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의 <불교를 철학하다>를 읽고
잊고 산 것이 그새 많아졌다. 어느 때에는 굉장히 여유로운 사람이었다, 나는. 그때엔 가진 것과 이룬 것은 없었지만, 마음만은 너그러웠다. 주변 사람들의 실수에도 웃어주며 위로할 수 있었고, 내 실수에도 자책으로 가슴만 앓지 않고 다음의 나에게 기회를 주자 스스로 위로할 줄도 알았었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그때와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속에서 화가 끓는 일이 잦았다. 다른 사람과 나의 작은 실수에도, 예상하지 못한 사소한 상황 변화에도. 무언가에 쫒기는 사람처럼 괜히 불안하고 짜증이 일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마음이 여유롭고 너그러울 때의 나보다, 지금 물질적으로 더 많이 갖고 누리고 있는 나는 무엇이 문제일까.
답을 알고 있다. 그것은 마음이다. 갑작스럽게도 나는 절에 가고 싶어졌다.
불교는 날더러 버리고 살라한다. 공연한 것에 매달리는 일을 그만두라한다. 주변 사람의 작은 표정 변화에도 내 탓인가 속으로 고민하는 일을, 어제와 다르게 변해버린 사람을 보며 아쉬워하는 일을 그리고 괜한 일에 고집을 부리는 일을. 그만두라 한다. 나름대로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나였다. 사람들의 미세한 표정이나 태도의 변화에서 괜한 이유를 만들어내려하지않고, 스스로 어떤 것에 매몰하여 집착하지 않으려해왔다(無相). 나를 둘러싼 환경이야 어떻게 변하든, 잔잔한 호수처럼 가끔은 넘실거릴 수 있어도, 파도처럼 철썩거리지는 않으려 노력했다. 취업이나 집안 문제에도, 학업에도 나는 그런 태도를 견지해왔다. 친한 친구가 학업이 어려워 걱정이라는 말에도 묵묵히 도와주면서 이 또한 자연스럽게 지나갈 것이라 위로했고, 내 어려움 역시 그렇게 여긴다 말해주었다. 그런 노력이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비춰졌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 마음으로는 불당이 멀지 않았었다.
그런데 최근을 아주 잠깐만 돌이켜보아도, 이미 그런 내 모습은 이미 요원한 것만 같다. 이유 없는 질책을 받은 선배의 분노에 같이 화가 나고 부당함을 느꼈다. 작은 일이 몇 개만 밀려와도 금새 번거롭고 불합리를 느껴, 일하는 시간보다 푸념하고 고뇌하는 시간이 길었다. 내 마음은 불당은 커녕 이미 전쟁터였다. 총칼을 들고 아군과 적군도 모른채 비명을 지르는 나는 패잔병이었다. 부지불식간에 모든 공(空)성이 몸에서 표백된 것이다. 머리로 잘 알고 있는 그 불성을 몸과 마음이 깨끗히 잊어버린 것이다.
머리 아닌 몸으로 마음으로 살아내는 삶에, 실천할 수 없다면 이 무슨 소용인가!
자연처럼 살고 싶었다. 자연 보다 더 자연(自然)스럽게. 강가에 피어난 꽃을 보았는가. 살랑살랑 봄바람에 수줍은 듯 고개 갸우뚱하는 그 꽃을. 아름다운 꽃에 억지는 없다. 씨앗이 억척같은 의지를 가지고 그 자리에 달려가 박히고자 한 것이 아니다. 줄기가 대단한 목적의식으로 씨앗 껍질을 뚫고 세상밖으로 올라온 것이 아니다. 본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씨앗과 줄기를 자연으로 살게 한 것이지.
사람도 그렇다. 본성대로 산다. 강처럼 산처럼 할 바를 묵묵히 하고, 봄바람 위의 날리는 민들레 씨앗처럼 삶을 흘려 보내듯이.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업(karma)이라 여기고 말이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그러나 본성대로, 그러니까 업대로 산다지만 사람이 스스로 그 본성과 업을 알기는 어렵다. 내 업을 내가 모르는데 어찌 살 것인가. 그러면서도 놀라운 건, 과거의 내 업은 결국 현재의 내 모습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내 삶은 과거의 내 업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내 삶이 현재 어떠한가, 남을 시기하고 나를 스스로 못마땅히 여기고 그렇게 지질한 삶이 내 현재의 모습이라면 과거의 내 업이 그러한 탓이고 미래에도 그렇게 살 것이다. 그렇지않고 남에게 박하지 않고 나 스스로에게 떳떳한 현재의 모습이라면 그 역시 과거의 덕이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業). 현재의 업이 과거의 업을 대변하고, 또 미래의 업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업이 명백히 현재의, 과거의 그리고 미래의 내 모습이다. 마치 자연의 본성인냥 그렇다!
잊었던, 그것이 자연다운 것이고 살았었던, 살고자했던 방법이었다. 개울가를 흐르듯 바람에 날리듯, 묵묵히 묵묵히. 쉼을 깨면 나가야하고 나가면 기진맥진해지고 다시 잠에 드는 쳇바퀴 돌듯한 비바람 같은 삶에, 강이 빗물을 껴안고 또 바다가 강을 껴안아 다시 빗물이 되면서 꽃을 피우고 생명을 길러내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청산에 살어리랏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