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사람일까 가끔 생각한다. 지금은 지극히 내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한때는 꽤 사교적이며 외향적이라고 스스로를 여긴 적이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며 길러진 성향이기도 하고 또 그런 모습에 호응해 주는 사람들이 많아 자연스레 강화된 것 같기도 하다. 가끔 그때 가까이 지냈던 이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자연스레 그때의 관성으로 끌려가는 느낌을 받곤 한다. 타인이 나를 좋아하는 방식으로 그 자리에 머물려는 습성 같은 것이 무의식 중에 배어 나오기도 한다. 현재의 나를 자연스레 보이기보다 과거의 외피를 뒤집어쓴 느낌 때문인지 공허해지기도 하고. 그때의 나는 겉으로는 외향적이고 활발해 보이긴 했어도 내면과는 상당한 불일치를 겪고 있었다. 불안하고 공허한 내면을 억누르고 탈피하고자 더 외향의 외피를 쓰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외적인 모습과 내면의 불일치 속에서 그 시절의 나는 꽤 혼란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런 상태로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언젠가는 우울이 마음을 덮을 거예요.”
대학교 4학년 집단상담 수업 시간이었다. 교수님이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의도적으로 외향적으로 보이려는 성향이 있어요. 그런 방식으로 타인에게 맞추다 보면 자기를 솔직히 내보일 수 없어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게 되고요. 마음의 문은 타인이 쉽게 알아보거나 들어올 수 없도록 점점 교묘하게 잠금장치를 만들고 말 거예요. 성취 지향적인 사회생활을 추구하게 되면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다고요.”
대학을 졸업하고 나의 사회생활은 교수님이 예언이라도 한 듯 그렇게 흘러갔다. 매너가 좋고 예스맨인 사람. 과묵하게 자기 일을 해나가는 사람. 사람 좋고 남에게 잘 맞출 줄 아는 사람, 그런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마음은 어딘가 골병이 들어있었다. 가끔 그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지만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소설을 쓰는 일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그때 교수님의 예언에 완벽히 들어맞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아찔해진다. 내면을 들여다보기보다 타인의 기준에 맞춰가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되었을 테니까. 지금은 되도록 내 안의 부정적인 모습을 인정하고 응시하려 애쓰려 노력하지만 타인과의 관계는 여전히 나에게 있어 하나의 숙제와도 같다. 평형을 이루며 수평을 유지하고 싶지만 늘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 버리고 말기에.
그런 고민 중에 이 소설, 부암동 랑데부 미술관을 썼다. 타인과의 관계성은 삶의 영토를 이룬다. 타인 없이는 나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소설 역시 삶과 타인으로부터 유리될 수 없다. 나 또한 이 소설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가려진 한쪽 눈으로 세상을 삐딱하게 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오히려 내면에 천착하며 점점 스스로를 밀폐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 고민과 함께.
완전히 안전한 세상은 존재하지 않지만, 옆 사람의 온기가 조금이라도 느껴질 수 있게 한다면, 그런 경험감이 우리가 누군가에게 손 내밀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 같다. 이 책이 많은 대중에게 가닿기를 바라기보다, 이 책의 무엇인가가 꼭 필요한 누군가에게 가닿으면 하는 바람,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써 나갔다.
때로 인물들이 이야기들이 나를 지나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세상의, 이 세계의 현실과 공기 중에서 흘러 떠돌다 나를 통해 활자로 내어지고 구체의 물성이 된다. 지나간다,는 표현을 쓰자면, 인물들은 이미 어디엔가 존재하는 것이 된다. 나는 그들을 담아 세상에 보일 뿐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는 직무에 충실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