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 대한 감상문
혼란에 혼란에 혼란을 더하다.
관광지에 가면 우리는 주로 그곳의 역사적 건축물을 살펴본다. 기가막히게 멋진 그 오래된 건축물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기꺼이 사람들이 돈을 들여 방문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건축물이 정말로 매력적인 것은 그것이 관광을 위해 건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참 아이러니하다. 고궁도, 만리장성도, 피라미드도 구경하라고 만든 게 아니다. 그래서 구경할 맛이 난다. 그러나 그 건축물에 담긴 함의와 위상과 여러 노고를 생각하면 그것이 그저 하나의 감상물이 된다는 것은 어쩐지 슬픈 일이고 초라한 일이다.
철학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학생들도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어느 학자들의 어느 사상을 공부하고 이해하고 암기하겠지만, 이를 가르치는 교사 임용의 시험에는 그 정도가 선을 넘어버린다. 거의 혼연일체가 되기를 기대하는 수준이다.
가령,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공부하면 모든 의문은 루소에 대한 생각과 입장을 맞추는 것에 집중된다. A를 루소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B에 대한 루소의 입장은 무엇인가요? 루소를 C라고 표현해도 되나요? 루소와 D의 관계는 어떤가요? 식이다. 그러면 루소의 대가가 나타나 마치 자기가 루소인 양 이렇다 저렇다 알 수 없다 대답을 해준다. 그러나 루소는 이미 죽었고, 살아 생전에도 다양한 개념을 사용했고 또 입장이 달라지기도 했으므로 사실상의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시험은 주관식이고 모범답안은 주어지지 않으니 그저 눈감고 코끼리 다리를 만지듯 공부를 해나갈 뿐이다. 그러나 그런 공부 속에서 생겨나는 진짜 비애는 그것이 전혀 성찰과 반성을 위한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얘기할 때, 이를 대하는 가장 탁월한 태도는 당연히 루소의 입장이 타당한지 아닌지 검토하는 것이다. 즉 루소에게 동조하거나 비판하거나 대안을 모색하거나 평가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루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인 철학을 잘 이해하게 되고, 마침내 세상 자체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으며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라서 오히려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생각을 정지시켜야 하는 문제가 된다. 안타깝다.
루소의 철학은 수험생들의 OX퀴즈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마치 저 관광지의 건축물처럼 그저 난해한 퍼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공부를 하면서도 생생한 통찰력을 잃지 않기를 바라며 기도해야 한다. 역시나 내 머리로 내가 세상을 통찰하지 않는다면 누가 세상을 어떻게 평가했느냐 따위는 하등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저 죽은 지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은 이러한 난해함을 가장 잘 드러낸다. 이것은 철학의 강점일까 약점일까. 가령 과학의 경우에는 개연성이 아닌 필연성으로 인과를 철저히 밝히고 논리적일 수밖에 없는 과정에 따라 세상을 분석하게 된다. 그러니 오류는 당연히 수정되며 언제나 생생하고 과학적 사실로서 아직 흠집이 없는 일련의 지식들이 빛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철학은 인문학이고 형이상학이라서 그냥 뱉으면 말이 되고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뱉는 족족 뱉는 모양새나 논리가 그럴싸하면 그것이 그순간 하나의 독립적 학문이 되어버린다. 철학을 공부할 때는 그래서 누구의 철학을 공부하냐는 질문이 따라나오게 되는 것이다.
천동설은 지동설의 등장과 함께 폐기되었다. 그 역사적 사실만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공자의 사상은 그 후에 천 명, 만 명이 반박하고 비판해도 폐기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그것은 오류냐 아니냐를 지적할만한 준거도 가지지 못하고 있고 그럴 대상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너무 난해해서 이게 논리적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고 그래서 비판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도 모르겠는 대환장파티가 펼쳐진다. 그냥 다 자기가 잘났다고 등장하는 모양새다.
이런 문제를 알았던 걸까? 이를 옮기는 해석가들이나 학자들은 이제 이것이 인류에게 던지는 의의에 천착한다. 즉,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실제 세계를 얼마나 잘 설명하는가가 중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사람들의 인식을 어떻게 바꾸었느냐로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럴거면 차라리 마르크스처럼 대놓고 인간을 개조하고 선동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는 편이 솔직하고 받아줄만 하다.
중력은 중력이다. 사람들이 중력의 존재에 인식을 바꿨던 바꾸지 않았던 중력은 중력이다. 중력은 사람들 인식을 바꾸려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맹자가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다고 성선설을 얘기하는 것은 어떤가? 선이 무엇인데? 본성은 무엇이며? 맹자는 정말 인간이 선하다는 사실을 밝혀낸걸까? 아니면 인간이 선하다고 믿고싶었던 걸까? 아니라면 사람들에게 인간이 선하다고 세뇌시키고싶었던 걸까?
이쯤 하면 이 난해함들이 더해지는 것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철학은 저급하고 과학은 고급스럽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저 그런 문제들이 있고 또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범람하는 혼란 속에서 어찌되었건 나 스스로가 잘 서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철학을 아예 공부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법을 공부하지 않아도 양심에 따라 살면 법을 어길 일이 없듯이, 세상에 따라 살면 그것이 곧 철학자의 삶이다.
과학적으로 낭만적인 얘기가 있다. 우리를 이루는 요소가 모두 별을 이루는 요소와 동일하다고. 그러니 우리는 곧 반짝이는 별이라고.
철학적으로도 얘기할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지식은 인간이 창출한 것이다. 그리고 당신도 인간의 일원이다. 그러니 당신에게는 이 세상 모든 지식을 창출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당신의 지성은 그정도로 고귀하고 그렇기에 존엄하다. 그러니 외부의 온갖 소음들에 그렇게 천착하지 않아도 좋다. 특히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의무를 부과하고 마치 인간이 원죄를 지은 것마냥 속죄를 해야하고 항상 스스로를 교정의 대상으로 여기게끔 하는 그런 것들은 특히 귀막아도 좋다. 모든 것은 자연의 의도로 자연이 산출한 것이다. 당신의 고통도 당신의 희망도 당신의 쾌락도 당신의 허무함도.
당신에게 중요한 진리와 가치들은 결국 당신에게서 나와야 하고 당신의 것이어야 함은 자명하며 그 평가의 권능도 오직 당신에게만 주어진다. 루소와 맹자 따위. 그래봤자 한 시대 발버둥치며 살아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p.s. 요즘 정신과가 그 과학적 지식을 등에 업고 권위를 가지고 과도하게 횡포를 부리고 있는 것 같다. 드디어 인간의 정신에 도달한 과학과 화학물질들, 그들은 과연 인간을 정복할 수 있을까? 인간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데 익숙해지게 만들었는데 그렇다면 예수와 부처를 그들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 못지 않게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요즘이다.
이상 의식의 흐름으로 글쓰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