다. 그런데 많이 알고 간다고 해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을 것을 깨닫는 것은 아니다. 한나가 들고 다니는 두꺼운 안내 책자처럼, 각 구간의 특성이며, 어떤 길이 더 수월하고, 어떤 숙소가 더 좋은지, 가격은 얼마인지, 각 마을에 어떤 레스토랑이 있는지 등등의 정보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물론 좀 더 알고 가면 수월한 점도 많다. 숙소를 찾으러 이리저리 해메지 않아도 되고, 여러 개가 있을 경우, 가장 평이 좋은 곳을 단번에 찾아가면 된다. 또 갈래길이 있을 때는 각 코스의 장단점도 미리 알 수 있으니 여러모로 편리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런 책자나 정보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숙소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한두마디 전해 듣기도 하지만, 내겐 순례길 처음 시작할 때 받은 안내자료 두장이면 충분하다. 최신 정보가 업데이트 되어 있지도 않아서 숙소의 사이즈 등 부정확한 정보도 있지만, 그 두장에 정리되어 있는 지명과 공립 숙소들의 이름, 그리고 거리만 알면 이 길을 걸어가는데 큰 지장은 없다. 막상 내일 걸을 길에 대한 정보를 잔뜩 알고 있다고 해서 내일 걷는 길이 더 아름답게 보일 것도 아니다. 내일 걸을 길이 더 힘들다는 것을 미리 안다고, 그 길이 덜 힘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날 그날 내게 닥칠 일들을 덤덤히 맞을 마음의 준비면 충분하다. 머리속에 무언가를 자꾸 담기보다, 조금 덜어내고, 마음과 몸으로 더 많은 걸 담아내기 위해선 덜 아는 것이 이 길을 좀 더 현명하게 걷는게 아닐까 싶다.

 

정신적 고난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 마을이 나온다. 이곳에서 하루를 묵어가거나 4-5킬로를 더 가서 오늘 일정의 종착 지점까지 갈 수도 있다. 한두시간을 더 걸으면 되겠지만, 나를 추월해 간 사람들 수만 대략 헤아려 봐도, 그 곳 숙소는 이미 다 찼을 것이다. 그래서 계획을 수정해서 오늘은 그냥 이 마을에서 하루를 쉬기로 한다. 날씨가 다시 더워지는 건지, 이곳도 인디언 써머가 있는건지 무더운 한낮의 기온 때문에도 더 걷기 힘들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시에스타라서 그런지 정말 개 한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멀리서 보니 한 눈에도 열가구 남짓한게 이 마을의 전부다. 과연 이런 곳에 숙소가 있을까 싶었는데 좀 전에 길에서 만난 필립이 이 곳에 개인 방까지 갖춘 괜찮은 숙소가 있다고 했다. 그는 벨기에에서 온 내 또래 남성이다. 외모는 반바지 반팔티를 입은 산타클로스다. 아무튼 그가 말해준 이 마을에 있는 유일한 숙소를 찾아 들어갔다.


이 마을에 있는 유일한 숙소이자, 레스토랑이자, 수퍼마켓이다. 선택의 여지도 없다. 들어서니 규모가 제법 크다. 보통의 순례자 숙소처럼 기숙사형 방도 있고, 조금 더 비싼 개인방도 마련되어 있었다. 오늘은 개인방에서 묵기로 한다. 남녀노소 할 것없이 혼숙하는 큰 기숙사형 방에서 함께 자는 것에 많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혼자만의 공간에서 숙면을 취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짐을 꼼꼼히 다시 챙길 수도 있고, 옷도 맘편히 갈아입을 수도 있고, 조용하게 푹 잘 수도 있다. 아무튼 오늘은 그런 호사를 누려보기로 한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고, 이곳도 순례자들을 위한 메뉴가 제공된다. 이 마을의 유일한 식당이니 별 기대는 없다.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이곳에 나와 저녁식사를 하는 모양이다. 순례자들을 위해서 따로 마련된 공간에 가니, 하얀 식탁보가 깔끔하게 씌여져 있고, 깨끗하고 정갈한 곳이다. 순례자 대여섯명이 자리를 잡고 앉으니, 배가 불룩하게 나온, 하얀 앞치마와 모자를 쓴 주방장이 나와서 지금 막 손수 만들어낸 샐러드를 가져다 준다. 기대없이 앉아 있었는데 싱싱한 샐러드며, 메인 요리인 포크립도 여지껏 먹어본 음식 중에 최고다. 정말 기대치 않은 순간, 너무 훌륭한 저녁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가 짠 나타났다. 미리 계획할 수도, 미리 알 수도 없이 벌어지는 일들이다. 참으로 감사한 하루다. 

 

Distance: Carrion – Ledgios (24km) 
Time for walking: 7:00 am – 3:00 pm  
Stay: 사립 알베르게 
A thing to throw away: 폼클린징 크림 (비누와 폼클린싱 크림을 가지고 다녔는데 세수할때만 쓰는 폼클린싱 크림을 버렸다. 비누로 세수해도 되니 몇백그램 무게를 줄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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