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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Mar 21. 2021

약속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칼릴 지브란, <예언자>

Kahlil Gibran, <Two Crosses>


내가 어쩌다 광인이 되었느냐고 당신은 묻는다. 사연은 이러하다. 신들이 태어나기 훨씬 전인 어느날, 내가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보니 내 가면들이 모두 도둑맞고 없었다. 내 손으로 만들어 일곱 번의 생 동안 써 왔던 일곱 개의 가면이. 나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거리를 가면도 쓰지 않고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도둑이야, 도둑! 저주받아 마땅한 도둑이야!"
 남자와 여자들은 나를 보고 비웃고, 어떤 이들은 무서워하며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가 시장에 이르렀을 때 집의 옥상에 서 있던 한 아이가 소리쳤다. "미친 사람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 맨 얼굴에 태양이 입을 맞추었다. 처음으로 태양이 내 맨 얼굴에 입을 맞추자 내 영혼은 태양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랐다. 그리고 더 이상 가면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황홀감에 젖어 나는 외쳤다. "내 가면을 훔쳐 간 자에게 축복이 있으라!"
 -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무소의뿔) 中 <광인>을 발췌한 부분



 문득 정신 차려보니 이 세상이란 곳에 '내'가 있어 놀란 적 없는가? 나는 있다. 정신 차려보니 이 세상에서 아등바등 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봐주기로 하는데, 그래도 왜 하필 이 모습인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 사춘기 학생의 흔한 푸념과 비슷하게, 티비 속의 여느 사람들처럼 잘 사는 집 자식으로 태어나지 못하여 누릴 수 없는 것들에 애를 태웠다. 그러느라 청춘을 꽤 허비하기도 했었다. 누군가에겐 그게 광인(狂人)의 모습이었을 테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할 궁리를 하려 해도 바쁜 이 세상에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누군가를 질투하기도 했었고, 아무도 갖지 못했음에도 왜 하필 나 또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해 실체 없는 대상을 향하여 원망하기도 했었다. 마치 원래 내 것을 도둑맞은 사람인 양.

 이 일을 아주 예전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도 크게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지만은 않다. 하지만 스스로 꽤 나아졌다고 자부하던 시절도 있었다. 내 것이지만 가진 적 없으면서도 도둑맞은 것들을 놓아줄 수 있었던 때. 그니까 조금은 너그러웠을 때가.



사랑이 그대를 부르거든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힘들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를 감싸안거든 그에게 온몸을 내맡기라.
비록 그 날개 속에 숨은 칼이 그대를 상처 입힐지라도.
(중략)
사랑은 저 자신밖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며, 저 자신 밖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소유하지 않으며 소유당하지도 않는다.
사랑은 사랑으로 충분하므로.
-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무소의뿔) 中 "사랑에 대하여"



 약속 없이 이 세상에 솟아난, 하나뿐인 '나'를 깨는 경험이었다, 바로 그것은. 도둑맞은 탁상시계를 다시 도둑에게 돈 주고 사면서 도둑을 용서한 법정처럼, 나는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나 자신을 스스로 거두어들이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래, 세상을 용서하기로 하자. 처음에 그렇게 시작했었던 것도 같다. 예정 없이 나를 내어놓고는 기약 없는 시련과 고통을 주는 세상을 용서하는 일.

 아쉽게도 사랑이 머물었던 시간은 긴긴 장마철의 맑은 하늘처럼 아주 찰나였다. 우산 없이 거닐 수 있는 순간과 잠깐 사이의 자유. 이후에 다시 세상은 내게서 모든 걸 순식간에 앗아갔다. 이제는 사랑마저도! 사랑마저도!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어도 내 맨얼굴에 태양이 입을 맞추었었다는 것.

 그로 인하여 내가 세상을 용서한 적이 있었다는 것.



Kahlil Gibran,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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