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돌아온지 몇달이 지났다. 문득문득 내가 그곳을 정말 다녀왔나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내 목에 걸려있는 조개 목걸이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런 생각을 좀 더 자주 했을 것이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산, 까만 줄에 매달린 작은 은색 조개는 내가 흘린 땀에, 뜨거운 태양에 색이 바래고 바래 지금은 까만 조개가 되어버렸다. 땀에 흠뻑 젖어 매일매일 빨아 입던 낡은 티셔츠에 잘 어울리던 목걸이가 지금은 조금 어색하게 내 목에 걸려 있다.
산티아고의 수많은 기념품 가게에서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는 증거는 이 목걸이와 순례자 증명서 한장, 그리고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의 순례자 오피스에서 기부금을 내고 받은, 걷는 내내 내 배낭에 매달려 있던 커다란 조개 껍질 하나가 전부다.
눈에 보이는 흔적은 곧 다 사라질 것이다. 여행지에서 산 기념품이 다 그렇듯. 그러나 내 머리와 가슴 속에 각인된 순례자로서의 경험은 다른 경험과 만나 또다른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익숙한 현실 속에서든, 낯선 미래의 시간 속에서든.
걷는 동안 많은 것을 비워내길 바랬다. 복잡한 생각이 단순해지길 바랬고, 마음 속 짐들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길 바랬다. 가지고 있던 짐들도 피니스테라 순례자 십자가 앞에서 모두 태워버릴 수 있길 바랬다. 하지만 내가 버린 짐은 35가지, 3-4킬로의 무게가 전부였다. 하루하루 버릴 물건을 고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엄선해서 들고간 것이니, 버리기까지는 큰 용기과 결단이 필요했다. 무언가를 새로 채워넣는 일은 쉽지만, 가진 것을 버리고 내려놓는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비워내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채워넣을 공간은 없다.
줄어진 가방의 무게만큼 내 마음도 가벼워졌을까. 순례길을 떠나기 전의 고민이나 갈등, 힘겨움과 막막함이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전처럼 속이 터져버릴 것 같지는 않다. 순례길을 걷지 않았어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잦아들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힘겨움과 외로움이 더이상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길 위에서 느꼈던 힘겨움과 외로움을 견뎌냈다는 것만으로도 나 스스로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 어쩌면 내가 드린 기도가 기적처럼 이루어져서일지도 모르겠다. 스페인의 작은 시골 마을, 오래된 성당에서 한국어로 성경구절을 읽었던 그날, 있는 그대로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달라는 그 기도 말이다.
생생한 꿈처럼 다녀온 산티아고 순례길, 다른 여행지처럼 간단히 설명되지 않는 그런 곳이다. 누군가 인생길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 자꾸 떠오른다면, 잠시 모든걸 내려놓고 그 길을 한번쯤 걸어보길 바란다. 여전히 명쾌한 대답을 찾진 못할지라도, 인생의 판박이인 순례길에서 그 질문의 의미를 되새겨볼 충분한 시간은 주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