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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Dec 30. 2022

깨어진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를 읽고

 아바타라는 영화에는 외계종족이 등장한다. 인간인 주인공은 임의로 만들어진 외계인의 육체로 들어가 다른 외계인과 교류를 하다가, 마침내 외계인이 된다.  이상한 점은 외계인이 된 주인공은 자신이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나라면 쉽게 그러진 않을 텐데. 먼저 의심을 할 것이다. 바뀐 내 몸을 보면서  "이 퍼렇고 기다란 몸이 나라고?"


이우환, <선으로부터>(1974)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렸을 때에는 몸이 변하는 것이 두려웠다. 코흘리개 꼬마였어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키가 자라고 팔과 다리가 길어지는 일이 죽음에 가까워져 가는 일이라는 것을. 그런 생각에 잡혀있다 보면 모든 것이 막연히 불안하고 두려웠다. 시간이 지나면 중학교에 가고 대학에 가고 또 아빠처럼 회사를 다니고 그러다가 그러다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지. 그리고 나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상념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Pablo Picaso, <Guernica>(1937)


 그러고 있노라면 눈앞에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이 모두 애틋하고, 모든 걸 앗아가는 세상에는 나 혼자만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 한 구석에 그런 울적함에 눌려 쭈그리고 있으면, 어느 때는 엄마와 이모가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웅크리고 있냐고 물었고, 대답 대신 나는 별거 아니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네 나이에는 그런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핀잔이 듣기 싫기도 하여 그때는 비밀로 남기기로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 나이에는 하지 않을 심오한 고민을 하는 내 모습이 사뭇 스스로 대견하였다. 이것은 나 혼자만 알고 있을수록 더욱 그런 느낌을 주었다. 스스로를 낯설게 하면서.


 이때에 나는 하루키의  소설의 제목처럼  철저히 "일인칭 단수"가 되었던 것이었다. 익숙해 보이는 이 말의 뜻이 도통 떠오르지 않는 말이지만, 생각해보건대 아마도 나의 시선을 뜻하는 "일인칭"과 한 개라는 "단수"라는 말이 합쳐져 아주 사적이지만 비밀스러운 상황의 개인(혹은 상황 자체)을 뜻하리라. 코흘리개의 내가 그렇듯, <일인칭 단수>의 주인공도 "일인칭 단수"의 시간과 공간에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혼자 있는 시간에,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한 곳에서 주인공은 불편한 정장을 차려입고 거리를 나서 산책을 하고, 평소에는 가지 않는 칵테일 바에서 독서를 한다. 스스로에게도 낯선, 이러한 행동을 하면서 주인공은 정장 입은 자신의 이질적인 모습에  도취한다.


 자신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느끼는 배신감과 여기서 비롯된 위화감을 즐기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낯선 곳에 여행을 간다든지, 평소에는 가지 않을 만한 곳에 놀러 간다든지, 이름 모를 사람과 깊은 대화를 시도해 본다든지. 그런 것들이 반복되는 일상에 숨구멍이 될 수도 있다. 어렸을 적 학원 집 학원 집 하던 나에게도, 그리고 <일인칭 단수>의 주인공에게도 그랬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러고 있으면. 재밌어요?" 칵테일 바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등장으로 주인공은 단숨에 "일인칭 단수"의 공간에서 일상의 "나"로 추락한다. 마치 길을 걷다 맨홀 아래로 빠지듯이.  "3년 전 물가에서 내 친구에게 한 고약한 짓 탓에 당신이 미워졌다"는 알 수 없다기보다는 기억나지 않는 말로, 푸른 초원이 있고 뛰노는 어린아이가 있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당나귀가 있는 목가적인 여행지에 있던 나를 퀴퀴한 일상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3년 즈음 어느 물가를 떠올리려 애쓰다가 그만, 매일 같이 쳇바퀴 같이 굴러가는 밥벌이, 부모 노릇, 자식의 도리 등과 같은 지루한 의무감에 흠뻑 젖어드는 것이다. "그때의 그곳에서 나는 무엇을 하지 말았어야 했길래?"라고 자문하다가 그때 그곳의 일이 기억나지는 않더라도,  "아, 나는 이런 낭만적인 곳에 오기 전에 그저 그런 사람이었지." 하고  그만. 내가 두고 온 현실!


Rene Magritte, <Evening Falls>(1964)


 "오빠, 그 여자 누구야?"라는 말에 놀라지 않을 남자는 없다고, 우스갯소리로 친구와 얘기한 적 있다. 이 말은 누구에게나 해당된다고, 그 오빠가 아주 샌님이라도 말이다. 아버지의 유전자 혹은 아버지의 아버지의 유전자, 혹은 아버지의 아버지의... 먼 아버지부터 내려온 유전자 탓에,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놀랄 것이라고. 이유 없이 흠칫.


깨어진 "일인칭 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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