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nori May 17. 2017

빛날수록 슬픈 삶, 슬펐지만 빛난 삶

서프러제트 (2015) 

사회 규범은 글자화를 넘어 사람들 의식 속에 자리 잡아 있어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예컨대, 노예제나 인종차별주의가 그토록 끈질기게 버텼던 것은 이를 옹호하던 압도적 힘 외에 노예와 인종차별을 도덕적으로 용인하거나 심지어 당연시하던 사회적 믿음이 바탕되었기 때문이다. 당연시되는 사회 규범을 이슈화시켜 변화시키는 것--노예제 및 인종차별 경우는 철폐가 되겠다--은 강자의 힘뿐만 아니라 그 사회 구성원의 의식까지 상대해야 하는 험난한 운동일 수 밖에 없다. 


영화 [서프러제트](2015)는 성차별이 당연시되던 시기에 참정권을 주장하던 영국 여성들의 이야기다. 영국 남성은 1832년, 1867년 두 번의 선거법 개정을 통해 대부분 투표권을 획득했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영국 정치 지형에 여성의 자리는 마련돼있지 않았다. 여성 참정권 운동은 19세기 말부터 활기를 띄며 관심을 끌기 시작했지만 실제 법제화까지의 길은 아직 멀고도 험난했을 뿐이다. 이들을 짓누르던 사회 통념이 있었고 이 통념 속에는 다수의 여성들도 갇혀있었다. 대항하는 여성들은 소수였다. 


주인공 모드 와츠 (캐리 멀리건) 는 평범한 노동자지만 빠르게 여성참정권 운동에 빠져든다. 


[서프러제트]는 그 통념 밖으로 나와 저항하는 여성으로 변해가는 주인공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모드를 비롯한 당시 저항 여성들의 삶은 두 개의 투쟁이 범벅돼있었다. 하나는 참정권 확보를 위해 점점 과격해지는 투쟁 이야기다. 평화적 시위가 아무런 변화를 이끌지 못하자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돌을 던지고, 폭약을 터뜨리며, 단식을 한다. 기존 사회는 이들을 무참하고 잔인하게 짓누른다. 약자의 폭력 투쟁 선택에 이어 기득권이 몇 배에 달하는 힘으로 보복하는 [서프러제트]를 이끄는 이 투쟁의 이야기는 무겁지만 낯설지 않다. 


"빛날수록 슬픈 삶"을 살았던 사람들

[서프러제트]가 빛나는 지점은 여성 참정권이라는 표면적 투쟁 밑에 흐르고 있는 두 번째 투쟁--즉, 개개인 저항 여성의 다양한 정체성들이 내부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을 적나라하고 설득력있게 묘사할 때다. 즉, 서프러제트는 여성이지만 아내와 어머니라는 삶의 정체성도 있다. 피할 수 없는 슬픈 충돌이 결국 발생하고 만다.   


* 소니 (모드의 남편): 넌 어머니야, 모드. 아내이기도 하다고. 내 아내. 그게 네 본분이야!           

  ... 소니가 모드를 밀쳐내고 집 문을 닫아버리자...

* 모드: 소니! 조지를 보게 해줘요! 소니. 소니! (조지는 소니와 모드의 어린 아들)


모드는 여성운동가일 뿐 아니라 아내이고 어머니이다. 


결국 가족 내의 역할이 사회운동 참여와 충돌하면서 이들 운동가들은 '가족이냐 저항이냐'라는 잔인한 선택을 강요당한다. 어떤 이들은 가족을 위해, 혹은 가족에 의해 여성 운동에서 낙오한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다른 이들은 "우리의 딸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후자를 택한다. 이들이 택한 저항은 영웅적이고 옳아 보이지만 영화는 이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모습에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이 갈등의 모습은 잔인하고 사실적이다. '빛날수록 슬픈 삶'이다.  


아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잊지 말아달라는 모드... 



"슬펐지만 빛났던 삶"을 기억하며 

영국의 여성 참정권은 1918년, 1928년 두 번의 법 개정을 통해 완성되었다. 1차 대전 전쟁 물자 생산에 대거 투입되었던 여성 노동력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정치적 보상에 대한 동의, 그리고 여성들 스스로의 의식 고찰 등이 여성 참정권 실현에 기여했다는 설명이 많다. 그러나 전쟁은 외부적, 구조적 변수다. 여성차별이라는 오랜 사회 규범을 전격적으로 깨면서 참정권을 신속하게 확보한 데에는 이들 서프러제트의 활동으로 인해 전쟁 이전부터 여성 참정권이 영국 의회에서 이미 논의되고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었던 것, 그리고 영국 사회가 수천 년간 당연시 되던 여성 차별에 대해 제한적이나마 의문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프러제트들의 모습 


[서프러제트]는 사회 규범의 끈질김과 그것을 변화시키는데 요구되었던 개개인의 희생과 고통을 얘기한다. 그러면서 때론 절규하고, 눈물을 흘리고, 때론 작은 농담에 미소 지었을 이 작지만 강인했던 서프러제트들을 기억하고 그 기억에 동참해달라 부탁한다. 결국 관객들은 영화 크레딧이 올라갈 때 즈음이면 '슬펐지만 빛났던'  이들의 삶에 마음의 빚을 안고 있다. 투박하지만 묵직하다. 




서프러제트 Suffragette (2015)


매거진의 이전글 역사를 가슴으로만 읽는 이들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