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순례의 종착지, 피니스테라(Finistera). 산티아고에서 100킬로 정도 서쪽으로 가면 성야고보의 유해가 떠내려 왔다는 해안가에 가닿는다. 그곳이 순례의 끝이자 시작점이다. 순례자 거리 표지석이 ‘0’킬로라 적힌 곳이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하루이틀 쉬고 피니스테라까지 걸어가거나 버스를 타고 간다. 걸어가면 삼일이 걸린다. 중간에 순례자 숙소가 많지 않아서 하루에 30킬로씩 걸어야 한다.
산티아고에서 이틀만 쉬려고 했던 계획이 나흘이 되어 버렸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첫날 San Martin Pinario 호텔 로비에서 만난 필립도 그랬다.
‘와 반갑네요. 여기서 다시 만나다니!’
‘그러게요. 나보다 훨씬 앞서 걸어서 이미 이곳을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언제 도착했어요?’
‘전 일주일 전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오늘 밤 비행기로 벨기에로 돌아간답니다.’
‘피니스테라는 안가고 돌아가는 건가요?’
‘아니요. 버스타고 다녀왔어요. 처음 계획은 산티아고 도착하자마자 증명서만 받고 바로 걸어갈 계획이었죠.’
‘그런데요?’
‘근데 이상하게도, 하룻밤을 자고 나니까 그런 마음이 사라지더라구요. 2000킬로를 걷고 나니 더 걸어야 할 이유가 남아있지 않더군요. 그 먼 거리를 걸어왔으니 피니스테라까지의 백킬로쯤은 아무것도 아닌데, 꼭 그걸 채우려고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더라구요. 이미 다 끝나버린 것 같은 느낌. 이만큼 걸었으면 되었다. 삼개월 걸었으면 충분하다.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곳에서 일주일 쉬었어요.’
‘아 그랬군요.’
여러번 길에서 마주쳤던, 벨기에에서 온 필립은 좀더 그을린 피부 말고는 여전히 건강하고 활기차 보였다. 그는 자신의 이메일을 적어주며 벨기에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당부한다. 도심 외곽에 위치한 저택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으며 남는 방이 많으니 꼭 놀러오라고. 하지만 벨기에에 가게 된다고 해도 그에게 연락하지는 않을 거란 걸 안다. 낯선 이의 호의를 무시해서가 아니고, 그저 지금 이 순간의 마주침만으로도 그와의 인연은 소중하고 충분하므로.
길 위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디쯤 걷고 있을까.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그들은 다들 집으로 돌아갔을까. 한두번의 스침이었다하더라도 그 순간 서로의 경험과 마음을 함께 나눈 사람들. 앞으로 그들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인연의 소중함을 가슴에 새긴다. 그들로 인해 힘을 얻었고 그들로 인해 십년 이십년 후의 내 삶을 구체적으로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나이가 먹어 현명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나이가 먹어 좀 더 성숙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러기 위해서 사람들은 어떤 노력을 기울이며 사는지,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일을 하며 각자 다른 이유로 이곳을 찾지만, 어쩌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삶을 좀 더 깊이, 보다 값지게 살고 싶은 것이 아닐까. 애초에 인생에 부여된 대단한 의미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그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건, 또다른 허상을 찾아 허우적거리는 것일지도. 그렇기에 내가 걸어가는 길 위에서 마주치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의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시간들로 인생이 채워진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삶이 아닐까.
나태하거나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 길을 걸을 수 없다. 열심히 걷는 행위는 내가 내 몸을 움직여 어디론가 향해가려는 강한 열망이 없고서는 한발짝도 내딜 수 없다. 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살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그 과정에서 마주치는 힘겨움을 극복하고자 애쓰는 사람들. 그들의 모습에서 인생을 배운다.
그의 말 때문이었는지, 나의 지친 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숙제를 다한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는지, 피니스테라까지 걸어가려던 계획을 바꿔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걸어갈 게 아니라면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순례의 끝을 목격하고 싶은 마음에 아침 일찍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3시간. 워낙 구불구불한 해안을 따라 가는 길이라 백킬로인데도 꽤 오래 걸린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피니스테라는 스페인 북서부 끝 해안가 작은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내려서 등대(faro)가 있는 곳까지 한시간쯤 걸어가야 한다. 태양은 다시 한여름의 태양이다. 땀이 비오듯한다. 몇몇 순례자들이 앞서 걷는다.
드디어 왔다. 0킬로 지점. 시작점이자 순례의 끝인 곳. 삶이 ‘무’로 끝나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지점, 그곳이 끝이자 또 시작이다. 한참을 서서 ‘0’이라는 숫자와 바다를 번갈아 바라본다.
십분쯤 더 걸어가면 바다와 맞닿은 지점에 십자가가 하나 세워져 있고 그곳에서 순례자들은 순례길에서 사용한 자신의 물건을 태운다. 순례길에서의 힘겨움과 고통, 그리고 그 시간을 태워버리는 제의적 행위다. 한 남성이 십자가 앞에 앉아서 무언가를 활활 태우고 있다. 나도 곁에 앉아서 그 불길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그는 얼마나 걸어왔을까. 왜 걸었을까.
더이상 그 이유가 궁금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 두어달 길렀을 법한 그의 턱수염과, 타오르는 불길처럼 벌겋게 그을린 얼굴, 그의 순례를 짐작케한다. 그에게 남은 낡은 티셔츠와 남루한 지팡이. 나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가지고 있는 걸 모두 태우고, 다 비워낸 그의 얼굴에 큰 웃음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도 따라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