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파란 하늘이 한국의 가을 하늘처럼 높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쌀쌀하다. 아침 기온이 8도다. 어제 낮기온이 20도를 넘었으니 일교차가 큰 전형적인 가을 날씨다. 바람막이 잠바를 걸치고 출발한다. 구시가지 근처 작은 카페에서 크라상과 카페콘라체를 마시고 레온을 빠져나간다. 큰도시라 도시를 벗어나는데도 한시간쯤 걸린다.
도시 서쪽 외곽에 강이 하나 흐른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강이지만 도시를 관통하는 강이다. 강 양쪽에 나무와 풀들이 정돈되지 않은채 자라나고 있다. 땅을 파헤치고, 시멘트를 발라버리는 한국의 개천이나 강과는 매우 다른 모양새다. 오래된 도시, 오랜 시간 변함없이 흐로고 있는 강줄기. 그리고 그 세월만큼 자라난 나무와 풀들. 그 사이에 사람들의 흔적이 조심스럽게 끼어든다. 그렇게 자연을 ‘보존’한다. 보존이란 단어도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자연을 잠시 빌려쓰고 있는 인간이 자연을 보존한다니. 오만한 인간만이 자연을 훼손해 자신의 잇속을 챙긴다. 자연을 존중하고 그 앞에 겸손해야할 인간.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도시가 개발된 흔적만 봐도 알 수 있다.
누구나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누구나 800킬로쯤은 걸을 수 있다.
누구나 인생에서 한달쯤 시간을 낼 수 있다.
조금만 절약하면 누구나 여행경비 몇백만원은 모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아무나 순례길을 걷지는 않는다.
아무나 다니던 직장을 떼려치고 몇달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들 말한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잘할 수 있다고. 요리를 하기만 하면 끝내주는 요리사일지도 모르고, 마음만 먹으면 여행쯤은 언제나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도 맘만 먹으면 청소도 잘하고 살림도 잘한다. 하지만 난 그런 맘을 잘 먹지 않는다. 그러니 난 청소며 살림을 잘하는 게 아니다. 내가 무언가를 ‘한다’는 건 행동이지 관념이 아니다. 나 스스로를 판단하는 기준은 생각이나 관념이 아니고 실제하는 행동에 기반해야 한다. 내가 맘먹고 공부하면 하버드도 간다는 말은 하버드를 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시간과 돈이 생기면 여행을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오랫동안 그랬다. 시간이 없었다. 항상 분주했고, 여행보다 앞서서 해야할 일들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걸 안하고 있는 게 아니고, 결국 못하는 있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으로는 시간이나 돈이 생겨도 여전히 못한다. 또다른 못할 이유가 생길 테니까.
레온를 벗어나니 메세타 고원지대와는 또다른 풍경이다. 끝없이 펼쳐지던 밀밭과 해바라기밭 대신 옥수수밭이 하늘을 향해 끝없이 솟아오르고 있다. 도로 옆으로 나 있는 순례자 길을 따라 걷는다. 몇킬로쯤 걸었을까. 여전히 옥수수밭이다. 뜨거운 햇볕에 영글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변함없는 풍경을 따라 난 몇 걸음을 걷고 있는 걸까. 수천 걸음을 걸었을까. 수만 걸음을 걸었을까. 내 두발이, 내 몸이 나를 이끈다.
한참을 걸어 San martin del camino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큰 도로 양 옆으로 보이는 몇가구의 집들이 전부인 마을. 마을 입구에 있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공립 숙소라고 입구에 적혀 있었지만, 알고 보니 노부부가 운영하는 사설 알베르게였다. 우선 대략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산책 겸 마을 구경을 나선다. 워낙 작아서 삼십분이면 다 돌아볼 정도다. 작고 조용한 마을인데, 저 멀리 사람들이 북적인다. 출출하기도 해서 길가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바에 들어가 맥주 한잔을 시킨다. 근데 마을 사람들 복장이 특이하다. 반짝이 모자에 빨간 스카프를 두른 사람들. 그리고 저 멀리 젊은 학생들이 나팔 등을 불며 행진한다.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살 것 같은 작은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시끌법석함이다.
맥주 한잔을 하고, 내일 마실 물이며 점심 거리를 살려고 수퍼마켓을 찾아 물으니, 마을 축제라 오늘은 이미 문을 닫았단다. 스페인에서는 어느 마을이든 축제가 열리면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고 축제를 즐긴다. 이런 날은 순례자들에게는 낭패다. 당장 마실 물도 없고, 먹을 거리도 없는데, 마을에 두개 밖에 없는 레스토랑마저 모두 문을 닫았다. 이런…오늘 저녁은 어떻하지?! 아까부터 배가 고팠다. 순례자 숙소에서 제공하는 순례자 메뉴를 먹는 수밖에 없다. 오늘은 그 메뉴를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노부부의 음식 솜씨가 썩 좋을 것 같지 않았고, 메뉴 사진을 보니 성의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빨간 스카프를 한 사람들이 어디론가 향해간다. Deba에서 투우경기를 관람했을 때 사람들 복장과 같다. 설마설마하는 맘으로 사람들이 향하는 곳을 따라가본다.
일년에 한번 이 시골 마을에서 열리는 축제를 위해 가족들이 모이고 주변 마을에서도 놀러 왔을 것이다. 그들이 향한 곳은 마을에 하나뿐인 큰 원형 경기장. 서커스장처럼 생긴 원형 경기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아니나다를까 귀에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흥겨운 듯 하지만, 황소의 죽음을 미리 애도하는 듯한 비장한 음악이다. 곧 이 마을에도 비릿한 피냄새가 퍼져가겠지. 경기장 앞까지 갔다가 발걸음을 돌려 숙소로 향한다.
Distance: Leon – San martin del camino (25km)
Time for walking: 9:00 am – 5:00 pm
Stay: 사립 알베르게
A thing to throw away: 긴 등산양말 (긴 등산양말 한켤레를 더 버렸다. 이제 남은 건 목이 짧은 등산양말 한켤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