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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새롬 Jan 07. 2018

#13 자본주의 대안 찾기- 마르크스와 푸코를 넘어서

마리아 미즈 & 베로니카 벤홀트-톰젠의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서평


오늘날 전 지구적 경제 현상이 완전히 새롭고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 애초부터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일부였던 (자본의) '시초 축적'과 식민화의 불가피한 연장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의 저자, 마리아 미즈와 베로니카 벤홀트-톰젠은 같은 문제를 두고 수년간 문제를 제기해 왔다. 그것은 자본주의 가부장제 경제구조에서 자연, 여성, 제3세계 사람들의 일이 지속적으로 착취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일은 비가시적고, 따라서 공짜 자원으로 치부되며 구조적인 폭력 속에서 수탈당하는 식민지가 된다. 여성의 경우, 가사 노동이 대표적이다.


  책에서 자본의 착취 과정은 ‘자연화’, ‘가정주부화’, ‘식민화’로 명명된다. 저자들은 이 개념을 농장 노동자, 소농, 소상인, 남반구 공장 노동자 등에 광범위하게 적용시키면서, 자본의 축적이 자급 생산을 착취하고 파괴한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태제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저자들은 그 원인을 첫째로 근대적 산업 생산이 확대 되면서 새롭게 나타난 성별 노동 분업 개념에서 찾았다. 남성들은 가족의 생계 부양자로서 임금 노동을 해야 하고, 여성은 남성의 노동력과 미래세대 임금 노동자를 재생산 하기 위한 가정주부로서 무보수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들이 보기에, 이는 남성이나 여성의 천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 축적 과정을 위한 구조적 필요의 산물이다.


  둘째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이다. 자유무역을 위시한 신자유주의 전략은 실물경제에 대한 사회적 무지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저렴한 임금 노동을 구할 수 있는 곳, 즉 식민지를 자유롭게 선택하고 이동시키기 때문이다. 자본이 지구화된 경제에서 비교우위를 실현하는 최적의 방법은 가정주부화된 노동을 활용하여, 환경적, 경제적, 사회적 비용을 외부화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가부장제 경제의 빙산 모델 (p.74)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가부장제와 임금노동의 결합이 불합리한 착취모델을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저자들의 분석은 그간 있어왔던 자본주의 경제체제 비판에 힘을 실어주는 듯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비판이 실제로는 가부장적이라거나 체계의 붕괴나 전환에 전혀 유효하지 않음을 밝힌데 있다.


  저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의 이행을 추구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임금 노동자인 프롤레탈리아 남성만이 존재할 뿐이며, 케인즈식 복지국가모델도 임금 노동체제를 고수하려고 한다고 비판한다. 임금 노동에 대한 집착은 근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포획되는 도구이며, 이후 여성의 역할이란 동등한 임금, 직업, 승진을 추구하는 등 남성이 만들어놓은 삶의 방식에 적응해야 함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


  한편, 저자들은 리오타르, 데리다, 푸코의 사상에 근거하는 포스트모더니니스트들이 억압의 문제를 추상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간의 섹슈얼리티가 해부학적이고 사회적·역사적 범주임에도 불구하고, 남성성, 여성성, 어머니의 개념에 대하여 물질적·역사적 실재를 부인하면서 오로지 차이만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사상은 ‘가부장제’와 같은 개념은 거의 언급하지 않으면서 성을 비롯한 모든 현실을 탈물질화, 탈정치화하여 체제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들의 생각이다.


마리아 미즈(좌)와 베로니카 벤홀트-톰젠(우)



  이 책에서 적으로 삼고 있는 자본주의 가부장제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가? 저자들의 대답은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일상적으로 대안적 실천이 가능하다는 것과 여기에 자급 관점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대안 부재' 신드롬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대안이 결코 없는 게 아니다. 우리는 자급이야말로 대안(Subsistence Is The Althernative: SITA)이라고 믿는다.


  저자들이 사용한 자급은 자급 경제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저자들의 주장에는 경제, 문화, 사회, 정치, 언어 등 다층적 차원이 포함되어 있으나, 초점은 가부장제, 식민주의에 기초하지 않는 자급 생산에 있다. 자급 생산은 상품이나 돈, 잉여가치를 위한 생산과는 반대로, 삶을 창조, 재창조하고 유지하는데 쓰이는 생산이다. 이때 생산되는 것은 삶 자체가 된다. 다시 말해, 저자들은 삶의 생산이 우리의 중심적인 관심사가 될 때, 식민화되고 주변화 된 영역을 복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급 또는 자급 경제보다는 자급 ‘관점’을 요청하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시에서의 자급에 대한 논의에서 알 수 있듯, 도시의 후배지에 대한 기생 관계로 인해 도시에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급일 수 없고, 말 그대로 자급을 지향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도시의 자급 지향성 사례로, 도시텃밭이나 생산자-소비자 협동조합, 물물교환 동아리, 레츠(Local Exchange and Trading Systems: LETS) 등을 언급하고 있으나 저자들도 인정하듯 시작과는 달리 자급 지향성에서 멀어지기도 하고, 또 도시에서의 경작과 같은 자급 지향성은 주변화된 사람들의 실망을 완화시키고 분노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하고 보조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할 위험도 존재한다. 관련한 논의는 더 이상의 진행하지 못하였는데, 농촌과 농업의 맥락에서 소농경제를 강조하며 자급 관점의 확실성과 실천성을 피력했던 저자들의 주장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자급 관점은 자본이 식민화한 자연, 여성, 제3세계를 탈식민화하는데 강력한 틀이다. 또 사회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유용한 일을 경제의 중심에 놓고, 무보수 노동의 가치를 조명하면서 상품 경제에서 도덕 경제의 이행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의 약 90퍼센트가 도시에서 살고, 많은 도시들이 점차 메가 시티로 덩치가 불어나는 현 시점에서 도시민의 자급 경제는 무엇인지, 어떤 방식으로 실천 가능한지가 보다 명료해지지 않는다면 책에서 언급된 낭만주의적 논의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실지로 우리나라 도시의 로컬푸드 운동이나 도시텃밭 프로젝트는 점차 국가제도에 포섭되고 있으며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탈피할 수 있는 강력한 니치로서 기능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저자들의 주장이 20여 년 전 서구와 제3세계를 오가는 논의임을 고려할 때, 오늘날 한국적 맥락에서는 자급 관점과 자급 지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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