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갈라시아 지방은 유독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침부터 날이 무척 흐리다. 날씨도 싸늘하다. 긴 팔 옷을 챙겨 입는다. 오늘은 100킬로 지점을 지날 것이다. 이제 백킬로만 가면 산티아고 도착이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이곳까지 올 줄이야. 하루에 십킬로씩만 걸어 열흘 후쯤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사실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걷고 또 걷고, 몸이 지치고 지친 상태지만 최선을 다해 갈 수 있는 곳까지 걸어간다. 그렇게 걷는 것이 한달 넘게 걷는 사이에 습관이 되어버렸다.
조금 서둘러 숙소를 나와 사리아를 빠져나오자 사람들의 행렬이 보인다. 순레자들이긴한데 여지껏 봐온 순례자들과는 사뭇 다르다. 우선 가방 사이즈가 작고, 단체로 걷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좀 더 잘 갖춰진 복장이다. 등산복이며 신발이며 모두 새것처럼 보인다. 내 등산화에 앉은 뽀얀 먼지는 털어도 없어지지 않는다. 깊이 박혀 버린 먼지는 신발의 검은 부분을 회색으로 만들었다. 수도없이 손으로 빨아 입은 티셔츠는 축 늘어나 볼품없어진지 오래다. 파리에서 샀던 긴 등산바지는 피레네 산맥을 넘기 전에 이미 버렸고 내가 지금 입고 있는 바지는 헐렁한 트레이닝 바지. 누가봐도 어설프고 후줄근한 순례자의 모습이다.
미국에서 단체로 온 순례자들은 큰 관광버스에서 내려 작은 손가방에 물통과 손수건, 겉옷 하나 정도만을 들고 걷기 시작한다. 그 관광버스는 오늘의 끝지점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노년의 그들이지만 어찌나 발걸음이 가벼운지 부러울 지경이다.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며 산책하듯 걷기만 하면 된다. 삼삼오오 수다를 떨며 걷는 그들 뒤를 따라가다보니 자꾸 귀가 시끄럽다. 마음이 번잡스러워진다. 사람이 너무나 많다. 이렇게 앞뒤 사람들의 말소리까지 세세히 들릴 정도로 무리지어 걸은 적은 없다. 앞으로 남은 백킬로의 길은 이렇게 걷게 되는 걸까.
아이팟을 꺼내 음악을 크게 듣기 시작한다. 그리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나치며 건네는 인사조차 번거롭다. 그저 혼자 걷고 싶을 뿐이다. 음악의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이고 빠른 걸음으로 쉬지 않고 걷는다. 아름다운 퐁광도 오늘은 멈춰서서 보고 싶지 않다. 뒤에 오는 사람들을 막아서고 싶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도 싫다. 그렇게 두세시간을 걷고 나니 발목이 묵직하게 아파오기 시작한다. 적어도 한시간에 한번씩은 쉬고, 천천히 걷던 내가 갑자기 너무 빨리, 많이 걷고 있다. 아픈 발을 무시하고 계속 빠른 속도로 걷다보니 어느새 나는 절뚝이며 걷고 있다. 사람들보다 속도가 늦어져 사람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그 중 한둘은 발이 괜찮냐고 묻는다.
앞으로도 꽤 걸어가야 하는데 발이 많이 아파온다. 쉬어야 한다. 조금 쉬었다가 천천히 가야한다. 이렇게 걷다가는 하루이틀 쉬어야할지도 모른다. 몸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체력적으로도 금새 무너져내릴 수 있다. 지금은 몸의 한계에 근접해 있는 상황이다. 몸을 잘 달래며 걸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내 맘대로 걸으니 몸이 성을 내는 건 당연하다.
작은 마을 시골집 대문 앞, 나무 테이블 위에 몇개의 오렌지와 사과가 올려져 있고 1유로에 가져가라고 적혀있다. 오렌지 하나를 들고 1유로 동전을 꺼내 놓는다. 옆 나무 그늘 아래 앉는다. 무언가 불만에 찬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갑자기 늘어난 순례자들과 행렬을 이루어 걷는게 싫다
조용하게 걷고 싶은데 시끌법석한 사람들의 소리가 거슬린다
놀러온 듯한 그들의 가벼운 태도가 싫다
너무 쉽게 순례자길을 걸으려 하는 듯한 사람들의 태도가 싫다
겨우 백킬로를 걷고 순례자 증서를 받는 건 치팅인 것 같다
나의 시선은 내가 아닌 주변의 사람들에게 향해 있었다. 내 마음이 불편했던 건 내 기준으로 그들을 판단하는 데 있었다.
일주일 밖에 휴가를 내지 못해서 사리아부터 시작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몸이 노쇠해 10킬로의 짐을 메고 걸을 수 없어서 관광버스의 힘을 빌린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비용이 충분치 않아서 백킬로만 걷기로 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매년 백킬로씩 8년동안 걸을 계획으로 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나의 상황을 알 수 없듯, 나도 그들의 상황을 모두 알 수 없다. 각자 나름의 이유로 오늘 이 길 위에서 마주친 것이다. 나에게 해를 끼친 것도 없고, 오히려 같은 곳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만났으니 비슷한 생각을 지닌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난 단 한번도 그들 중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마음도 입도 닫아버리고 온종일 신경질적으로 걸어댔다. 그러고 나니 내 발목은 아프다고 아우성이다.
타인의 마음이나 태도를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감정의 근원을 찾아내고 이해하는 것이다. 순례자들이 이 곳을 찾아온 이유는 백이면 백 다 다르고 걷는 속도도 스타일도 다 다르다. 내 잣대로 그들을 판단하려 드는 순간, 내 마음의 틀이 여기저기 치이니 불편해지는 것이다.
한참을 걸어 당도한 Portomarin. 다리를 절뚝이며 도착했다. 이곳은 갈라시아 지방에서 유명한 휴양지다. 그런데 깔끔해 보이는 사설 순례자 숙소는 이미 다 찼다. 그리고 한 곳에 들어가서 침대까지 배정 받았지만, 침대 아래에 빈대 시체가 두세마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돌아나올 수 밖에 없었다. 숙소를 운영하는 할아버지에게 가서 빈대가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지만, 오히려 노발대발 화를 내면서 그럴 리가 없다고 소리친다. 다른 순례자들이 옆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인 것 같긴 하지만,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한 이상 거기서 잠을 잘 수는 없었다. 이미 다른 숙소는 다 찼다는 말을 들은 터라 중심부에 위치한 두세개의 호텔로 향한다. 이미 두 곳은 다 찼고, 마지막 남은 호텔에 가니 방이 하나 남아 있었다. 생각해볼 것도 없이 키를 받아 꼭대기 층에 있는 방으로 올라간다. 작은 방에 조그마한 창문, 침대 하나가 전부인 방이지만, 참 다행이다.
Distance: Sarria - Portmarin (24km)
Time for walking: 8:30 am – 4:30 pm
Stay: 호텔
A thing to throw away: 스카프 (목에 두르거나 머리에 쓰던 스카프 두개 중 하나를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