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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방끈수공업자 Jan 27. 2024

R&D 예산 삭감 시대에 살아남기

데모 많이 해봤는데...

예산 삭감에 대한 영수증을 드디어 다 받아보았습니다. 10% 삭감. 


주변에 50%, 그 이상 삭감되신 분들도 꽤 계셔서 상대적으로 나아보이는 효과는 있습니다. 다소 폭력적이었던 예산 삭감 과정은 여러가지 우려를 낳습니다. 가장 큰 우려는 R&D 예산은 필요하면 언제든 줄여서 다른데 써도 된다는 인식이 정치인들에게 남지 않을까 하는 것 입니다. 


연구자들 모여서 이야기 나누다 불만을 토로하는 일은 많지만 과기계 전체의 저항은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저도 로봇 "데모(demonstration)"를 하기 바빠서 거리에 나가서 데모를 할 시간은 없습니다. 아마도 이런  연구자들의 성향을 잘 이용한 것 아닐까요? 이걸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 정책 결정의 계층 곳곳에 있어서 급소 구석구석을 한 번에 찔린 것 같습니다.


예산 삭감 과정의 문제를 얘기하려던 것은 아니고 그 이후 문제 해결을 해나가는 과정에 대해서 간단히 써보려 합니다. 원래 하는 일이 problem-solving이라서 요즘에도 거기에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인건비로 나갈 돈도 없어지니 주변 연구자들께서는 어쩔 수 없이 포닥, 인턴 등 학위 과정에 있는 학생이 아닌 분들 먼저 내보내고 계시기도 하고 학생들 인건비를 삭감하고 있습니다. 


제 연구실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산 삭감 뿐만 아니라 기존에 진행 중이던 과제 하나도 일찍 종료가 되어서 학생 인건비 걱정을 해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상반기에 과제를 하나도 못따면 하반기엔 학생들 인건비를 대폭 삭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상반기 인건비를 소액이나마 삭감하게 되었고 연구에 필요한 장비 구입이나 출장은 예산 삭감 이야기 나오던 작년 하반기부터 최소한만 해왔습니다. 


가장 중요하고 실효성이 높은 대응은 새로운 연구 과제를 수주하는 일 입니다. 교수가 되기 전에는 내가 이 분야에서 좋은 논문을 많이 쓰면 연구비도 잘 따올 수 있을거라 생각을 했는데 그건 자의식 과잉에서 비롯된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에는, 국내에도 좋은 논문을 쓰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안에서 다시 몇 손가락 안에 들어 경쟁률 높은 연구 과제를 수주하는 것은 연구는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틈 나면 외부 나가서 세미나하고 학회가서 네트워크 만들고 학계에서 봉사도 하면서 저라는 사람과 제 연구실의 연구를 알리는 일들을 해왔습니다. 


"영업" 맞습니다. 

연구실 학생들이 10명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사업체 대표와 같은 마인드를 가지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연구 자영업자"라고 부릅니다. (1) 나와 연구실이 경쟁력을 가진 분야면서도 아직 개척되지 않은 주제를 찾아 방향을 설정하고(사업기획), (2) 구성원들에 끊임없이 동기부여를 하고(조직문화), (3) 다양한 활동을 통해 외부에 성과를 알리고(홍보/마케팅), (4) 연구비 수주하여(투자유치/자금조달) (5) 연구 장비를 사고 인건비를  지급하고(운영), (6) 구성원을 성장시켜서 "논문"이라는 연구성과(매출)를 많이 올리는 연구 자영업자.


이것이 요즘 제가 갖고 있는 정체성입니다. 수익을 내는 것이 목표인 사업과 다른 점은 연구실 운영의 목표가 구성원의 성장(교육)과 논문(연구)라는 점 정도입니다. 또 다른 차이는 사업은 망하면 대표까지 다 직장을 잃지만 교수의 경우 정년보장 심사 통과 이후에는 연구실이 망해도 직을 잃지는 않는다는 점이 있습니다. 교수의 나머지 역할(교육과 학교 운영)이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에 그러지 않나 싶습니다. 


연구실이 망한다는 것은 연구를 수행할 연구비가 없다는 것인데 연구비를 계속해서 따지 못하는 상황은 최근 N년간 연구실적이 없어 경쟁력이 없거나 연구비를 수주할 의지가 없어서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연구실적을 끊임없이 계속 내야 이 바퀴를 계속 돌릴 수 있다는 압박감이 항상 있습니다.


연구비 삭감 사태가 불러일으킨 상황은 4번의 투자유치가 막혀서 5번의 운영과 6번의 매출 부분이 어려워진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1, 2, 3번을 열심히 한 덕분에 여기저기 불러주시는 곳이 많아 이번 방학 때는 5건 정도의 제안서를 작성하고 있어 매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올해는 모두가 판에 뛰어드는 상황이라 수주 경쟁이 어마어마할 것 같은데 하나라도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돈 걱정 없이 연구를 계속 하고 싶거든요.


여기 들어오시는 분들도 연구비 삭감 사태로부터 크고 작은 영향들을 직간접적으로 받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다가올 시간 동안 큰 일 없이 잘 지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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