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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란 Jan 24. 2020

1학기를 마치며 내가 얻은 것들.

12, 10, 10 열심히 산 나와 우리 가족을 칭찬해요.

짝짝짝.


이집트의 휴양지에서 학기말 시험 성적을 확인하며 자축한다. 

덴마크에서 내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며 임했던 대학원 생활의 4분의 1을 해냈다. 새로운 분야의 공부도 어려웠고 공부와 엄마 아내로써의 삶을 함께 해내는 것은 더욱 어려웠는데, 일단 좋은 성적을 받았으니 그간의 고생이 의미가 있었구나 싶다. 물론 좀 더 노력했더라면 12로만 빼곡히 채운 성적표를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얄미운 미련도 남지만, 12, 10, 10 (12, 10, 7, 4, 2, 0, -3 순으로 매겨지는 덴마크 성적시스템)이니 나름 선방이다!


좋은 성적만 얻은 것도 아니다.

자존감, 자신감을 얻었다.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무경력 엄마사람으로 살면서, 그리고 지난 CBS 대학원은 실패했다는 실패감에 내 자존감과 자신감은 바닥을 기었다. 어찌 보면 궁여지책으로 IT 분야, 개발자로써의 진로를 모색하게 된 것인데, 까막눈에서 보이는 글자가 하나씩 늘수록 배우는 재미도 생겼다. 그러니 열심히 할의욕도 생겼고,  진정 내 에너지를 쏟을 것이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몇 달간 공부하느라 새벽 세네시에 일어나는 게 일상이었는데 몸은 힘들었지만 재미도 있었다. 모두가 자는 새벽에 일어나 홀로 스트레칭을 한 후 공부를 하던 시간이 참 의미 있었고, 다음주부터 새로운 학기를 시작해도 이 새벽 습관은 이어나갈 것이다. 남들보다 하루를 길게 쓴다는 묘한 만족감도 있었다.  


좋은 삶의 자세도 얻었다.

대학원을 시작하기 전보다 아이들에게 절대적으로 쏟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마지막 시험 기간에는 주말을 마다하고 남편에게 맡긴 채 공부하러 학교에 가던 날들이 많았다. 그런만큼 아이들과 보내야 하는 시간만큼은 휴대폰도 멀리하고 아이들에게 몰입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학교가느라 바빠진 엄마를 아쉬워하지만, 이마저도 우리가족이 감내해야하는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전이라면 불평불만을 했을 법한 일에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배웠다. 아무리 내가 덜 좋아하는 공부라고 해도, 덜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세운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꼭 지나가야 가는 과정이라 여겼기에 스트레스를 덜(!) 받았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그룹은 자평하기에 정말 최악의 그룹이었다. 덴마크 남자애 F군을 빼고 모두 외인구단 여자들이었는데 정말 기본적인 아카데믹 글쓰는 법이나 연구법을 몰랐다. (최대한 동유럽, 남유럽, 발칸 이쪽 사람들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다.) 그도 아니면 성격이 진짜 혼자 딴 세계(터키) 같은 사람들이었다. 정말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오는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 아니었지만 벗어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좋은 친구들도 얻었다.

글쎄 대학생활, 고시공부생활을 돌아봐도 이번 학기만큼 함께 공부를 한다는 연대의식을 느꼈던 적은 없던 것 같다. 여태 살면서 내가 잘나서 내 공부를 내가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만큼 팀플을 해야할 때는 내가 이끌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점도 많았다. 이번 학기에도 세 과목 중 두 과목이 팀플이었다. 이번 학기에 내가 능력이 모자란 부분은 묻어가도 괜찮다는 것을 배웠고, 또 내가 나은 부분은 내가 나서야만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번에 F군이랑 프로그래밍과 소프트웨어엔지니어링 두과목 모두 같은 팀을 했다. 서로가 스트레스를 엄청 받던 프로그래밍 프로젝트 기간에는 굉장히 사무적인 관계였는데, 프로그래밍 구술시험을 준비할 때는 스파크를 튀겨가면서 공부했다. 걔는 12를 받고 난 10을 받았지만 난 아쉬울 게 없었던 게 난 걔만큼 준비를 못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진짜 얘랑 생각을 주고받으며 고민했던 기간에 많이 배웠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과목은 학기 내내 제일 손을 놓았던 과목이라, 프로그래밍 구술시험 이후 남았던 일주일간 F군이랑 같이 공부를 했는데 이때도 누구랑 같이 공부를 할 때 얻는 게 더 많다는 것을 배웠다. 두루뭉술한 과목 특성상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해했다 싶어도 확실하게 안다는 느낌이 오지 않아 답답했는데, 얘랑 말로 받아쳐가면서 공부를 하니까 그래도 서로 좀 아는 게 늘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런 과목에서는 걔보다 앞선다는 것도 알았는데 또 아는 것과 말로 하는 건 다르니 말로 알려주면서 나도 구술시험을 저절로 준비할 수 있었다.


