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를 보고
택시는 끊임없이 어디론가 이동한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타자화된 여정이다. 타이틀 롤인 택시운전사 김만섭은 타자성 측면에서 문제적인 인물이다.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돈을 번 김만섭은 광주와 대립하는 진영 논리가 체화된 캐릭터다. 일견 작위적으로 보이는 그의 ‘소시민적 타자성’은 광주의 비극을 부각하기에 앞서, 서울에 만연한 물화(物化)의 세태를 애달프게 반영한다.
영화에서는 전형적이라고 폄하할 수만은 없는 원형 서사의 흔적이 엿보인다. ‘틀림없는 민중 서사’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적강-회귀’ 모티프의 영웅 서사적 개연성도 도출할 수 있다. 그러나 타자성에 기댄 그의 영웅상은 어딘가 기형적이다. 참혹한 5월의 광주와 비교했을 때 5월의 서울은 부처님이 오신 가정의 달, 사랑하는 딸과 함께하는 비교적 평화로운 공간으로서 변형된 천상성(天上性)을 띤다. 서울의 평범한 소시민은 광주의 대접 받는 영웅이 된다. 이러한 ‘영웅적 타자성’은 택시운전사라는 그의 특수한 신분에 기인한 것이다. 택시 안에서 바깥 풍경을 비추는 카메라의 앵글은 광주 시민과 괴리된 그의 시선을 대변한다.
이러한 타자성은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와해하는 듯 보인다. 특히 적강한 천인처럼 그가 참상이 한눈에 들어오는 높은 건물에서 내려온 뒤부터 피아의 분간이 모호해진다. 카메라의 앵글은 형용할 수 없는 죽음의 감각 속에서 광주 시민들과 그를 동일시한다.
그가 오롯이 자아를 회복하는 공간은 중간 지점인 순천이다. 적강과 회귀의 길목에 위치한 순천은 천상에 갈 영혼이 남은 죄를 씻는 ‘연옥’과도 같다. 손님을 두고 오는 죄를 지은 기사는 결코 회귀할 수 없다. 죄를 반성하고 지상(광주)으로의 적강을 통해 영웅적 자아를 구현한 뒤에야 그는 회귀에 성공한다. 감각의 수동과 반성의 능동에 관한 로크의 통찰처럼, 광주에서의 공포와 무력감에서 벗어나 능동적 반성 행위를 자행함으로써 대상화된 영웅에서 능동적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광주로 돌아와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그는 회귀 수단이자 타자적 공간인 택시에서 내림으로써 오로지 대상으로서 존재하던 그 수동성에서 탈피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이 역설적으로 그에게 진정한 서울로의 회귀를 가능케 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영웅적 자아를 버리고 완전한 소시민적 자아로 돌아왔다.
그런데 과연, 그는 정말 ‘완전히’ 돌아왔을까? 영화를 관통하는 카메라의 앵글은 크게 세 가지 양상으로 나뉜다. 앞서 말했던 타자화하는 시선, 동일시하는 시선, 그리고 직선 도로를 거침없이 달리는 택시를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초월하는 시선이 그것이다. 초월하는 시선 속 보잘것없는 택시는 김동리 <역마>의 세 갈림길 앞에 선 주인공의 운명론적 체념과도 닮아 있다. 사실 서울로 갈지, 광주로 돌아갈지에 관한 선택조차 시대적 운명이 그에게 제안한 선택지에 지나지 않는다. 택시는 시대가 낸 길을 달릴 뿐이다.
택시 운전사는 정말로 영웅적 자아를 버린 것일까? 그는 끝내 기자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적어도 사람에 관해서는 능동적 자아를 회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에 초월적 시선은 광화문을 향하는 택시를 하이 앵글로 오랫동안 응시한다. 그 고요한 관조는 그의 타자성이 시대적 필연에 의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택시에 탄 모든 관객을 같은 운명으로 안내한다. 이 확신에 찬 카리스마적 ‘공동운명론자’는 손님이 가자는 대로 갈 생각이 없다. 시대가 이끄는 대로 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