얘는 어쩌다 아줌마에게 걸려들어 공부메이트가 되었는지 의아해할지 모르겠으나, 난 다음학기에도 얘를 통해 동기부여를 좀 받았으면 한다. F군 말고도 당연히 매일 의지하고 있는 한국인 J양도 있고, 또 다른 몇몇 친구들. 다들 참 열심히 하고 똑똑한 친구들이니 연대감이 든다. 학교 캠퍼스(라고 할 것도 없이 건물이 하나다보니)에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이 모두 열심히 하니 나도 그 소속감에 동승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진로에 대한 방향을 생각해볼 기회도 얻었다는 점도 언급하고프다.

프로그래밍 프로젝트를 하면서 느낀 점은 내가 능력이 모자라서 팀에 묻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백지에 코드부터 쓰고 보는 건 내가 잘하지 못한다는 것도 깨달았고, 남이 쓴 코드를 리뷰하는 건 그나마 쪼---끔 낫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리고 (계속 언급되는;) F군은 자다가도 코드 아이디어가 떠올라 새벽 세시에 일어나서 코드짜고 다시 잤다던데, 나는 그럴만큼의 재능과 흥미는 없음을 깨달았다. 반면교사로 남이 코드쓴 것을 베이스로 리포트를 쓰는 건 또 내가 잘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코드쓰기까지의 아이디어를 주는 것도 내가 꽤 하고 말이지. 교수님도 구술 시험 중에 내가 썼던 리포트 부분을 집으며, 내가 쓴 거냐고 물었다. (정말 잘 쓴 리포트라며 :) ) 이런 탤런트를 살릴 수 있는 분야, 좀 더 이론과 소프트한 곳에 집중할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일까, 나의 역량은 무엇일까 다음학기의 화두이다.


이외로, 시험에 대한 경험을 회고하자면.

프로그래밍 구술 시험에서는 자바 iterator 코드를 칠판에 써보라고 했다. String arrayList에서 Troels라는 아이템을 빼는 코드를 써보라고 했다. 루프의 종류와 각 루프방법별로 비교를 해보라는 질문의 후속질문이었는데, 당연히(?) 그 앞에 입으로 나불거리는 질문은 더할 수 없이 잘 대답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교수님도 그 점을 간파했을까, 코드를 직접 쓰라고 하니까 알던 것도 잘 못하겠더라... 많이 코드를 써봤어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역시 나의 약점을 잘 알아차리신 것 같다. ㅠㅠ 거기에서 어긋나서 12를 못 받고 10을 받았던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구술시험은 진짜 다시 경험하고싶지 않은 이상한 경험이었다. 일단 교수님의 말을 못 알아듣겠다는 것 ㅠㅠ(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말하는 점이다. 질문에 다다르기까지 이어지는 이해 안되는 말들의 향연...) 거기에 내가 좋아하지 않는 팀원들이랑 나란히 앉아 두시간동안 주고받는 말들. 또 익스터널 이그재미너의 냉랭한 태도. 어쨌든 결과는 선방이니 다행이지만서도 정말 흥미로운 과목 자체가 이상한 수업 때문에 망친 듯한 느낌. 몇 달 전만 해도 애자일이 뭔지, 스크럼이 뭔지, UML이 뭔지, 소프트웨어 분야 자체의 용어 자체를 전혀 몰랐던 내가 이정도 혜안을 얻게 된 게 최대 소득이다 정말. 정말 많이 배우긴 많이 배웠다!!


다음주부터 바로 2학기 시작이다.

수강신청 정정은 불가피한 것 같다. 내가 생각했던 개별 세부전공을 포기하고, Business Analytics로 데이터에 집중하기로 했다. 일단 DevOps수강 신청인원을 보니 우리 전공에서는 아무도 없고 모두 컴퓨터 싸이언스 진골 남자들뿐인 걸 알았다. 내가 할만한 게 아님을 깨닫고 좀 더 라이트한 방향으로 틀기로 했다...  


다음학기에는, 알고리즘/데이터스트럭쳐, 데이터베이스, 인공지능, 선형대수&확률 이렇게 들을 가능성이 높다. (팀플과 구술시험 없이 앉아서 치는 시험만 네개니 얼마나 다행) 다음 학기에도 얼마나 많은 걸 치열하게 배울까, 가슴이 설렌다. 이번 학기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올 12를 목표로 삼아 ??!!


아차차, 내 초심을 잃지 말아야하는데. 무사졸업, 그게 내 시작점이고 목표였는 것을 정녕 난 매번 까먹고 더 큰 욕심을 갖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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